DIE ERRETTUNG DES SCHÖNEN

한병철 Han Byung-Chul | 《아름다움의 구원》

by CHRIS
아름다움에 대한 개인적인 상념
Personal Reflections on Beauty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다. 바라보는 것을 필요로 하며 바깥에 존재한다. 외부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 내 안의 아름다움이란 자가당착적이며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된다. 아름다움의 발견은 타자적인 시선으로만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개인적인 취향이다. 절대적인 언어는 아름다움 속에서 힘을 잃는다. 사람들이 대상을 아름답다고 할 때 신화에서 설명하듯이 마술처럼 사랑으로 빠져드는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정지된 아름다움은 고대 유물과 같은 화석의 상태이며 그것은 살아있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보다 과거의 신비에 대한 고고학자의 희열과 같은 시간 외의 발견이라고 하겠다. 아름다움은 내부적인 동요와 변화를 불러오며 심리적인 것을 동반한다.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미가 아니다. 뇌리를 전율하게 하고 에로스로 향해갈 수 없는 것도 아름다움은 아니다. 모두에게 미(美)란 공통의 언어가 된다고 설명하는 예술사적인 이론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은 공통적이지 않다.


직업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했던 아름다움이 아름답지 않았기에 일률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했던 자로서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개념에 있어 타자와 부딪히게 된다. 타자들이 획일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은 내게 아름다움은 아니다.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가벼운 농담이 되기 쉽다. 언어로 말해진 아름다움은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판매를 촉진하는 고무적인 발언이 될 수도 있고, 타자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가벼운 일상언어가 되기도 한다.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발설하기 어려운 주제이며 철학적인 사고로 전환된다. 아름다움은 '미스코리아', '미스 춘향', '월드 인터내셔널', '미스 월드'처럼 마론 인형을 닮은 여자들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에서만 벌어지는 관용적이면서 상투적인 단어 전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 자연을 이탈한 것, 우주적인 것, 공허한 것, 심리적인 것, 육체적인 것, 기이한 것, 신기한 것, 놀라운 것, 혐오스러운 것, 경탄할 것, 마술적인 것, 미술적인 것, 음악적인 것, 슬픔이나 괴로움과 절망과 같은 통증의 기분들이 극대화된 것, 파괴적인 것, 복합적인 것, 단순한 것, 어지러운 것, 명료한 것, 연속적인 것, 소거된 것, 변질된 것, 남아있는 것, 추상적인 것, 구체적인 것, 모호한 것 등등 열거할 수 없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고 이미 변화를 시작한 상태의 것들을 가리킨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미도 있다. 사물을 창조하고 실행하는 제작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의 관점은 관찰자나 기록자, 문학가, 사색가의 아름다움과 동일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주어진 사회의 표현 언어는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자기만의 발설을 통해 타인과 구분되는 관찰 시점과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사물을 만들거나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직접적인 제작이 아닌 그 열외의 입장에서 관조하거나 수식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롭다. 그 또한 창작의 산고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해 의문이 가득했던 한 때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한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는 삶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전보다는 포괄적이면서 느긋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DIE ERRETTUNG DES SCHÖNEN》은 세속적인 것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머리를 식히면서 새로운 개념을 끌어내는 비타민 보충제 같은 역할을 한다. 내부적으로는 상업예술에서 본질적인 나만의 예술적인 세계로 넘어가기로 결정한 이후로, 먹고살기 위해 계속적인 분투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생활의 입장에선 더 이상 타인들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상태이며 객관화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아름다움에 연구하는 미학(美學)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름다움을 실행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중적인 찬미이거나 개인적인 비평의 묶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예술가나 작가들은 생이 존재하는 동안엔 타인의 비판과 찬사로 먹고 산다. 혹은 드러나지 않을 땐 무관심에 철저히 버려질 수도 있다. 비너스의 풍만한 가슴과 균형적인 황금 인체 비율을 성형외과에서 적용하는 신체 개조의 프로포션으로 마킹한다던지, 다비드의 섬세한 근육과 엄숙한 사제들의 행렬에 천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던 다비드의 성기를 상징적 불합의 시대언어로 받아들이고,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천장화에서 신적이고 기독교적인 서양예술의 태동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런 공중적이고 이론적인 아름다움보다 개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유희일 수 있다.


사물들의 말을 듣기 위해선 사물들에 대한 감각을 훈련해야 한다. 그동안 쌓았던 이론적인 개념을 완전히 소비를 했고 사회에서 받아들인 인식을 정리하지 못한 채 개인적 사상을 구성하는 작업에서 멀어져 있었다. 심장과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 나에겐 아름다움으로 인식된다. 생동하는 발전기의 시동을 켜기 전,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DIE ERRETTUNG DES SCHÖNEN》 속에 빠져봐야겠다. 《에로스의 종말 AGONIE DES EROS》에서 한병철의 거칠고 구멍 난 언어가 마음에 들었다. 외부에서 일을 할 때 나의 입장만 밀어붙이기만 했지 학구적인 인간들과 토론한 지도 오래되었다. 타자의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세 번 잘 읽지 않는데, 이론적이든 논리구조든 간에 완벽하지 않음이 좋아 보일 때가 있다. 한병철이 정말 아름다움의 구원에 빠져들었는지, 진정 아름다움의 구원이란 무엇인지, 우리를 어떠한 아름다움으로 구원할 것인지 살펴본다.




