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ITY AND A DAY

테오 앙겔풀로스와 시간여행 | 내일이란, <영원 그리고 하루>

by CHRIS
[Μια αιωνιότητα και μια μέρα, Thodōros Angelopoulos. 1998] PHOTOSHOP. RETOUCHING by CHRIS


"시간은 우리가 갖고 노는 조약돌"

<테오도로스 앙겔풀로스 Thodōros Angelopoulos>



1. 여정

소라에 귀를 댄 지 오래되었다. 허름한 얼굴로 빈손 모아 상상하지만 멍울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거대한 지진으로 바다에 묻힌 고대의 도시, 천년 전설이 물 위로 떠오를 땐 샛별이 마중 나올까.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시간의 우물에는

기쁨이 방울지며 흘러도

안개가 서리는 창문에는 고인 눈물만 흐르겠지.

만남을 제약하는 회귀. 간혹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추위를 몹시 타며 외로움에 기대는 나약한 존재는 약간의 시간이 쥐어지면 누군가와의 대화보단 입을 닫고 나를 찾는 여정에 웅크릴 수밖에 없음을.


2. 흩어진 말을 찾는 작업

입에서 바다 내음이 날 땐 죽을 때가 된 건가.
떨리는 손을 내어 창가에 놓인 전축을 튼다.
가슴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선율.

커튼 사이로 흔들리는 하얀 손짓.
언제부턴가 같은 음악으로 답하는 나의 유일한 대화상대는 누구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지만 당신도 역시 외로운 사람인가.
덧없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의심스러운 통증.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
기나긴 어둠 속에서 윤곽만 진 채 저 멀리 떠나가는 배처럼
바닷가를 걷는 사랑스러운 연인들.

봄에 대한 유혹은 나를 부르네.
저 세상에 있을 당신.

내가 떠나려는 이유.

흩어진 말을 찾는 작업.


3. 설렘의 키질

어느 할아버지가 그랬다.

음악은 언어를 찾는 사랑이라고.

기쁨과 슬픔을 말하는 사랑이라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뱃머리에서 키질을 할 때마다 나는 따가워진 눈을 감지 못한 채 후진했다. 어린 날에 걸었던 그곳에서 심장을 덜컥거렸던 설렘에 동승하려는데 가슴은 왜 아파오는가.


4. 도착 그리고 출발

지중해성 기후를 예상했지만 뼈까지 시린 추위였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던 공항의 벤치. 매연이 가득한 새벽 도로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갑자기 파고든 한기에 옷깃을 올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정류장. 이국의 방문자를 맞은 건 고대문자가 새겨진 버스였다. 시야를 터오는 샛노란 불빛. 한없이 내리던 비를 잠재우는 투입구는 찰칵, 소리 내며 열린다. 서툴게 동전을 넣는다. 딸깍. 누가 낯선 이방인인지 모르게 서로를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빗물을 털고는 자리에 앉았다. 출발소리와 함께 일제히 앞으로 돌려진 사람들의 고개는 가시지 않은 피곤에 끄덕임을 반복했다. 불규칙한 흔들림에 눈을 따라가며 고개를 천천히 회전했을 땐 차창의 와이퍼는 멈춰있었다. 먼지가 그리는 새벽의 거리를 달리며 오늘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걸 알았다. 괜한 흐느낌이 밀려와 창으로 급히 시선을 돌린다. 검은 찻잔에서 음악이 샌다. 고도(古都)는 책장을 보고 상상했던 것과 달리 창과 칼이 춤추는 도시가 아니라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수많은 노동자들이 매운 입김을 뿜는 공장 외곽으로 변해있었다.


5. 아이, 외로운 그녀를 보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긴 편지에는 한 남자가 수 십 년을 걸쳐 찾아 헤맸던 시어(詩語)가 숨 쉬고 있었다. 한 세기 전 솔로모스의 미완성 시는 미치도록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그녀가 품고 있었던가. 그들은 둘이었다. 하지만 침묵의 성으로 들어간 그는 그녀를 잊고 서운한 울음을 짓게 했다. 엄마의 뱃속에서 손가락을 빨며 뱃놀이를 하던 아이는 바닷물이 철썩 대는 소리에 잠든다. 엄마이자 아내이며 애인인 그녀만이 모래를 저벅거리며 당신을 기다리네. 팻말이 가리키는 곳에는 유리 밟는 소리가 난다. 당신이 갈 곳을 밟으며 지뢰를 터트린다.


