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안 보니 올림픽이건 세상사건 대중문화건 현재의 생활과 별개이긴 하다. 운동경기를 보다 보면 원형이나 사각형, 삼각형, 일직선, 마름모, 구체, 원기둥, 사면체의 일정한 도형으로 구성된 공간 내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진행하는 반복된 규칙이 지루해진다. 조직적으로 구성된 활동적인 움직임에서 신체적인 단련이나 육체의 극한을 뛰어넘는 위대한 화합의 정신을 발견하기는커녕, 정신의 일체를 유도하는 행진, 관중의 쾌락을 위한 게임, 전쟁을 위한 극기훈련이 떠오르면서 정례화된 것에서 모든 것이 터져버릴 불운의 징조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에너제틱한 외모와 다르게 운동 감각이 제로라 군집의 규율엔 흥미가 떨어져 있다.
보이는 것과 실재는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지구촌의 단결을 외치는 올림픽만이 아니라 군인 정신이나 유니온 깃발에서 체력 단련이 가져오는 건강함과 페어 게임을 통한 승리의 희망을 보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과 표식의 근원은 육체의 힘을 이용한 생존적 본능의 채집적 습성과 미지의 신에게 개인적 염원을 빌기 위한 타자의 피로 만들어진 제사의식, 전쟁의 시뮬레이션을 통한 정복의 극치와 강한 자의 독식으로 넘어간 철과 금속제의 장악, 인간 살해를 통한 소유와 쟁취의 약탈적인 욕망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통 육체적인 매력과 리비도(Libido)는 비례한다는 생물 심리학적 이론과 달리 정신적 상태를 보고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수치가 올라가는 개인적인 뇌구조상 세상을 멀찍이 지켜보는 책사(策士)의 위치로 정신 감각을 놓아두어야 할까 보다. 위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TV 소리를 뒤로 하고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바닥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다 보니 지금쯤이면 올림픽 폐회식을 할 듯싶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니 오늘 올림픽이 끝났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뒤에 앉은 여자가 핸드폰으로 올림픽 경기를 시끄럽게 시청해서 언제 끝나나 했더니 정말 끝이다. 학창 시절 한국 선수들의 올림픽 경기가 진행될 때면 특별활동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틀어지던 올림픽 프로그램에 대한 호감은 공부보단 노는 게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승패에 대한 열광적인 함성을 한쪽 귀로 듣으며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잠을 자는 딴짓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특별찬스였으니 말이다.
스타디움과 아레나의 원형 경기장과 폴리틱 한 부채꼴 모양의 아고라는 발산의 구조가 다르다. 도돌이표처럼 연속되게 울려 퍼져 머리를 돌게 하는 집산의 원형보다 작은 내부의 울림이 외부로 퍼져나가는 확장형 깔때기는 취향에 적격이다. 내 인생의 첫 여행, 서양 문화예술의 기원을 찾아 그리스를 여행했던 스무 살의 언더바 열아홉, 아테네에 머무르던 일주일간, 매일 아크로폴리스를 등반하며 나는 유희의 인간을 꿈꾸는 자유로운 정치적 성향의 인간이지 무리를 짓는 군집형 인간은 아님을 알았다. 그리스 올림픽이 끝났던 2004년 8월의 기록을 뒤적거리다가 20년이 지난 파리 올림픽의 감상과 겹쳐 놓아 본다. 기억은 묘하다. 흩어지는 것과 남아있는 것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아쉬움을 흐르게 하니 말이다.
"인간의 심장은 피가 가득 찬 도랑이다. 세상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도랑의 둑에서 몸을 아래로 던져 피를 마시고 다시 생명을 되찾는다. 그들이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들은 당신의 피를 더 많이 마신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ZORBA THE GREEK, Nikos Kazantzakis》
아테네 올림픽이 끝났다고 난리다. 신문이고 티브이(TV)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목마 타고 깃발 들고 손뼉 치는 사람들로 꽉 메운 경기장. 드디어 피날레군. 사람들의 즐거운 외침 뒤로 뭔가가 떠오르긴 한다. 아크로폴리스. 피레우스. 테살로나키. 미코노스. 트라칼라. 메테오라. 직행버스. 배. 택시. 오토바이. 트럭. 자가용. 네덜란드 이중 국적의 영국여자. 나이지리아 남자. 꽃집 주인. 변호사. 은행장. 호텔주인. 사기꾼. 지나친 수많은 인파들. 호기심 찬 아이들. 청년들. 아가씨들. 할머니. 할아버지. 숲. 안개. 섬. 바위. 불빛. 부주키 음악사. 이상한 볶음밥. 흑인 부랑자들. 몸 누일 데 없는 직사각형 침대. 아무도 없는 거리. 터진 손. 못 박힌 발. 갈라진 몸. 산발된 머리. 알 수 없는 집. 물이 새는 신발. 하숙집. 노천카페. 미로들… 헌 책방에서 풍기는 곰팡진 냄새에 푹 빠졌던 시절, 책벌레가 온몸을 물어 벌건 줄도 모르고 뻑뻑 긁은 손톱에 피 묻혀 가며 책장을 넘기던 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 Vios ke politia tou Alexi Zorba》는 들판 같은 바다에 자유롭게 나뒹굴 짭조름한 갈망 그 자체였다.