아름다움의구원.jpg [DIE ERRETTUNG DES SCHÖNEN, Han Byung-Chul] PHOTOGRAPH by CHRIS


한 번,

나는 그를 들었다,

그는 세상을 씻고 있었다,

남몰래, 밤새도록,

실제로.


하나가 무한히,

파괴되었다,

괴하기.


빛이 있었다. 구원.


《파울 첼란, 한 번》



Einmal

da hörte ich ihn,

da wusch er die Welt,

ungesehn, nachtlang,

wirklich.


Eins und Unendlich,

vernichtet,

ichten.


Licht war. Rettung.


《Paul Celan, Einmal》



Once

I heard him,

he was washing the world,

unseen, nightlong,

real.


One and infinite,

annihilated,

they I'ed.


Light was. Salvat.


《Paul Celan, Once》



고대 신화적인 요소에서 벗어나서 현재로 이어지기까지 서양의 정치문화사상에서는 기독교적인 시간이 흐르고 있다. 기원전 BC (Before Christ)를 종료한 뒤 기원 후 AD(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라는 용어에서 발견하게 되듯이 연대기적인 서구의 시간 표기는 모두 신에 속한 시간이다. 서구의 가치들이 세계의 표준으로 인식되는 지금의 시간에서, 어느 정도 머리와 진취성이 있는 자가 기독교 사상을 공부한 뒤 철학과 예술을 접목해서 서구적 사상으로 무장한다면 똑똑하고 신선한 이교도의 취급을 받으며 기독교 상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지구의 시간에서, 더 나아가 우주의 시간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서양의 정치사상이나 철학과 학문세계로 깊이 들어갈수록 중세에서 근대까지 두텁게 만들어진 사상의 근저에 종교적인 냄새가 짙게 깔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행히 한국에 태어났기에, 또한 종교를 믿는 젊은이들이 부모세대보다 80% 이상은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해체되는 세계적 사상이 주는 하나의 장점은 종교적인 것에 몰두하지 않아도 신에게 귀의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먹고살 수 있다는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절대 이론으로 무장된 신앙적인 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첫 장부터 파울 첼란의 시를 읽으면서 시선이 차가워지긴 했다. 모든 아름다움을 신으로 귀결되는 관점을 제시하거나 신을 향한 몰두를 예술의 구원으로 귀결한다던지, 그 한번 빛으로 몰입이 아름다움을 탄생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대해 현대 예술철학을 파해하는 한병철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매끄러움


