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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30. 2024

SUSAN SONTAG, AT THE SAME TIME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자유 해석이 존재하는 동시성의 존재들

 

[SUSAN SONTAG, AT THE SAME TIME] 2024. 6. 30. PHOTOGRAPH by CHRIS


 궁핍한 예술적 의지의 작가들은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권태로운 사상적 상태에서 창작의 열기를 펼치고자 한다. 행복한 상태에서는 행복을 염려하지 않고 충만한 상태에서는 충만함을 고려하지 않듯이 자유에 대한 의지는 자유로운 여건에서는 발동하지 않는다. 21세기 가장 방만한 경제적 자유와 서구식 카우보이의 자긍과도 같은 전체주의적인 속박이 동시에 존재하는 미국에서라면 유태인이나 유목민의 핏줄이 남아 있는 이민자와 순혈주의에서 벗어난 혼재된 지성들이 가득한 용광로에서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영어로 표현되는 동시대의 문화를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고를 때 작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면 수많은 저자와 저작물들의 나열 속에서 우선적인 선택권이 부여된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이름을 보고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 2007》를 집어 들었다. 《사진에 관하여 On Photography 1977》를 읽었던 수십 년 전의 옅은 기억만으로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복수다"라며 예술과 사회와 문학과 정치와 도덕에 전방위적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감각적인 예술미를 토해내던 열정적인 평론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수전 손택의 평론모음집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는 그녀가 독일 서적출판조합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의 연설 제목이다. 2004년 12월 그녀가 백혈병으로 영면하기 전까지 마지막 4년 간의 에세이와 평론, 연설문을 모아놓은 글로, 영문명은 '동시에(At The Same Time)'이다. 솔직히, 이 책의 선택은 잉게보르크 바하만 (Ingeborg Bachmann)에 빠져있던 스무 살의 순간을 꺼내는, 동시에 Simultan》와 동일한 제목에 끌려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해야겠다. 파스테르나크 (Pasternak), 츠베타예바 (Tsvetayeva), 릴케 (Rilke)처럼 문학적 역사에 길이 남을 세 명의 시인들이 주고 받은 편지글이나 도스토옙스키 (Dostoyevsky)의 행적을 따라 문학적 열의를 표현한 레오니트 칩킨 (Leonid Tsypkin)에게 쏟아붓는 그녀의 찬사는 아름다운 문장과 문학적 기술을 만드는 문학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작가들을 후원하고 가치를 역설하는 평론가로서의 산술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면 현생에서의 역할과 꿈이 달라지는 것도 감내해야 일임을 알려준다. 윤리 도덕적이고 정치 사회적인 관심에 날카로운 의견을 보이는데 장점을 가지고 있던 수전 손택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단상들과 사진에 대한 짧은 소고, 9·11이라는 사회적 이슈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보이는 비판을 가지고 문학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인 호소를 끌어온다. 작가로서, 평론가로서, 창작자로서, 비평가로서 각자의 본분에 맞게 그 열의를 다하게 되는 삶은 말과 글로 이루어진 문학적인 세상에서 자유롭다고 하겠다.




 I.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평생 깊이 헌신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는 다른 어떤 진지함으로 흉내 낼 수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수전 손택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관념은 흥미롭다. 그녀가 감명받은 여러 작품들을 입맛에 맞게 정리하며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상상을 끌어와본다. 작가들의 서술적인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들과 단어의 돌더미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은 일률적이기 어렵다.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을 뒤떨어진 시대유행으로 치부하는 과거의 상류사회나 요즘 젊은 친구들의 낭만 없음은 유사한 권태감을 내보인다. 칸트 (Kant)의 보편적인 판단에 의해 유연성을 탈피한 절대성의 미학은 동조하기 힘들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발레리 (Paul Valéry)가 말한다면 문학적인 권위에 따라 저항은 심하지 않을 것이다. 인기를 추구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아름다움조차 문화전쟁으로 구별 (Discrimination)되는 기준에 속해진다면 자신과 다른 미덕에 대한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흥미로움"에 대해 감각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아름다움과 동일시되는 '여성 (Woman)'의 양가적인 감정은 아름답다는 숭배의 대상과 함께 아름답도록 몰두한다는 이유로 혐오를 받는 연극적인 동시성을 가진다. 패션과 뷰티, 미용 산업과 생각 없음이 혼재하는 세계에서 회의적인 여성상을 끌고 오는 수전 손택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워야만 하는 당위성에 놓인 미학적인 관점을 가진 디자이너라면 '귀엽고', '예쁜'과 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세계의 형용사를 떨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도덕적인 수사에 몰두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이상화 역사의 일부이며, 그 역사는 또한 위안의 역사의 일부이다."


