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s VOICE

사마천(司馬遷) 《史记》 | 목표, 목소리, 방향 : 삶의 이유와 의미

by CHRIS
[WHAT WILL YOU CAPTURE IN YOUR LIFE?] PHOTOGRAPHY by CHRIS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죽음이란 태산처럼 무겁고

혹은 기러기 털처럼 가볍습니다.

이는 그 쓰임새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死有重於泰山(사유중어태산)

或輕於鴻毛(혹경어홍모)

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야)


《보임안서 報任安書》 사마천(司馬遷)이 임안(任安)의 편지에 보낸 서신 중에서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의 《사기 史记》 를 처음 접했을 땐 사기의 내용보다는 사마천의 삶에 관심이 갔다. 한 사람의 삶을 유심히 바라보면 왜 그렇게 기술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면 글을 다시 봐야 한다. 글 속에서 문맥을 짚어가며 찬찬히 해석을 해야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세계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마천이 궁형(宮刑)을 당하고 사기를 기술했을 때 하루 만에 역사서의 틀을 완성해서 보이느라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뒤의 기술이라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식기까지 단절된 고초를 겪었던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사기를 집필한다면 진실된 삶을 써 내려가서 후대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한다.


사마천은 사건을 연대기적(Chronicle-style)으로 서술하던 기계적인 방식을 벗어나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천 오백 년 앞서 인간본위로 돌아간 새로운 서술방식 즉, 인물 위주의 인간적인 삶을 서술하는 기전체 (紀傳體, Character - focused Narration)를 창시한다. 그는 다양한 등장인물들 속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생활의 희비극과 인간의 생로병사를 담아냈다. 영웅이나 황제뿐만 아니라 군인, 점술가, 의사, 상인, 모사가 등 일반적인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행적, 하루의 감정까지 투영할 수 있는 그의 상상력은 영웅만을 중시했던 거시사(Macro-History)에서 일상으로 세분화된 미시사(Micro-History)로의 전개를 보여준다. 풍부한 상상력과 거침없는 서사능력을 관찰하고 있으면 한마디로 이천 년 전의 문학 천재의 현현을 볼 수 있다. 편협된 주관을 내세우기보단 인물이 처한 상황을 중성적인 음성으로 노련한 가치관을 통해 펼쳐낸 그를 보면서 자료수집과 기술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방대한 학식과 집중력이 랍다.


사마천은 감옥에 갇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그 자신을 돌아보자고 되새겼을 것이다. 나 또한 지금까지 늘어진 방만한 경험을 엮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면 가벼운 연습을 거친 뒤 스스로를 표상할 수 있는 형태와 색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해야겠다. 현재는 상업적으로 돈을 버는 일도 소중하다. 함께 하는 모두를 지탱하고 있는 이 수단이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자립적으로 일을 하면서 생산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현재의 세계가 추구하는 그리고 인생을 얽어매었던 돈만을 바라본다면 그 안에 돈냄새만 날리고 두 팔 벌려 나를 감싸안는 충만한 내면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인간은 각자 삶의 제작자이기도 하지만 감독이며 디자이너이자 작가이다. 인간의 삶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다르지 않다. 우리 몸의 구성은 인식의 뇌를 감싸 안은 머리 하나에 눈, 코, 입, 귀가 달린 얼굴과 심장과 각종 장기가 들어간 몸통, 팔다리 두 개씩과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는 손발이 있다. 모양과 길이, 성능의 차이는 있지만, 혹은 가끔 변이도 생기긴 하지만, 혹은 생활 속에서 하나씩 고장 나고 사라지긴 하지만, 그것을 굴리는 본체는 이 육신을 이끌고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삶의 우물 속에 갇혀있을 때 고민한 것은 '왜 사는지'였다. 살아가는 순간의 온-오프 스위치를 끌지 말지가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선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도 고민한 것은 현실에서 주어진 명제는 과연 옳은 것인가였다.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天道是也非也 (천도시야비야)


사마천이 군주의 가치관에 의해 삶이 부정당하고 고통을 당했을 때 자신에게 물었던 의미이다. 유교든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회교든 힌두교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감정적이든 이성적이든 여자든 남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존재가 그 무엇이든 간에, 무엇을 믿던지 간에, 어떤 사회에 살고 있든지 간에, 시대에 놓인 삶의 주제와 명제가 자신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본인의 정신과 육체에 어떤 고통을 주는지 점검해야 한다. 한 곳에 갇히면서 생각의 틀을 뒤집어야 했다. 삶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철학적인 주제에서 허우적거리고, 정의와 도덕에 대해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수십 년간 외부로 말을 하지 않았고 생에 끌려다니면서 분열한 성격만 표현했을 뿐 마음은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묵직한 침묵에 사로잡혀 설명하는 것이 의미롭지 않다고 여겼다.


주변에 거느린 게 많아서 하나의 길로 다듬고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호함을 떨치면 정립된 세계관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성(城)을 건축하기에 앞서 여물지 않은 사상을 다듬어본다. 단단하게 사마천과 같이 고대의 상상력과 굳건한 의지를 발휘하여 J.R.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과는 다른 동서양을 벗어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봐도 좋겠다. 설계하는 제작의 방향은 내부로의 회귀와 세계로의 발산이다. 이전만큼 선명하지 않지만 고통 때문에 묻어둔 기억을 찾아야겠다. 기름칠도 하고 생각훈련부터 시작해서 기억재활도 다시 하고 시운전도 해봐야겠다.