제프 쿤스(Jeff Koons)의 <풍선 개 Ballon Dog 오렌지>의 표식에서도 보이듯이 매끄러운 표면의 긍정은 악플에 상처 입고 좋아요에 몰입하는 인간 심리를 반영한다. 물 수 없는 개, 장난감 개, 바람이 잔뜩 든 개, 계획적인 파괴를 몰고 오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닌 공기만 가득 채워있는 내면이 없는 개는 어려움과 고통에 환멸을 느끼면서 일상의 소통과 작은 기쁨을 원하는 세대에게는 아이돌의 상징인 굿즈(Goods)처럼 재앙 없는 친밀함을 가지고 올 것이다. 판단과 해석, 성찰, 사고가 없는 어린아이와 잘 다듬어진 여자의 우윳빛 살결처럼 풍선 개는 부드럽고 유아적이고 평범하고 평온하여 깊이나 심오함은 없다. 제프 쿤스를 알게 된 것은 가벼운 귀걸이로 만들어진 핑크색 퍼피(Puppy)를 보면서였다. 앤디워홀의 수프캔처럼 복제성이 가득한 키치적인 형상에서 또 한 명의 성공한 광고 입안자를 보게 되었다. 부정성을 이토록 가볍게 긍정성으로 바꿀 수 있다니 노랗고 굵게 형광펜을 친 포스터의 문구처럼 생각이 사라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내용전달이었다. 의미가 깊으면 먹히지 않는 세대에게 있어, 얕고 가벼운 형상으로 만들어진 물체는 대중적인 기호를 반영한다. 한마디로, 제프 쿤스는 심오한 예술가나 철학자라고 하기보단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뛰어난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에서의 감각성은 "이론적 감각들인 시각과 청각"에 고정시킨다. 예술에서 쾌적한 것 (Das Angenehme)으로 대변되는 후각과 미각은 향유에서 배제된다니, 요즘 요리사와 조향사 또한 예술가로 불리는 세대와는 좀 배반되는 주장은 아닐까? 롤랑 바르트 (Roland Gérard Barthes)에 의하면 "가장 마술적이면서도 이격성을 유지하는 감각인 시각과는 반대로 여러 감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탈신비화하는 감각"인 촉각은 거리를 제거하는 감각이라고 한다. 아이가 엄마를 만지고,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죽음을 마무리하는 씻김의 모든 순간들은 탈신비의 과정이라면 그 친밀감은 심적인 만족을 생산하고 현실을 인지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제프 쿤스의 반짝이는 풍선은 거울과도 같아서 자신을 비추고 실존을 확인하는 수단이기에 낯선 타자보다는 부정성이 없는 동일자를 다시 만나는 결과인 것이다. 2003년 산 동 페리뇽 로제 빈티지 와인 한 병을 출산하는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 슬픔의 인간)에서 벗어난 제프 쿤스의 <풍선 비너스 Ballon Venus> 또한 세상에 윤회를 몰고 온 예수를 낳지 않는 성모마리아이며 작가 자신이 관객에게 축복과 세례를 베푸는 절대자의 위치로 전환하는 소비의 종교를 연출하고 있다. 한병철은 상처와 부정성을 예술의 본질로 보았던 가다머(Hans-Georg Gadamer)를 끌고 온다.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특별한 것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초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성은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의미 기대에 맞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이다. 거기에는 너를 보지 않는 지점이 전혀 없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다. 모든 예술적 경험이 그런 특수성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난다." 《미의 현재성,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Die Aktualität Des Schönen, Hans Georg Gadamer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가 말하는 "미의 현시성(The Relevance of the Beautiful)"은 아름다움이 시간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현시되는지와 그것이 우리의 경험과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한다. 미적인 경험은 쾌락을 넘어서 예술작품과 상호작용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병철은 브라질리안 왁싱과 같은 위생강제의 매끄러운 제모처럼 촉감과 접촉에 의한 미를 느끼는 것은 만족과 좋아요에 몰두하며 동일자를 강요하는 경험과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부드러운 이야기만 흐르는 세상은 날카로운 비판을 원치 않는다. 매끄러운 시각적 소통은 전염 없는 세계로 대상을 몰고 가고 빈틈없는 가시성은 시선을 파괴한다. 현존과 부재, 은폐와 폭로의 율동적인 교체만이 시선을 깨어있게 한다. 잠을 재우지 않고 눈 위로 적나라한 빛을 투과하는 고문처럼 계속적으로 눈을 뜨고 있으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끔찍한 것조차 말끔하게 정리되어 추(醜)함 조차도 탈경계와 해방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 추함과 역겨움을 착취하는 오락산업이 삶의 타자, 형태의 타자, 부패하는 것과 같은 파렴치한 현상의 시체처럼 형태가 없으면서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제적인 측면을 흥미 있고 재미있게 만들어가면서 부정성에서 역겨움을 느끼는 긍정의 세계로 변하는 것이다. 위생적인 이성의 조명 아래에서 모든 애매함과 비밀들이 더러운 것으로 지각되고, 정보데이터처럼 매끄러운 흐름에 순응할 때 내면이나 뒷면, 애매함이 사라지기 때문에 대상을 계산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과정 속에서 행위는 투명해진다.


"정보는 지식의 포르노그라피이다."


지식은 일정한 시간의 저항을 극복해야 쟁취할 수 있고 매끄러운 정보와는 달리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이며 다른 시간적 구조를 통해 무차별적인 현재의 지점을 파괴한다. 사건도 운명도 없는 시간을 거칠게 만들며 타자와 낯선 자를 초대한다.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매끄러움의 긍정성은 지식의 칼 앞에서 동일함까지도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매끄러운 몸


"클로즈업된 얼굴은 가까이에서 관찰한 성기와 똑같이 외설적이다. 그것은 성기이다. 모든 상, 모든 형태, 가까이에서 관찰한 모든 신체부위는 성기다." 《타자적 자아, 장 보드리야르 Das Andere selbst, Jean Baudrillard》


"클로즈업은 공간을 팽창시키고 슬로모션은 운동을 팽창시킨다. 확대는 '그냥 봐도'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또렷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소재의 완전히 새로운 구조 조성을 드러낸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Walter Benjamin》


클로즈업 미학에 대해 클로즈업은 몸을 읽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게 해 준다는 면에서 한병철은 자기 안에 갇힌 얼굴을 상징하는 셀카는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게 하고, 자아의 내면적 공허를 표시한다고 본다. 끊임없는 자아의 공회전과 자기 생산적인 근심과 공허는 부정적인 나르시시즘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이나 건축물에서 거리 쪽을 향한 정면을 뜻하는 파사드 Fassade(Facies)가 나타내는 얼굴(Face)은 조리개를 열고 초점 심도 없이 명확하게 찍는 것이 필요하다. 내면과 시선을 제거하는 스스로의 드러냄은 기록으로 변환되고 디지털화된 데이터 기록들처럼 정량화된 자아(Quantified Self)는 신체들을 데이터로 해체한다. 이렇게 세분화된 데이터들은 장기들 또한 국부적인 대상들로 수치화하여 투명하게 공개한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자동운전이나 카셰어링처럼 인간은 수단화되고 네트워크에 연결된 거세된 남근(Phallus)을 상징하며 점유와 소유, 권력과 같은 환상을 파괴하면서 인간을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남게 한다.




