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 OF THE WORLD, Herbert George Wells] PHOTOSHOP COLLAGES by CHRIS
전쟁이란 행위는 전쟁이 지향하는 종의 속성과 에너지기원을 따진다면 생물학적 방면이나 학문적인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세포가 늙은 세포를 살해하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암처럼 인식되는 세포의 무한 증식을 막기 위해 노쇠라는 시간 사이클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수명을 삭감하여 세대교체를 진행시키고 그 안에서 죽음이 운동하게 되는 순환기적 원류가 발생하는 자연의 원리에 따르기 때문이다. 세포들의 자멸과 투쟁은 그들이 소속된 공간, 즉 몸체의 자동 폭발을 막기 위한 일종의 자기 제어장치이다. 레지스탕스처럼 등장한 종의 반란과도 같은 병균의 역습과 지속과 저항이라는 역학의 묘미를 부여하는 항체의 진행은, 지구란 한정적인 공간의 구(球)에서 삶의 이유를 가지고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배려된 내 몸 안의 작은 전쟁인 것이다. 인류는 자신과 주변 생명체를 연구하면서 유선형의 비행기를, 전화기와 다이너마이트와 원자폭탄과 수소에너지까지 거침없이 생산해 냈다. 시간의 비밀을 쥐고 있는 빛과 기체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자신을 절개하는 시도를 하는 자, 과연 무엇을 얻고 싶은 건가?
인간들은 욕심이 많다. 전지전능한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신은 멀리 있지 않은데, 신은 다양한데, 신의 자손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유일무이한 신이 되길 원한다. 살아있는 목을 치고, 그 목으로 사골국을 끓여 먹는다. 약한 신을 죽이고는 신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신이 가장 강력하며 그를 죽여야 신이 되는 게 아니던가? 그러나 인간 성찰의 부족한 실행은, 타인을 억누르는 것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수월한 방책이라고 믿게 한다. 이로 인해 인간으로서 갖고 있던 복합적인 감각의 상실은 기억의 변형을 몰고 오며 종족과 혈연을 대규모로 살해하는 명분의 전쟁을 시작한다. 곧,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충격이 자리한다. 몸 밖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가 가져온 파괴는 가시적인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곤봉 한방에 자신의 살해가 이루어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괴리감을 펼쳐낸다. 죽음은 누구를 위한 작품이던가? 권력자의 나태한 오락용 게임의 소산인가? 일정한 시기에 설명될 수 없는, 이유 없이 솟아 나온 반항은 납득할 수 있지만 이유 없는 죽음과 이유 없는 선택은 나의 저항을 무력하게 하고 구토를 가중시킨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 묻혀있다가 갑자기 딱딱한 껍질을 깨고 대상 없는 분노를 분출하는, 오늘날의 미국적이고 유대교적인 스펙터클표 우주전쟁은 더욱 인정할 수가 없다. 우주전쟁, 무엇을 위한 것이며 왜 일어나야 하는가? 동족의 혈류가 우는 강물이 자라고 있다. 반성 없이 피만 줄줄 흘리는 나무는 바람에 부러지고 말 가는 팔을 펼치고 있다.
9.11 테러가 한국에 정식으로 발표되기 이전, CNN을 보고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 아비규환의 현장. 회색 먼지 돌풍 사이로 특종이 터진 것이었다. 성냥갑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진행은 여름이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처럼 신속하고 정확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세계의 충돌이 나의 작은 집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스토리처럼 부조리하고 어색했다. 어제는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봤다. 참담한 실망이다. 스티븐의 SF 철근 스토리는 맥없이 상실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슈가랜드 특급>은 <보니와 클라이드> 아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서라운드가 관통하는 좌석에서 깜짝깜짝 놀라 몇 번 가슴을 움츠리다 보니 영화가 끝났다. 허버트 조지 웰스(H.G Wells)의 원작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을 손상하다 못해, 외계의 물질에 대한 두려움이자 가장 미지의 영역으로 치부된 인간성을 달라지는 현시대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도 미흡했다.
기결에 선보인 친절한 설명은 세상 깜냥도 모르는 순진한 아동용을 표방한다. 무자비한 지적 존재의 관찰대상이 되어버린 인간은 미토콘드리아처럼 꾸글거리는 세균이자 과학자의 검증을 받지 못한 채, 지구라는 쓰레기통으로 폐기된 모르모토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너머의 막강한 존재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내핵에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뇌성벽력과도 같은 빛의 발설로 지구의 표면으로 뛰쳐나온다. 제2의 천지창조에는 파괴가 우선이다. 우리의 경축일은 급작스럽게 죽음의 신호탄을 터뜨린다. 태양의 플라즈마는 그 뒤틀림인가, 혹은 신의 진노? 소요되지 않는 폭동처럼 도시로 연발하여 쏟아지는 광선을 보고 미국인들은 묻겠지.
“폭탄 테러예요?”
옆 집 아저씨의 몸뚱이가 폭발하고 길거리의 차량들이 산산조각 난다. 오직 안전한 곳은 너의 공간이다.
“네 공간 속은 안전해.”
풀어진 신발끈에 뒤로 넘어져 머리가 깨질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지 계속하여 확인하는 것만이 갈 곳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할 일인 것이다. 트라이포드가 일어섰다. 우리나라 말로는 삼발이의 점령이다. 조류가 그들의 움직임을 알리고 나무가 흔들린 뒤에야 군중들이 떼거지로 달아난다. 친구가 떠들었다.
“이 영화는 말 안 듣는 놈들, 진정시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냥 쏴 버리는 거지.”
일방적인 살육에 혀를 내둘렀다.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고? 죽어도 살아남고, 맥없이 살아남는 현장에 두 눈을 감고 꿈나라 동산으로 가는 감동의 요건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네 죽음과 피 앞에서? 미국 안에서 시작되고 미국 안에서 끝나는 생명과 희생, 그 불굴의 자생력은 우리 인생에서 헛된 삶과 헛된 죽음이 없다는 이야기를 설득력 없게 만들었다. 미생물론을 펼친 스필버그, 버그가 너무 심했다.
2005. 7. 16. SATURDAY
이전에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작품들에는 무차별적인 비판 폭격을 가했다. 욕 한마디 섞지 않고 별로 뭐라고 안 했는데 눈물을 쏟는 사람들 앞에서 OK, 고생만 들입다 하고 실패로 귀결된 모습에 더 이상의 비판은 창작으로 향한 사기를 저하시킴을 인정했다.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 사이로 보고 싶은 거나 보자고 생각했다. 정신이 산발해 있는 인간에게는 바쁜 게 약이다. 타인의 작품을 볼 시간이 없으니까 뭐라고 말하지도 않게 된다. 산모가 순한 아이를 낳으려면 악한 것이 엄습하지 못하게 금줄을 치고 좋은 거 보고 좋은 것만 느껴야 한다는데, 나는 한 마디로 야수 같은 생활 속에서 낳은 것은 나를 닮은 길들일 수 없는 짐승들이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모두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문명의 언어를 처음 접하는 늑대소년처럼 말본새는 색색깔의 스파게티 줄처럼 꼬아져 있었고 사상적 관념은 안드로메다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다. 위트 있는 언어에 머리를 후려치는 생각이 존중받는 예의 바른 가면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고개를 바로 세우고 정식적으로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다. 버그 없이 갈 수 없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해충들과 더불어 각종 살충제를 먹고도 기차게 살아남은 오염된 혀 끝은 순수하게 트레이닝이 목적인 실험형태 정도는 간단히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