6. 북부로 가는 버스, 여전히 이름 없는 국경

향기 없는 몸짓에 깊은 정을 주던 꽃 파는 남자. 그의 애원을 뒤로한 채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오스만 투르크에 격렬하게 저항한 수도사들의 도르래에 몸을 띄우려 북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진회색으로 내려앉은 하늘. 하루종일 비가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길엔 구름만이 끝없었다. 오후 늦게 도착해서야 밝아진 주위. 기암절벽이 햇살에 부서졌다. 빛에 배겨 나오는 짓물러진 황금의 눈부신 아름다움이란. 모텔을 정하자 배고픔이 밀렸다. 아무도 없는 길을 돌았다가 희미한 불빛을 따라 무임승차를 했다. 뜨끈한 수프가 주는 온기와 더불어 야경이 스미는 친절함은 어색할 정도로 깊었다. 공장 칵테일. 빨간 후추. 은밀한 시선. 가까운 접촉. 숙소로 돌아왔을 땐 자정이 넘었다. 젊은 남자가 끓여주는 차와 짧은 담소. 알바니아 노동자의 이야기로 아침을 깨울 때까지 밀입국의 서러움, 더불어 이방인에게 둘러싸인 경계심은 짙기만 했다. 나보다 한 살 젊었는데 아이들은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경은 너무 가까웠다.


7. 길 잃은 작은 새

길 잃은 작은 새. 낯선 곳에서 떨고 있구나.
운이 좋아 그 누군가가 날 잡아주었네.
내가 보낸 사과는 썩었고
내가 보낸 모과는 시들었네.
내가 보낸 포도는 뭉개져 버렸네.
내가 보낸 눈물은...


8.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은 여행자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경험. 그런 질박함에는 언제나 풀꽃 같은 기대를 건다. 같은 종족인데 고개 돌리는 무심함. 한 때 밝았던 표정은 섭섭함이 그득하다. 눈 쌓인 국경에서 네 시간의 체류. 지루한 기다림. 총을 멘 군인들 사이로 여권을 내밀었다. 떠나지 않는 버스는 감옥이다. 좁은 좌석에서 초조한 서성임을 반복하다 보니 창가에 매달린 시체나 다름없다. 움직이지 않는 차에선 할 일이 없어 밖으로 나갔다. 관심을 보이는 하얀 얼굴.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했다. 밀려오는 愛. 작은 노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엄마를 써내려 갔다.


"진정한 시인은 혁명을 통해 죽은 자를 위로해야 한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시인도 죽은 자도 아니었다. 그저 국경을 넘고 싶어 하는 여행자일 뿐.


9. 시어를 사는 시인

오랫동안 조국을 떠났던 시인은
모르는 말을 배우려 돈을 주고 시어를 산다.
메마른 입술에 너의 얼굴을,
색깔을, 냄새를, 기쁨을 담으려고.
아비소 심연
뜨루시아 이슬
우라노스 천국
키마 물결
울린드니 호수
코뿔소와 근원을 입에 담는데
배를 타고 온 처녀, 달빛을 선사하는구나.
어리석은 시인은 자유를 부를 짖을 수밖에.
여인은 떠나고 시는 여전히 미완성.


10. 떠도는 사람

바다의 흐름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섬. 겨울이면 거주자도 떠나버리는 마을. 여객선에서 내린 건 나밖에 없었다. 긴 한숨처럼 고동을 울리며 떠나버린 배. 선착장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연락처를 들고 근방 경찰서로 향했다. 치안이 필요 없는 거리에서 노는 사람들. 경찰관은 근무시간에 맥주를 마시며 동승했다.