매끄러움의 미학


아름다움의 미학은 미와 숭고(Sublime)가 분리된 근대의 현상이라고 보는 한병철은 숭고함의 부정성이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긍정성으로 바뀌고, 숭고는 주체의 내면적 형식으로 전환한다고 말한다. 위偉 롱기누스(Pseudo-Longinos)와 플라톤(Platon) 시대에는 미와 숭고를 구분하지 않았고, 여기엔 '눈의 고통'처럼 고통스러움조차 아름다우며, 형이상학적인 미에서 발견되는 놀라움과 전율, 경외와 경악, 광기는 주체의 자율성과 자기만족을 뒤흔들었다. 한병철은 부정성이 없는 최적화된 표면은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의 즐거움을 낳는 주요 원인이며 견고함이나 강함, 거친 모서리보다 부드러움이나 연함, 작고 어여쁘고 밝은 긍정적 즐거움의 미는 타자성과 낯섦을 잃어버린 숭고의 미와 주체의 내면성에 흡수되는 동일한 근원을 지닌다고 본다. 자기애적인 주체성의 바깥 공간이 허용될 때 타자의 미가 확보될 것으로 인식하며 미와 숭고의 긍정과 부정을 하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미


자기애적인 내면에 둘러싸인 칸트의 주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한병철은 자연의 숭고 앞에 자기 안에 갇힌 주체는 바깥으로 해방된다고 본다. 전율과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의 눈물을 통해 완전한 타자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균열을 느끼고 존재의 다른 상태, 폭력 없는 삶의 형태를 향한 갈망을 완성한다. 디지털 미가 상징하는 균열 없는 동일성의 매끄러운 공간은 부정성이 제거되어 있다. 존재의 전면적인 디지털화를 통해 절대적인 주체성이 달성되고, 그 안에서 인간주체는 자기 자신만을 만나게 된다. 다가올 유토피아적 지평선에서 아우라 속의 멂을 표시하는 자연미는 소비될 수 없으며 음악처럼 붙잡으려는 시도는 사라진다. 예술은 자연미 자체와 자연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하여 자연을 구원하고 자연의 침묵을 모방한 형상을 표현한다. 자신의 망막으로 뒤덮은 세계에서 소비하고 사용하는 차이들을 허용하는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보편적인 동일성의 속박 속에서도 사물에 남아 있는 비동일성의 흔적인 자연미는 예술미와 동일시된다.




은폐의 미학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은 흥미를 상실한다. 투명하다는 것과 진실성은 부합되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포르노그래피는 덮개가 없는 쇼윈도처럼 하나의 사물을 노출하는데 집중하고 방향의 전환 없이 곧장 대상으로 직진한다. 옷을 벗지도 폭로되지도 않는 미의 본질은 직접적인 감정이입과 소박한 관찰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은유로 지은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들고 은폐의 기술은 텍스트의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독서를 사랑의 행위로 만든다. 텍스트의 에로틱한 즐거움은 드러냄과 숨김의 동시적 연출이면서 가상인 것이며 베일의 현상이다. 영혼의 포르노그래피는 유혹의 최종적인 종말이며 유혹은 진리보다는 유희에 가깝다.


"유혹은 그 자체로 타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것,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것, 그럼에도 비밀로 봉인된 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 《악의 투명성, 장 보드리야르 Transparenz des Bösen, Jean Baudrillard》




상처의 미학


피부가 벗겨진 존재의 고통과 상처의 감수성은 가죽 깊숙한 내면까지 상처 입힌다. 좋아요가 지각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본다는 의미는 남들과 다르게 보는 것, 언제나 다르게 보고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Wahrheit)도 진실을 취하는 지각(Wahr-nehmen)도 없다. 전율과 엄습의 부정성과 상처의 부정성을 수반하는 경험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그 고통 속에서 현존하는 것의 실체적인 타자성이 자신을 드러낸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스투디움 (Studium)으로 분류되는 정보와 학습은 단순히 'like'로 만족하는 장르이며 어떤 격렬함이나 전율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반의 욕구와 절반의 욕구를 가동하는 막연하고 피상적이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반면 푼크툼 (Punctum)은 온통 관심을 장악하는 짧고 적극적이며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눈요기의 사진을 꿰뚫는다. 시각의 빈틈을 표시하는 푼크툼은 '눈먼 영역'으로 교란하고 갈라진 시선으로 불투명적인 이름으로 내면의 불안을 매혹시킨다. 섬뜩하게 이름 없이 존재를 꿰뚫고 침묵 속에서 상처를 입힌다. 모든 의미, 의도, 의견, 평가, 판단, 연출, 포즈, 몸짓, 코드, 정보가 사라지지만 푼크툼은 상징적에 대립하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보기의 금욕을 전제로 한다. "정적 속에서 영상이 말하도록 하는 것"이며, 상상에 의한 꿈의 기록이자 언어이다. 대상을 자극하여 영향을 미침으로써 대상에 어떤 특정한 상태를 야기하는 라틴어 아피케레에서 유래된 아펙툼 (Affectum)은 정념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고함을 지르고 격양시키는 언어 없는 흥분과 자극만 야기한다.