 인간이 가진 몸과 얼굴의 아름다움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소유'라는 환상을 일으킨다는 대목은 생각해 볼 만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와 사랑에 대한 감정은 등가시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의문사를 남겨둔다. 소유와 사랑은 동일한 개념은 아니며, 욕망과 사랑은 표현과 의식의 수용 선 상에서 같은 급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예술에 대한 심취는 외면에 대한 감상만이 아니라 정신이 깃들여져 있다는 내면적 특성 때문에 흥미로운 저녁놀보다 더욱 강한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Pasternak)와 마리나 츠베타예바 (Marina Tsvetayeva), 그리고 라이너 릴케 (Rainer Maria Rilke)가 함께 했던 1926년. 동시대에 살았으나 동시적 공간에 살지 않았던 세 시인들의 러브레터는 열렬하고 달뜬 랩소디가 되었다. 러시아의 젊고 서정적인 시인들에게 위엄 있고 거만하면서 낭만적이었던 릴케와의 진지한 사교는 《편지: 1926년 여름 Letters: Summer 1926》에서 삶의 풍요와 극치를 안겨주었고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이들 사이에 충만함과 광희(狂喜)를 선사했으며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요구에도 잊히지 않는 불빛이 되었다.



 헌책방에서 인생의 눈을 뜨일 정도로 귀중한 보물을 발견했을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레오니트 칩킨 (Leonid Tsypkin)의 《바덴바덴에서 보낸 여름 Summer in Baden-Baden》에 대한 수전 손택의 애정은 말만 들어도 설렌다. 1926년에 태어난 레오니트 칩킨은 순전히 문학 자체를 위해 열정을 소비한 병리학자이자 의사였다. 신(神)이나 신앙 없이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 영혼에 관한 질문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에 빠진 칩킨은 영화감독이 될 생각도 했지만 가족부양의 의무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는 짧은 소품, 플롯이 복잡한 단편들, 자전적인 중편소설을 거쳐 《바덴바덴에서 보낸 여름 Summer in Baden-Baden》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자신의 삶을 그려내면서 글쓰기에 자신을 고립시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젊은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하는 몽환적인 화자의 유미적인 상상은 문학적인 폐허와 도박, 질병, 육욕, 질투, 회개의 윤회 속에서 수영하는 몸짓으로 부부 사이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해 서술한다. 칩킨은 유대인을 혐오했던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에 바친 유대인들의 열정"을 화자인 '나'의 행위, 기억, 사고와 '그, 그들, 그녀'로 대변되는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발휘되는 언어의 독창성과 속도를 통해서 죽음에 쫓기는 건강강박증 환자의 견고한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여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진정한 여행을 하도록 만든다. 유명에 대한 열망과 진실에 대한 열망은 분명 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랍에 처박아두는' 문학적인 열정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면 세월을 거듭하며 연습했던 산문들과 시는 의미로운 장편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 반티 (Anna Banti)《아르테미시아 Artemisia》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추종자이고,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헤로도토스 (Herodotus)의 역사 History에 나오는 여왕이자 군사지도자이며, 이오니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 할리카르나소스 (Halicarnassus)의 여왕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이끄는 전투력을 가진 여인의 형상을 지닌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반티의 손에서 17세기 이탈리아에서 각광받는 전문화가가 되어 성서나 거대 서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명해진다. 아르테미시아의 성공신화는 남자를 죽이는 여자들, 홀로페르네스 (Holofernes)를 베는 유디트 (Judith), 시스라 (Sisera)를 해치우는 야엘 (Jael), 클레오파트라 (Cleopatra)나 루크레티아 (Lucrezia)처럼 무력하게 모욕당하고 자비를 당하는 구하는 여자들이나 수산나 (Susanna)와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Magdalene)를 해방시킨다. 수전은 여자가 남자처럼 자유롭다는 것은 관습적인 선택과 일상의 희생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아르테미시아에서 삶에서 중심이 된 것은 미술에 몸을 바쳤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독감과 외로움이었다. 반티가 남편 로베르트 롱기(Roberto Longhi)에 느끼는 존경심은 아르테미시아와 그녀의 아버지에 전이되어 "위대한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Orazio Gentileschi)의 딸"처럼 남편의 그늘에 묻힌 반티의 형상이나 다름없게 보이게 한다. 열렬한 페미니스트와 달리 안나 빈티가 아르테미시아에 투영하는 정의와 위험과 자유에 대한 입장은 부활을 거듭하는 재창조된 여성의 감정의 파고와 도덕적 권위를 보여준다.



 시대에 잊힌 영광스러운 인물은 너무도 많다. 처음으로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부른 혁명가이자 진정한 공산주의자, 빅토르 세르주 (Victor Serge)는 툴라예프 동지사건 The Case of Comrade Tulayev》에서 보여주는 격동적이고 위험스럽고 윤리적으로 굳건한 삶을 살았다. 희망과 열정의 정수였던 현대의 비극인 혁명은 위험, 죽음, 투옥가능성, 궁핍과 굶주림을 수반하며 세르주에게 열두 살부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세르주는 한 혁명가의 회고록》에 한 프랑스 작가의 말을 빌어 이렇게 썼다.