콜레스테롤이 진득하게 낀 버터와 겨가 씹히지도 않게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흰 빵을 물어뜯으면서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자유를 외치는 평화의 전령사로 남기 위해 온 머리를 쥐어짜다가 계속 꾸역꾸역, 장벽처럼 가로막은 빵 덩이를 넘기려 맥주로 목을 축이다가 점점 풍선처럼 불어 가는 몸에 놀라 바텐더에게,
"이봐! 늘 먹던 칵테일 한잔 주게. 설탕은 빼고!"
다이어트 주스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주문한 뒤 취하지도 않으면서 취한 척 해변가 비치솔 그늘에 앉아 고기 낚는 노인의 외로운 투쟁을 담아내려 했던 헤밍웨이. 모두들 여행을 가던 여자친구를 만나던 지식을 뽐내던 배불뚝이 헤밍웨이와 똑같은 음성 내며 헤밍웨이표 칵테일을 주문한다고 하던데, 난 체질적으로 이런 칵테일은 별로다. 맛이 없다. 비싸고 취하지도 않고 달콤하기만 하다.
노랑노랑 구워진 돼지 뒷다리를 거칠게 뜯어대며 피 같던 포도주로 혈관을 채워서 바다 위에 은빛 야성을 뿌려대다가 유랑하는 집시 처녀와 춤을 춰대고 사랑의 열락을 기념하려 눈을 뒤집을 장난치고 천박한 언행과 말투로 세상의 헛됨을 읊조렸던 카잔차키스가 더 좋다. 그리고 그의 열망이 된 조르바. 그가 마신 술만 생각해도 목덜미가 탄다. 전쟁에 휘말려 조국을 되찾아야 하는 독립투사도 아니고 누이, 동생, 형이 눈앞에서 죽어 머리가 돌아버리는 잔혹한 복수자도 아니지만 미친 짓거리를 하며 유랑하던 조르바, 그 이름만으로도 바람냄새가 났다. 이젠 책 내용도 모르겠고 조르바가 뭔 행동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하여간 신을 섬기는 수도사건 간음한 여인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이건 잔꾀를 부리면서 이중성을 띤 사람들을 농락하고 비웃는 그의 입가만 생각난다. 아직도 찌그러진 반달을 그릴 그의 입에 손가락을 대고 싶다. 잠깐 그대로 있으라고. 그런 비틀어진 입가가 너무 좋다고. 그 입을 내 입술로 막아버리고 싶다. 그대로 안겨서 쿵쾅대는 심장소리도 듣고 싶다. 그 도랑과 같다던 구정물 가득한 심장!
바다와 여자와 술과 힘든 일. 너 자신을 몽땅 일과 술과 사랑 속에 빠뜨려라. 그리고 절대로 신이건 악마건 두려워하지 마라. 그게 젊음이라는 거지.
난 순진하거나 건전한 인간은 아닌 게 맞다. 이 말에 반해서 뭣도 모르면서 너무 좋다고 소리쳤으니까. 영원한 어린이 피터팬이나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달리 퍽이나 질퍽하게 살았던 조르바를 보며 언제까지나 몸은 늙어도 마음은 젊고 싶다고 말이다.
마음으로 육체로 살리라. 미뤄두는 도덕적 양심은 꺼져버리라고 그래. 품 안의 철새는 때를 맞아 고향으로 날아가겠지. 나는 표면의 야수, 껍질의 뱀과 더불어 살지.
더 이상은 고민하지 않으리. 나에겐 술과 남자, 바다와 하늘, 까만 밤,
그리고 아름다운 달이
불러낼 친구 조르바가 있으니까. 미치도록 취하고 춤추리라.