재앙의 미학


"예술의 과제는 모든 형상의 가시적인 표면의 모든 지점을 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 눈에는 자유로운 영혼이 지닌 무한한 내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학강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칸트 (Immanuel Kant)의 실천이성적인 주체와 정언명령에 대해 헤겔의 변증법적인 미학이 말하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us Panoptes)를 대조하는 한병철은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칸트의 실천이성은 모두 노매드(Nomad)적인 재앙에 대해 바깥과 전적인 타자에 맞서는 주문(呪文)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기존의 경험과 관념 속으로도 묘사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으며 포섭할 수 없는 독특한 것, 희귀한 것, 탁월한 것인 아토피아(Atopie)는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유년 시절 근원인 텅 빈 하늘이며, 절대적인 공허가 광포한 매혹과 기쁨으로 급습하여 하늘의 무한성에 마음을 빼앗기는 행복의 공식인 것이다. 사건의 미학으로 불리는 재앙의 미학은 눈을 엄습하는 티끌과 같은 사소한 사건이나 여명 속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눈, 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풍기는 암석의 향기처럼 자아를 비우고 탈내면화하고 탈주체화하면서 공허한 사건으로 변화되어 자아를 몰수하기 때문에 아름다우며,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의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에서의 아름다움을 흩뿌리는 별들(Des Astres)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이며 나방이 아름다움에 다가가서 타버리는 횃불(Flambeau)이며 무덤(Tombeau)이다.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에서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이며 이 끔찍한 것의 부정성은 미의 모체이자 심층이며 형상이 아닌 막(幕)이다. 끔찍한 것의 부정성이 미에 본질적이라고 보는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는 미는 형식이 없고 구별되지 않는 것에 기입되는 형식이라 말한다. 미는 끔찍한 것들에 무기력한 환원을 가하여 그것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고양시킨다. 미는 끔찍한 것을 비난하지 않고 죽은 가상으로 굳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적인 형식 없는 것을 필요로 하며, 형식을 부여하는 합리성은 형식 없는 것, 끔찍한 것에 다가가는 좀비적인 미메시스(Mimesis)에 의존한다. 적대적이고 부서진 일치성은 분기와 모순에 속해있으며, 통일성은 부서지고 타자에 의해 미의 심장은 부서져 있다. 허약하고 연약하며 부서짐이 내재한 건강한 매끄러움의 표현방식은 건강의 창궐을 통해 병의 해독제로 미를 소환한다. 자신을 의식하면서 삶 자체의 제한인 아름다움이자 병은 단순하고 건강한 삶에서 벗어나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있는 세계의 탈출을 모색하게 한다.




미의 이상


"비슷한 방식으로 이 평균적인 남자를 위해 평균적인 머리를 찾고, 이 평균적인 머리를 위해 평균적인 코를 찾는 식으로 계속한다면 아름다운 남자에 맞는 이 형상이 주어지게 된다." 《판단력 비판, 임마뉴엘 칸트 Kritik Der Urteilskraft, Immanuel Kant》


관조적인 미적 직관은 미적 거리를 통해 아름다운 주변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용한다. 자극과 흥분의 홍수 속에서 미적인 대상은 관조적 거리를 상실하고 소비에 맡겨진다.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륜적 이념들의 가시적인 표현인 칸트적인 '미의 이상'과 달리, 어떤 종의 표준으로 말해지는 '미의 정상관념'은 하나의 종이 자신을 재생산할 때 기준으로 삼는 원형이다. 미의 이상은 대상에 대한 만족에 젖어들고 싶게 만드는 감각적 자극을 전혀 허용하지 않음에도 아주 큰 관심을 제공하며 취미가 이성과 일치하는 지성화된 취미판단이다. 이는 인륜적 이념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구상력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며 미의 도덕이자 혹은 도덕적인 미이다. 역사적으로 도덕과 개성을 표현할 때만 중요성을 인정받은 미는 개성보단 섹스어필의 시대에서 성적인 매력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의 추가적 가치는 모조리 제거되고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게 되었다.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의 뜻인 그리스어 디아라세인(Diarassein)에서 유래된 개성은 견고하면서 지속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디아라세인"과 개성의 연결은 개성이 개인의 특성이나 자아를 '새기고' '심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성을 개인의 독특한 특성과 표현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특정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개인의 특성과 연결이 퍼져나가는 방식은 개성과 개인의 독특함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무차별적인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이상적인 소비자 속에서 단 한 명의 유일한 친구를 가진 것도 인간이 견고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며. 뱀장어처럼 미끄럽고 형상이 없을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가지는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인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 시대의 개성과 친구 관계는 상극적인 형태를 지닌다. 개성이 강하면 공감도도 떨어지고, 접근성도 멀어진다. 초창기 탐색의 시기에 상대를 인식할 사이도 없이 맞팔의 기회를 포기하거나 상실하면 알고리즘 또한 존재의 모습을 구형으로 인식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과거로 인식된 존재는 유물로 처리된 데이터에서 탈속하기 어려워진다. 견고한 개성은 연결능력이나 소통능력이 없기 때문에 네트워크화되기 어려우며 소통의 시대에 견고한 개성은 장애이자 단점일 뿐이다. 디지털 질서는 개성 없는 인간, 개성 없는 매끄러움의 새로운 이상을 예찬한다.