지금까지 삶의 계획은 즉흥적으로 진행했고, 생각은 회오리처럼 맴돌았다. 하루종일 생각이 움직이고 떠드는 이 머릿속을 열어서 황량한 모습에서 벗어나 그리던 세계를 건축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전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의 본질은 다른 바가 없다. 어렸을 땐 사마천이 사기를 하루 만에 쓴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건 아니지만 한 인간의 역사는 다른 이와 통합되면 세계의 역사이다.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온 정성을 다하겠다.

鞠躬盡瘁 死而後已(국궁진췌 사이후이), 諸葛亮(제갈량)


고대 사상의 중심에선, 그리고 권력과 경영의 세계에선, 인생의 성공적인 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한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제갈량이 제시한 궁극적인 삶의 자세는 삶을 부지런히 사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만민을 생각하는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노력하지 않고서도, 정성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의무감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숨 쉬며 살아가듯이 앞을 향해 시나브로 가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문제해결을 위해 정성과 노력을 다해보겠다는 말을 들으며 위안이 되기보다는 그의 도움을 받으면 빚을 돌려줘야 하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하지 않고 편안하게 숨을 쉬어 본다.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빼는 것은 연습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고 앞으로 간다. 창작의 아이들을 풀어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보임안서 報任安書》 임안에게 보내는 답장


《보임안서 報任安書》는 사마천(司馬遷)이 한무제(漢武帝)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 사이에 벌어진 내전(內戰)에 연루되어 얻은 죄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이다. 사마천 자신이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부친의 유명을 받아 저술하고 있던 사기(史记)의 완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죽기 전의 임안에게 알려, 생명을 부지하고자 권력자에 빌붙거나 삶의 사명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는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쓴 편지로, 그의 처연하고 결연한 문장을 바라보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죽음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한 인간의 고귀한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감동스러운 그 이야기의 일부를 되새기며 마땅히 해야 할 삶의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죽음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온갖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함정에 빠지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니 이는 위세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땅 위에 금을 긋고 감옥이라 해도 선비는 들어갈 수 없고,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형리라고 해도 대면하면 대꾸를 할 수 없을 것인데, 이것(궁형을 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은 계획한 바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여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만, 거취의 분별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습니다. 어찌 몸이 묶여 감옥 안에 갇힌 채 치욕 속으로 스스로 빠지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저와 같은 부득이한 사람의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고통을 감내하고 더러운 치욕 속에서 구차하게 살면서도 더러운 감옥에 갇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지 못한 채 비루(鄙陋)하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까 한스럽게 여겨서입니다.


예전에 부귀하면서도 이름이 사라진 인물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지만 오로지 기개가 높고 비상한 사람들만이 칭송을 받았습니다. 주문왕(周文王)은 구금된 뒤에 《주역 周易》을 연역(演繹)했고, 공자(孔子)는 곤경에 빠졌을 때 《춘추 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이소 離騷》를 지었으며, 좌구명은 눈이 먼 후에 《국어 國語》를 편찬했으며, 손빈(孫臏)은 다리가 잘린 뒤에 《병법 兵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촉으로 쫓겨난 뒤에 《여람 呂覽》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한비자(韓非子)는 진(秦) 나라에 잡히고서 《세난 說難》, 《고분 孤憤》을, 《시경 詩經》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의 발분(發憤)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가슴에 맺힌 바가 있었으나 그 뜻을 통하게 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좌구명과 같이 눈이 멀고, 손빈과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쓰이지 않자 물러나 책으로써 꾀하는 바를 논하여 울분을 펴면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불손하게도 감히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기탁하려고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망라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성공과 실패, 흥함과 망함의 이치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헌원(軒轅)에서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표 表》 10편, 《본기 本紀》 12편, 《서 書》 8장, 세가 世家》 30편, 《열전 列傳》 70편, 모두 130편을 지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초고가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런 화란을 당했는데, 애석하게도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비록 극형을 당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심을 다해 이 책을 저술하여 여러 명산(名山)에 보관했다가 내 뜻을 이해할 사람들에게 전해 고을과 큰 도회지에 알려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이전에 치욕을 참은 점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몇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게 말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자는 처신하기가 쉽지 않으니 하류의 사람들은 비방의 말을 많이 할 겁니다. 제가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하고도 말을 삼가지 못하여 거듭 마을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어 선조를 욕되게 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산소 앞을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세(百世)의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로움만 심해질 뿐입니다.


이로 인해 하루에도 수없이 애간장이 타고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하며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려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몸이 내전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깊은 바위굴 속에 숨어 은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세속의 부침에 따르고 시대와 더불어 행동함으로써 저 미치고 어리석은 자들과 교제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 저에게 현인을 추천해 달라는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는 저의 개인적인 속뜻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제가 스스로를 가다듬어 미사여구로 제 자신을 꾸미려고 해도 아무런 유익함이 없고 사람들도 믿지 않을 것이니 치욕이나 얻기에 알맞을 뿐일 것입니다.


요컨대 죽을 날을 기다린 연후에야 옳고 그름이 판명될 것입니다. 글로써는 능히 진심을 다 쓸 수 없는 고루한 생각을 대략 늘어놓았습니다. 삼가 재배드립니다.




士爲知已用(사위지기용)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쓰이고

女爲說己容(여위열기용)

여자는 자기를 어여삐 여기는 사람을 위해 외모를 가꾼다.


《보임안서 報任安書》 사마천(司馬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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