나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니띠스” 망명객.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세니띠스” 떠도는 사람.
그리고 나는 말을 가르쳤다.

“사랑” 너와 나.


11. 파도

당신을 사랑할 거야.
말없는 발로.
불타는 가슴으로.
지워진 세월로.
그대는 파도가 된다.
밀었다 세우는 파도가 된다.

그대의 눈에서 잠드는 날
끝없는 썰물이 되리라.
파도에 그네를 타며
가느다란 침을 밟아도
울렁임에 속을 게워도
함께 인사하는 썰물이 되리라.

만년설의 보스란 한기에
뜨거움이 엎드리는 날.
뜨거우면 뜨거운 채로
차가우면 차가운 채로
누가 울지 몰라도 그땐 손 놓지 말자.
누가 얼지 몰라도 그땐 손 놓지 말자.


12. 흙에 새긴 약속

39년의 여름에 새겼던 돌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하늘의 해가 하얀 도시에 먹혀버렸다. 아스팔트 위에서 삼십 분을 누워도 자전거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차도 없는데 괜한 매연이 목을 아프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쉬러 동산으로 올라갔다. 바다, 끝없는 바다. 하늘과 별 사탕. 신화를 만들어낸 별자리. 오리온. 북극성. 카시오페아.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어 누웠다. 검은 흙 위에다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다. 약속을 새긴다.


“다시 오는 날엔 혼자가 아닐 거야. 오늘의 나와 또다른 오늘의 내가 함께 올 테니까.”


13. 비와 입맞춤

흙으로 돌아갈 죽음.
지뢰를 던지며 피하고자 했던 죽음
길에서 치어버렸다.
조심스레 조약돌을 던지던 아이야.
바다는 한없이 넓어
바다는 한없이 넓어 너를 안아주리라.
소리를 내지 않을 거야.
다리를 자르지도 않으리라.
저녁 먹으라는 엄마 부름을 바닷가에 뿌리리라.
비 오는 날엔 그녀와 뜨거운 입맞춤을 던지리라.


14. 아르가디니

붉은 깃발을 드는 사내가 버스에 뛰어오른다.


“새로운 예술을 바라는 넌 관념적이야.”


여자는 꽃다발을 던지고 화가 나서 버스 앞문으로 내린다. 붉어진 얼굴의 남자도 서둘러 따라 내린다. 떨어진 꽃다발을 물끄러미 지켜본 사내가 꽃다발을 들고 버스 뒷문으로 내린다. 작은 실내악 연주가 세 명이 앞 문에 오른다. 그리고 음악을 연주한다. 나를 반기던 그 음악을. 음악과 혁명. 노인과 아이. 여자와 남자. 차장과 운전수. 관객.


“아르가디니”


너무 늦지 않았을까? 작은 꽃을 알아본 코폴라는 너무 많이 늦어버린 걸까?


15. 내일 그리고 영원과 하루

바다 안쪽 섬은 떠오르지 않는다. 삶은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끝없이 글을 썼지만 내일은 내일로만 머물지 않을까? 무력하게 이루지 못할 꿈을 안은 채 이렇게 죽을지 모른다. 제 나라도 잊고 외국만 떠돌면서 내 나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사랑도 끝마치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는 너무 무섭다.

비는 불규칙하게 내리고 정지는 갑자기 찾아온다.
KNA 2466. 와이퍼만이 고개를 흔든다.


“아브리오!”


내일. 그리고 영원하고 하루.


이 하루의 영원함으로 진실을 위한 기다림은


내일, 그리고 영원과 하루.


2005. 2. 17. THURSDAY




오늘 만난 너와 내가 섞여

영원히 오지 않을 시간을 건너

흩어진 꽃잎을 밟고 하늘을 보았네


별들이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네

가는 곳은 가도 가도 그곳

돌아가도 바로 그곳


바라보면 그대로고

지나가도 그곳이네

내일이란 어디인가


하루는 지나가고

그 뒤에 끝없음이 붙어가네

내일이란, 영원 그리고 하루



keyword
작가의 이전글DIRECTOR's VO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