조르바의 몸짓 하나 말투 그 느낌이 좋아서 눈이 벌겠던 게 언제인가. 지금은 자판보고 모니터 보고 눈이 벌겋다. 벌건 눈에 푸른 바다만 넣어놓고 흔들어보고 있다. 언젠가 갔던 그 바다 그 거리 그 느낌을 다 기억한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은 잊었어도. 그게 잊혀진 바람이 되겠지만. 책 속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만났다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풀잎처럼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눈길은 당신이 사랑한 사람의
얼굴모습. 몸매. 몸짓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노릇이 되고 만다. 이삼 년이 지나면 어느새 당신은 그이의 눈빛이 파랗던가 까맣던가조차도
기억해 낼 수 없다.
2004. 8. 31. TUESDAY
TV를 완전히 끊은 지는 6년이 되었다. 해외에 있을 땐 영화를 볼 때 DVD 플레이어를 돌리는 용도 빼고는 TV는 거의 틀지 않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하기 전에는 퇴근한 뒤 거실에 자동으로 틀어있던 TV를 보며 잠이 안 올 때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는 용도로 썼으니, 눈앞에서 TV를 치워버린 현재에는 기본적인 드라마나 뉴스나 잡동사니 소식의 세례에서 깨끗하게 멀어진 것이다. TV를 안 봐도 세상의 정보는 다양하게 널려있고 핵심적인 삶의 내용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자신과 기호가 맞는 것을 추려내는 것이 더 어려워진 세상이다.
지금까지 그리스 사람, 터키 사람, 프랑스 사람, 알바니아 사람, 알제리 사람, 독일사람, 영국사람, 네덜란드 사람, 핀란드 사람, 덴마크 사람, 오스트리아 사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아일랜드 사람, 이탈리아 사람,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캐나다 사람, 스페인 사람, 칠레 사람, 싱가포르 사람, 홍콩 사람, 인도네시아 사람, 파키스탄 사람, 인도 사람, 이라크 사람, 이란 사람, 두바이 사람, 멕시코 사람, 쿠바 사람, 아르헨티나 사람, 나이지리아 사람, 가나 사람, 토고 사람, 우크라이나 사람, 러시아 사람, 조지아 사람, 카자흐스탄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 몽고 사람, 중국 사람 등등을 만났는데, 얼굴 생김새와 습관은 달라도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간은 신체구조상 먹어야 살듯이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삶의 기본 형식은 같아도,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을 구성하는 내용이 다르다.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다투게 된다. 공동체 사회에서 각양각색의 타인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가느냐는 통합의 주요 쟁점으로 돌출되기 마련인데, 분쟁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이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다름 속에서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야 하는 길이 다르면 타인의 영역을 넘지 않고 대상과 가볍게 헤어지면 된다. 타인의 길을 밟거나 그 길을 방해하거나 그 길을 쟁취하거나 그 길을 빼앗을 이유는 없다. 너와 나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설정해 놓은 많은 경기들과 게임들과 실험들과 전쟁들과 규칙들과 제도들과 삶의 모습들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최고가 되도록, 등수를 정하고 정신없이 뛰게 만든다. 몸뚱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한 곳에 억지로 꿰어 맞추고 자르고 붙여놓는다. 그 기괴한 모습에 웃는 자는 그런 어색한 사회를 그린 미치광이일 것이다. 시간의 저울 위에서 바쁘게 뛰는 이는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도, 왜 뛰어야 하는지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빨갛고 파랗고 노란 신호에 맞춰, 뛰고 정지하고 정신없이 돌진하는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사회적인 구조와 신호에 움직이도록 학습되어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사고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살면서 왜 사는지 회의가 든다면 멈춰 서서 한 번쯤 돌아봐야 한다. 누구나 설정해 놓은 내일의 목표가 과연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무엇인가를 이뤄야 주어진 삶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하나의 과제였던 시절을 거치며 요즘은 예전에 고민했으나 여유가 없어 미뤄두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다시 물음을 던져보고 있다. 왜 사는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심상이 전이된 것은 장족의 발전이다. 이제야 내 안의 에너지를 분출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거친 세상에서 꺼끌거리는 거칠음을 즐기며 살아봐야겠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굉장히 젊어진 기분이 든다. 나답다는 생각도 든다. 영원은 없겠지만 모든 것이 쇠락할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오직 나일지 모를 당신을 위해 뛸 것이다.
[ALIVE PUMP] 2004. 8. 18.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갈라진 심장이 흔들린다. 심장을 그리다가
산산이 조각났다.
심장에도 기억이 있다. 냉철한 그와 상관없이 죽음이 다가와도 그의 활동이 멈춰도 완전히 모든 기억의 커튼이 닫힐 때까지 쿵 쿵 뛰면서 시간의 기억을 담아두는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