진리로서의 미


"전체는 부분들을 자유 속에서 묶어 자기 안에 지니는 하나이다. 전체성은 매개와 화해의 형상이며, 조화로운 통일이자 모든 부분들의 고요한 균형이다."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기초 개념들과 정신의 현상학, 게오르크 빌헬름 프레드리히 헤겔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헤겔의 사유로부터 주체성의 코르셋을 벗기면 핵심적인 미를 이상화하고 미에 진리의 광휘를 부여하는 "개념"이 드러난다. 미는 감각적인 것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념이며 "개념과 그 현 실태의 직접적인 통일로서의 이념"이다. 개념은 살아있는 현실을 관통하여 불잡음으로써 현실의 부분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적인 전체성으로 통일시킨다. 개념을 통해 형성된 전체성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파악한다. 움켜쥔 개념들은 모든 것이 총괄되어 "흩어져 있는 수천의 개별성들을 소환하여 하나의 표현으로 하나의 형상으로 집중"시킨다. 이는 무더기로 해산되거나 흩어지는 것을 막는다. 헤겔의 전체성은 부분들에게 운동과 행동의 공간을 열어주고 자유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화해의 운동장으로 보인다. 서로 모순되는 규정들의 일면성을 스스로 해소하게 하며, 이 규정들을 조화와 통일 속에 놓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이며, 진리는 화해이자 자유다. 조화로운 전체성을 산출하는 개념은 개념에 의해 정립된 필연성과 특수한 측면들이 통일성과 자기 자신을 위해 생겨난 부분들로서 지니는 자유의 외관의 두 가지 측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대상은 주체 또한 대상과의 자유로운 관계를 획득하게 되는 상대가 된다. 미적인 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이에서 중간과 매개의 위치를 갖는다.


"자신의 대상이 그 자체를 위해 자유롭게 존재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예술적 관심은 욕망의 실천적 관심과 다르다. 예술적 관찰은 대상의 개별적인 실존에 관심을 가지며 대상을 보편적 생각이나 개념으로 변환시키려고 활동하지 않는다." 《미학강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Vorlesungen über die aesthetik,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예술을 자유와 화해의 실천으로 보는 한병철은 미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관심 없이 머무르기를 가르쳐주며 대상을 유한한 욕구와 의도에 유용한 것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보는 헤겔의 미학을 반영한다.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 자유로움 속에서 주체는 관조적으로 객체 속으로 침잠하며 객체와 합일하고 화해한다. 미에 대한 헤겔의 미학은 진리와 자유의 미학이다. 미를 일체의 소비로부터 분리시키며 자기 목적이며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위한 것이기에 미는 자신 안에 머무르게 된다. 예술은 소비와 투기에 존속시키는 자본주의와 합의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 없는 병존을 낳는 바로크식 연결은 아닌 것이며, 진리는 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형식이자 비범한 것이며, 이론을 산출하면서 차단한다. 미는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해 준다. 모든 것을 더하는 수평성의 데이터는 수직적인 내러티브와 대립하며 진리의 종말, 이론의 종말, 내러티브의 종말, 정신의 종말로 이끈다. 통치의 테러를 반영하는 미는 보톡스와 신경성 과식증, 성형수술처럼 자극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한편, 헤겔이 판매할 수 없다고 말한 예술조차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예술의 자유 또한 자본의 자유에 자신을 복속시킨다.




미의 정치


역시 칸트와 헤겔로 이번 한병철의 미학강의는 절정을 이룰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식의 자유로운 남자, 삶의 욕구와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돈벌이에 집중하는 상인의 삶은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향유하는데 집중하는 삶, 폴리스에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하는 삶,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연구하면서 영구적인 미의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철학자의 관조적인 삶과 같은 세 가지 삶의 방식은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도록 하는 행위로 구성된 정치가의 삶(Bios Politikos), 필요성과 유용성에 지배되지 않는 사물과 활동들, 미적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의 윤리학은 바로 미의 윤리학이며, 플라톤의 정의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이지만, 오늘날의 정치는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족쇄가 채워진 채 작업한다. 정치는 대안을, 진정한 선택을 제공해야 한다. 독재로 추락한 정치에서 시스템의 하수인이 된 정치가는 자유인이 아닌, 노예이다.


갈라테이아에 대한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변형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에서 보이듯이 페어(Fair)는 '정의롭다'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상하며, 정의는 곧 아름다움으로 지각된다.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미와 정의로움에 대하여 On Beauty and Being Just》에서 "미의 지각 혹은 현존은 윤리적 공정함(Fairness)으로의 초대"를 내포하기 때문에 정의로움의 상태는 대칭적인 관계를 포함하며 불의는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표현했다. 스캐리는 주체를 탈나르시시즘 화하고 탈내면화하는 미의 경험에 대해 지적한다. 미 앞에서 주체는 측면(lateral)에 위치하고, 주체는 측면의 형상(lateral figure)이 되어 타자를 위해 자신을 후퇴시킨다. 정의는 공존의 아름다운 상태이며 미적 공정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스스로 측면에 자리하여(lateralness) 기쁨의 상태를 느끼게 한다. 오늘날 미의 경험은 나르시시즘의 중심성에 지배되고 있으며 이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파괴하고 비동일성을 파괴하여 소비의 내재성에 자신을 맡긴 채 초월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가치를 잃어버린다.




