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 LOACH, CARLA's SONG

<칼라송> 민족, 독립, 혁명, 생활, 음악, 춤. 내 소시민적 자유

by CHRIS

[CARLA's SONG, KEN LOACH, 1996] MOVIE POSTER


라디오 DJ의 음성이 주는 안식은 아날로그의 친숙함과 비등하다. 차분함이 묻은 세상 소식을 들으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광복절이 지난 지 이틀이나 되었건만 독립을 반긴 깃발이 도로 주변의 아파트 창문 밖으로 너풀너풀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백 명이 사는 저 밋밋한 닭장, 단 한 곳에서만 걷히지 않았던 태극기.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시야를 어지럽히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몸통은 베란다 쇠깃봉에 일자로 매달렸지만 널따랗게 짠 흰 가슴팍은 태극의 상모를 힘차게 돌렸다. 자유의 신호로 불리기엔 기념일을 위한 기념품이 되었지만 축가를 이탈한 국기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저런 모습이 좋다. 멋대로 나풀거릴 수 있는 움직임과 바람의 장단에 춤출 수 있는 한 가지 행동. 억압을 당해봐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는 말은 비정하게 들린다. 사실임에도! 자유가 마냥 기쁘지만 않고 그리운 단어를 들을수록 벅찬 감정의 물결에 눈물을 일렁이게 된다. 나는 아직까지 해방되지 않았다. 자유로워지면 물 밑의 진동처럼 전해오는 서러운 시절을 잊지 않을 테야. 이 기억들과 열망까지도.


마음이 여유로우면 사랑의 노래가, 몸이 배고프면 나눔이 필요하다던 켄 로치의 대답은 위안이 된다. <빵과 장미 Bread And Roses>, 당장의 생존과 내 안의 생존. 켄 로치(Ken Loach)는 노동자, 하층민, 빈부 간의 격차, 인간 본연의 물음인 생명과 죽음, 정치 경제적인 직간접적 갈등,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 폭력과 비폭력, 대중과 소수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곤 한다. 일상의 겹겹이 쌓인 문제들로 고생하는 평범한 대중들에게 타인의 위급하고 최우선적인 문제를 바라보게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묘한 능력을 보여준다. 내가 타인과 같은 삶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화합의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양상이 다른 고통을 응시하며 내 삶에 객관적인 시선을 도입하는 냉철한 어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다중적으로 드러난 <칼라송 Carla’s Song>은 도약적인 연결과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건의 연속으로 짜인 삶에서 남녀의 우연한 만남이 부른 황당한 결과와 평범한 소시민의 자잘한 고민들이 사랑이라는 긴급한 물살을 타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어떻게 중립적이고 의식적인 목소리로 변하는지 그 과정을 말한다. 한 인간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이해함에 있어 모든 신상을 낱낱이 흡수하고 행적을 알아가는 시도는 관계의 공간에 얼마만큼 깊이를 더해줄까? 그리고 그 행위는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까? 순조롭고 이상적인 이야기는 퇴로를 막아버리고 무관심을 부른다. 버스에 당신의 주소가 쓰여 있지 않은 한국에서 흔하게 만나는 사람들도 내 입을 닫게 만든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 것. 낯이 선 관심이라면 철저히 밀어낸다. 당신과 못 만난다고 해서 오금이 저리고 머리통이 잘게 울리고 발걸음이 안달 날 것 같고 속이 터지고 미치도록 돌아버릴 것 같지 않기에. 그런데 왜 이렇게 건조한 거지?


버스를 타고 거리로 나선다. 차창 밖의 풍경이 매력적으로 흔들린다. 이런 현상은 홀로 있었던 시간이 길었을 경우다. 난 한 여자를 본다. 하얀 치맛단을 돌리며 밤거리를 휘젓는 춤추는 이방인. 매끄러운 검은 이마에는 혁명의 붉은 띠가 수 놓여있고, 춤이 끝나면 구걸하는 모자를 구경꾼의 얼굴에 내민다. 또라이 기사와 미치광이 춤꾼, 그들의 충동적인 여행. 음산하고 적막한 겨울풍경을 스치는 적색 버스. 잃어버린 조국의 자유와 헤어진 연인을 뒤로하고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악몽.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 파나를 입은 친구 집에 당도한다.


"환영해, 칼라! BIENVENIDA CARLA!"


다정한 사람의 품 속은 슬픈 사연을 잠재운다. 노래가 담긴 편지에 대해 세심하게 물으며 자살의 피로 적신 음악을 말려준다.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남자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호기심이 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개발을 목적으로 조국을 침략한 살인마들과 짐승들을 형제들의 피로써 막아낸 난동의 시절, 1987년 니카라과 내전이 함축한 대립의 실상은 불에 덴 아이가 불만 보면 자지러지는 것처럼 잘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맞서고 현실과 해우하는 작업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힘들다. 죽음이 일상으로 뒤덮인 자리를 벗어나 삶의 개간과 생존에 헌신하는 나는 그 얼마나 정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가난한 우리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타인의 영역에선 부유하다. 하지만 역시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민주주의의 미명 하에 아이들이 강간당하고 척추가 부서지고 학교와 보건소가 공격되는 척박하고 구역질 나는 작전에 직접 조종당해 온 것은 아니지만, 시대 속의 <나>는 가난한 일상을 떠나길 열망해 왔다. 이상적 사랑을 실천하려고 현실의 도피처가 전쟁터인지도 모른 채 방문하고, 비통한 노래가 넘나드는 곳에서 인간들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다시 가난하지만 부쩍 달라진 모습을 통해서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길의 여정을 밟게 되는 그를 본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당신의 냄새가 풍기는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인생은 현재와 다른 모습일까?


버스운전사가 보는 전쟁의 흔적은 일상에서 연인의 고향과 그 사랑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우회적이지만 날카롭고 의미심장하다. 인간 대립은 극단에 놓여있는 이상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 없다. 뜬금없는 면모가 강하며, 생존의 진실은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놓여있다. 잔인해지면 동물보다 한없이 포악해질 수 있는 인간성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이기적인 통치를 합리적으로 포장하려고 가난한 자에게 끊임없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잘못을 알면서도 비극적인 참상을 묵인하는 무관심한 태도를 반성하게 만들던 켄 로치의 연출은 내 인생에도 객관의 송풍이 불어야 함을 말해주었다. 러브스토리와 정치적인 소재의 결합은 피상적인 승리와 패배라는 지루한 구도를 답습하지 않는다. 전쟁공작소라고 불리는 CIA의 음모에 대한 접근이 마지막에 언급되면서 강한 비판을 묻었던 점은 아쉬움이 남지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에 대하여 묻는 그 온화함이 여자의 손으로 남자의 손으로 친구의 손으로 전해져 왔다. 국경을 넘는 따뜻한 이해는 자신의 영역을 번성시키기 위해서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 물질만능주의의 비정함을 채찍질하고 소외된 이에게 기꺼이 방을 내주는 공영의 정신을 키워내며, 또한 교묘하게 타인을 속이고 착취해 온 거짓까지도 응시할 수 있는 개화의 눈을 밝게 빛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과 미완의 사랑 속에서.


2005. 8. 18. THURSDAY




아주 오랫동안 자정을 넘기면서 일전에 보았던 것들, 기억에 남았던 것들, 슬펐던 것들, 아팠던 것들, 괴로운 것들, 소중했던 것들, 잃어버린 것들, 찾아야 할 것들을 되새겼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의 불면은 한국 나이 여섯 살부터였던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이미지가 가득 돌아다니고 잠이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뇌의식이 크게 강타한 이후로는 발랄하고 장난기가 넘치던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다. 중학교 때부터 굉장한 불면이었다. 사람이 성장하고 어느 정도 자기만의 의식이 생길 때 개성적인 목소리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깊이와 폭에 심도가 생기면서 울림이 생긴다. 어렸을 때는 목소리의 주권이 없었다. 마냥 어렸고, 사회에서 규정된 미성숙한 몸은 보호자를 필요로 하였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기존에 형성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수긍하지 못했다. 그리고 육체적인 나이가 성인이라고 제도적으로 규정될 무렵, 불운의 징조들이 짙어지면서 예상치 못한 사건들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직도 무엇을 정확히 잃어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지난 수십 년간 엉망진창으로 삐걱거리는 와중에 겉보기로는 많은 것을 수리하였고, 삶을 절제하였고, 나의 이름으로 이 생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미흡하게 느껴지는 석연치 않은 기분에 사로잡힐 때면 뭉텅이로 내부에 응축된 결정들이 외부로의 발산되거나 표현이 안되어서인가 싶다. 가족(Family)에 관한 오늘의 경전을 읽다가 잠시, 그러다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한 가정이 많은 재산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 네 가지 이유 중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에서 비롯된다.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는다.