포르노그래피 연극


현대의 극장과 무대는 한마디로 끝났다. 장면의 거리(szenische Distanzen)는 사라졌고 에로틱한 작가는 포르노그래피 작가로 대체되었다. 지체, 지연, 우회, 암시적이면서 격정적이지 않은 에로틱은 사물을 곧장 가리키는 즉시적 시간양태를 지닌 포르노그래피와 구별된다. 대화능력과 타자를 향한 능력, 경청하는 능력이 모든 차원에서 사라진 현대에선 고백이나 누설도 전혀 에로틱하지 않으며 감정(Gefühl)의 내러티브를 제거한다. 무조건적인 다량의 격정으로 개별화되고 독백만 하는 주체의 표현인 감흥과 격정을 내포한 친밀사회로 다가가고 있다. 자신의 심리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객관적인 유희형태와 유희공간은 연극적인 의례로 영혼의 나체주의와 정신병적 상태를 배척하며, 탈심리화, 탈주체화, 탈내면화되어 무명의 인물(nemo)이 된다. 무명주의적인 자기 초월성은 타자를 위한 환상을 초대하고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다가가고 스스로 타자에게 유혹받으며 영혼의 짐을 덜어준다.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시간이 흐르도록 하는 것은 의지, 관심, 그리고 코나투스(Conatus 노력)이다."


관조적으로 머무르는 미에 직면할 때 소망과 걱정의 의지를 벗어나 자아는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침잠함을 통해 시간은 고요해지고 정지된다. 의지와 관심의 부재가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정지하게 하는 것이다. 시간을 극복하는 머무르기에서 "현재의 영원함"은 타자를 향한다. 사물을 영원성의 측면에서 파악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고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것이며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예술은 타자를 현전성(現前性 Vorhandenheit)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하고 시간의 힘을 제거한다. 예술 작품들은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이 사라지는 한 문화의 황홀한 순간들이 물질화된 증언이며 축제의 예술이다. 동시에 일상적인 시간이 효력을 상실하는 드높은 시간(Hochzeit)의 고양된 시간(Hoch-zeit)의 기념비들이며 평범의 노동시간이었을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킨다. 오늘날 전면화된 노동시간에 밀려 휴식시간도 노동시간이 되었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걷는 자가 향하는 목표의 표상을 확실하게 제거한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어디에 도착하기 위해 우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축제를 걸음으로써 축제는 언제나 줄곧 거기에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을 걷는다(begeht)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도 서로 교체되는 순간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축제의 시간성이다. 예술이 제공하는 시간 경험의 본질은 우리가 머무르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데 있으며, 이것이 영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모습일 것이다." 《미의 현재성,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Die Aktualität Des Schönen, Hans Georg Gadamer》


어떤 것을 향해 걸어갈 때 시간은 흘러가고,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한다. 오늘날의 예술작품은 축제의 거리에 세워지는 대신 미술관에 전시된다. 전시는 축제가 아니라 구경거리다. 오늘날 시장의 거리, 거래소의 거리에서 거래되는 예술작품은 투기가치가 예술을 자본에 복속시키고 있다. 거래소는 경배의 장소이자 구원은 절대적 수익금에 의해 대체된다.




회상으로서의 미


기억을 인간실존의 정수로 삼는 발터 벤야민처럼 내면화된 현존의 모든 힘은 기억으로부터 생겨나며, 기억은 또한 미의 정수이다. 아름다운 형상에 직면하여 우리는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기억으로서의 미의 경험은 과거와 현재의 융합을 이뤄내며 현재는 기억에 의해 접촉되고 활성화되며 수태된다. 미의 본질적인 것은 사물들과 표상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통신이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며 이야기한다. 사물들의 인터넷에는 내러티브가 없으며 정보교환으로서의 소통은 아무것도 이야기함 없이 더하기와 같은 계산을 반복한다.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하는 시화(詩化)는 작가들의 과제이다.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 내고 직접적인 향유를 거부하며 은유를 통해 다른 사물들의 조명을 받아 회상으로 나타나 인광을 발하는 역사적인 퇴적물들로 구성된다.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품위를 지니는 미 속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 미는 재회로서, 재인식으로서 일어나며, 우리를 갑자기 열광시키지 않고 맹렬하게 도취시키는 공격을 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들면서 언젠가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가장 고상한 종류의 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Friedrich Nietzsche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적극적이고 산출적인 태도를 취하는 플라톤의 미 이론의 특징은 미에 직면하여 영혼은 스스로 미를 산출하도록 자극받는다. 에로스는 미를 볼 때 영혼 속에서 산출력을 일깨우기에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Tokos en Kalo)"라고 불린다. 에로스가 낳은 불멸의 자식들은 바로 작품(Erga)인데, 문학적, 철학적, 정치적 작품들이 속한다. 호메로스(Homeros)나 헤시오도스(Hesiodos)와 같은 시인과 솔론(Solon)이나 리쿠르고스(Lycourgos)와 같은 통치자들의 작품들도 에로스이며, 정치가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는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하며, 에로스와 대립하는 노동은 축성(祝聖)과 마술을 빼앗는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시적 이름"인 미는 의미와 이해의 지평이며, 이 지평 아래서만 존재자에 대한 이해의 태도가 가능해진다. 존재의 진리로서의 진리는 존재자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사건이며 생기(生起)이다. 진리의 생기는 다른 있음을 생성하고 작품은 진리의 생기를 수용하고 체현하는 장소가 된다. 에로스는 미에, 진리의 현상에 애정을 갖고 있기에, 진리의 생기로서의 미는 생산적이고 산출적이며 창작적이다. 현대의 미는 단순한 존재자이며 현존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는 구속력이 있고 기준을 부여하며 지속성을 만들어낸다.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이자 나아가는 힘이다.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하며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하고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한다. 충실함의 형이상학과 초월성이 존재할 때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