낡은 것을 수리하지 않는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않는다.

계행이 없는 남자나 여자를 가장으로 삼는다.

AN 4.255: Kula Sutta - On Families [A ii 249] [Thanissaro]



오늘은 광복절이다. 세계에 놓인 한 나라의 입장에서, 한 나라의 국민의 입장에서, 한 나라의 한 사회의 시민의 입장에서, 한 나라의 한 사회의 한 가정의 일원의 입장에서 광복이 된 지 79주년인 오늘, 경전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구한말 나라를 빼앗겼던 이유와 철저한 속박에서 망가진 이유와 그리고 피를 부르는 격렬한 저항과 일말의 회복의 시기를 거쳐 자유를 얻었으나 다시 망각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게 된다. 국지적인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 나아간 세계의 역사와, 그보다 더 나아간 지구의 역사와, 여기서 그보다 더 나아간 우주의 역사에서 이런 고민이 중요한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머리를 매달고 심장을 거느리고 육체로 싸인 유한한 시간에 놓인 한 인간으로서 내 위치를 자각하는 것만이 내 안에 몰입된 의식을 분출하여 광활한 세계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한 개인이 자기만의 철학적인 가치관을 정립하고 균형적인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개별적인 구성원에서 넘어가 한 집단의 지도자가 된다면, 생을 고찰하는 자질은 타인에게 시간을 나눠줄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지구와 우주의 모습은 거울의 확장효과처럼 모두 같은 모습의 연장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불균형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에 대해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봐야 한다.


존재는 항상 같은 길에 놓여있지 않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변하며 공간 속에서 다른 성질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하나씩 소실되게 된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세계의 분할된 지도가 그리는 공간적인 개념상 광복을 얻었으나 각자의 이기적인 생각이 충만한 이념의 갈등과 각기 평화로운 방심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변치 않도록 꾸준하게 분단된 모습은 탐욕스러운 정치적 태도와 분열된 미디어 선전과 어긋난 말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는 지도자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일상의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좋아한다. 하나의 커다란 격동 뒤 움직임의 반경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마찰의 법칙(the Law of Friction), 관성의 법칙(Newton's First Law of Motion), 에너지 보존의 법칙(The Law of Conservation of Energy), 공기 저항의 법칙(The Law of Air Resistance)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의 요소들은 정신을 담는 육체적인 모습에도 변화를 가지고 온다. 순발력 있던 세포들은 점차 노화되고 움직임이 줄어들어 키를 줄어들게 만들고 수명을 줄어들게 만들고 뇌를 줄어들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는 상태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동일선상에 놓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오늘을 가벼이 보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삶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다. 아주 작은 나의 가정과 개인의 단위로 좁혀 들어가도 어리석게도 똑같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는 모든 것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몸까지 독립된 것 같으나 어느 순간의 기억이 크게 소실되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아직도 고민하고 방황한다.


낡은 것을 수리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관성에 젖은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나태한 인식과 방만한 태도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효율을 추구하는 시스템화된 세계는 쉽게 바뀌기 어렵다. 시스템을 짜도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변화를 선언하면 참여자들은 눈을 찌푸린다.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귀찮은 일로 인식하고 남탓 하기 바쁘다. 주인의식이 없는 피고용자들은 돈만 받으면 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한 개인의 습관은 한번 형성되면 바뀌기 어렵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들이 모인 세계에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립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찾아 밑바닥부터 바꿀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하루를 쉴 수 있고 타인과 대화할 수 있는 편한 순간이 다가오면 그 안락함에 몸을 누이고 싶어 하는 말랑한 감성에 젖어든다. 그것만이 잠시의 평화로운 휴식이었다. 이제 다시 일어나서 인생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나의 소시민적인 자유는 독립선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빵과 장미 사이의 계속되는 생의 투쟁, 생존적 갈등과 아름다움의 추구 사이의 놓인 나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될 보석 같은 선물일 것이기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DIE ERRETTUNG DES SCHÖ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