종결을 향한 자기 구원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Self-Redemption towards conclusion
My Philosophical Overview


아름다운 구속인걸

사랑은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

살아있는 오늘이 아름다워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사랑에 난 빠져버렸어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김종서 [아름다운 구속]


아름다움은 자유로움도 필요하지만, 사랑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구속이 필요하고 그 자립적인 구속은 에로스에게 지속적인 충실함을 요구한다. 김종서의 노래 [아름다운 구속]에서처럼 타자에 의해 보인 사랑의 발견은 아름다움으로 변환된다.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은 사유에 대한 회복이자 지적인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사랑으로 해석된다. 이 또한 지적인 고찰과 사유에 대한 헌신으로 아름다움에 귀의한 자에게는 아름다운 구원이자 구속일 것이다. 시간조차 상실시키는 아름다움은 사랑을 지배하고 사랑은 아름다움에 복속되고자 한다. 이런 호환적인 관계는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할 것이며, 사랑을 더 사랑스럽게 만들 것이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호 구속과 구원적인 속성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와 그의 아들 에로스(Eros)에서 보듯이 하나로 묶여 있는 혈연적인 관계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로마 신화에선 비너스(Venus)로 불리며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와 함께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이라는 기원이 있다. 아름다움은 사랑과 성욕, 결혼처럼 영웅의 신화와 생성과 죽음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에로스는 사랑이며 성애의 신이다. 그는 혼돈의 신 카오스의 아들이거나,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활과 화살을 들고 무감한 사람들의 심장을 쏘는 장난꾸러기 아이와 같은 청년이며, 로마신화에선 큐피드(Cupid)로 불린다. 에로스와 프시케(Psyche)의 사랑은 아름다움과 사랑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가 질투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인간 프시케는 아프로디테가 아들 에로스에게 프시케가 괴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도록 사주했지만, 에로스는 프시케를 본 순간 자신의 화살촉에 부주의하게 상처를 입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는 비밀스럽게 매일밤 프시케에게 자신을 보지 말라는 조건으로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밤의 적나라한 공기가 둘을 짙게 매료시킬수록 프시케 또한 에로스의 정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깊은 밤, 에로스가 잠든 사이 촛불을 켜고 에로스를 보게 된 프시케, 어둠의 괴물이 아닌 아름다운 에로스의 모습을 보고 기쁨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배신의 뜨거운 촛농에 화상을 입은 에로스는 약속을 어긴 그녀를 떠난다. 프시케는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했던 잃어버린 에로스를 찾기 위해 시어머니 아프로디테가 내리는 힘겨운 고난의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결국, 진심 어린 용기와 불굴의 지혜로 사랑에 대한 시련을 극복한 프시케는 신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신들의 신 제우스가 그녀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면서 에로스와 영원히 함께 한다. 신화적으로도 아름다움과 만나는 사랑은 처음의 환희와 기쁨만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 질투와 시련, 아픔과 배신,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다. 그러나 사랑을 향한 아름다움의 변치 않는 믿음과 불굴의 힘은 서로를 보완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 번역한 불교경전이다. 총 24권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7권 7책만이 남았다. 갑인자와 한글 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사후, 1447년(세종 29)에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편찬하였다. 석보상절에서 말하기를 '아름답다'의 '아름'은 '나'를 뜻하는 말이다. 즉, '아름답다'는 '나답다'라는 뜻이고, '내가 나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라고 표현한다. 범위를 넓히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아름답다'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멀리 도약하기 위해선 기본기가 탄탄해야 한다. 빠르고 정확한 디지털 시대에 이토록 느리고 감미로운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디자이너나 예술가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과연 나다움이란 무엇이며, 내가 주체적으로 사랑하고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주어졌으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 것인가. 빛보다 빠르게 다가간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론이 부재하고 감성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진정한 언어들은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생활이든 아름다움의 기본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는 것이다. 각자 개성 있게 연주하는 다양한 소리는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이해가능하며 비동일성을 넘어 진리의 하나 된 이야기를 발표한다. 유려한 몸짓과 부드러운 선율만이 아니라 거칠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도 애잔하게 아름답다. 인생은 현재 보기 좋게 다듬어지고 행복하게만 보이는 모습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궁창에서 휩쓸리고 살아가면서 총칼에 꿰뚫어진 방황이 온몸에 박혀있는 과거 또한 하나의 자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랑을 구원하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구속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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