 "진실을 추구할 때 있을 수 있는 끔찍한 일은, 진실을 아는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좁은 자기 세계의 편견을 따르거나 유행하는 상투문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는 말은 새겨둘 만하다. 자신을 초월하는 진실과 목소리가 없거나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어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했던 세르주의 소설적 태도는 역사적 파노라마에 남성중심의 고난과 영웅적인 대업과 용기, 독립적이고 잔인한 남성적 가치를 가졌지만 여성은 도움을 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는 면에서 투쟁적인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남성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약간의 오차를 허용해야 할 듯싶다.



 소설과 외떨어진 공상과학소설, 이야기, 우화, 알레고리, 철학소설, 몽환소설, 통찰적 소설, 환상문학, 지혜문학, 패러디, 성적흥분제! 소설 전통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위치한 것들에 심취해 있다면 수전 손택이 추천하는 할도르 락스네스 (Halldór Kiljan Laxness)《빙하 아래 Under the Clacier》를 봐야 한다. 평범하지 않고 신비롭고 마술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이하고 마법에 걸린 듯한 세계에선 관습적인 시공간 개념에서의 비현실을 추구하며 정체성이나 도덕성을 지배하는 법칙에 위배되는 공간을 형성한다. 비밀스러운 순례의 장에서 회의적이고 완고하며 자신의 공포와 싸울 줄 아는 모험적인 인간은 '앎'을 고찰한다. 연구서나 일기, 편지의 모음과 같은 철학소설류와 같은 정신적인 탈출계에서 소설적인 창작의 개념과 싸움을 이어나가는 용기로운 인간은 시간, 의무, 우주에너지에서 환골탈태하며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 모험적인 인간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여성'에 대한 갈망은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정신적 추구를 끌고 온다. 폐지된 시간이나 다중의 공간을 함유하는 북유럽의 신화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어색한 활기와 낙관주의를 가진 모자라면서도 귀여운 희극적인 인물을 초청한다. 경이롭거나 부조리한 것에도 놀라지 않는 희극적인 요소들은 신비적이고 우주적이며 은하적인 회합 장소에서도 무의미와 공허함을 하나의 포인트로 잡아 입가에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정말 그런 소설이라면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겠어?"




II. 미국의 야만성


 2001년 9·11에 대한 수전 손택의 이성적인 태도와 냉철한 비판은 부시 행정부의 카우보이 수사에 대한 거침없는 언사를 선포한다. "기습 공격에 의해 촉발된 전쟁"이라는 이슈와 "경쟁적인 두 문명의 충돌"이라는 천박하고 위험한 제국주의의 오만한 발언은 전쟁을 심화하고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반동적이고 급진적인 행위임을 직시하게 한다. 대량살상의 테러 앞에서 이라크에 무자비한 폭격을 내뿜던 미국의 폭력에 대해 망각한 채 끝없는 전쟁으로 몰고 가는 세계경찰의 태도는 살만 루시디 (Salman Rushdie)가 지적하듯이 '정당한 불평거리'를 가진 테러리스트를 초청할 뿐만 아니라 부당한 취급을 바로잡는 파렴치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들의 9·11 공격은 현대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로 보고 반테러 작전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지만, 부시 행정부는 마약이나 암, 빈곤에 대한 은유적인 전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언젠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진짜 전쟁을 한 것도 아니기에 "끝없는 전쟁"이라는 위험하고 바보스러운 개념을 들먹거리고 말았다.


 2001년 9월 20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2021)은 미국의 지원을 얻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설립했다가 미군의 철수 이후 탈레반이 재집권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했다. 지난 20년간 최신의 레이다망도 접근불가능한 게릴라적인 황무지에서 연합군들과 미군은 탈레반들과 국지전을 이어갔다. 결과는 아프가니스탄의 참신하고 개혁적인 변화는커녕, 험난한 지형에 적응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유혈과 미 연방연합군의 철저한 인력의 낭비를 불러왔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 (2003~2011)은 후세인 정권의 붕괴로 시작하여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으로 종식되었지만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이라크 공습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인권 유린 행위, 팍스 아메리카나의 패권적 의미의 약화 등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전방위적인 실패와 세계경찰의 선동적 무지(無知)에 휩쓸린 현장에 대해 고찰하게 했다. 국제경찰국가로서의 사법적인 정의와 행위의 정당성, 공공의 이익에 위배되는 헌법적 의미가 상실될 때 이에 대한 합리적인 통제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국가들과 무리들의 이상은 변질되어 간다. 올바른 정치의 목적은 정치적 이득을 목적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에 있지 않다. 어떤 무리든지 집단을 형성하는 지도자의 덕목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타인들의 비판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다. 수전 손택이 염려했던 일들은 그녀의 사후 계속적으로 진행되었고,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 다만 팍스아메리카나의 오판과 오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그녀와 같은 중립적인 태도를 가진 냉철하면서도 반성적인 지성들이 존재하고 또한 그들을 보호하는 문학적인 상상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게 한다.   


  


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자체가 아니다."

 "사진은 파편이고, 힐끗 보기이다."

 "모든 사진은 기억할 만한 것이 되려고 다시 말해 잊히지 않으려고 애쓴다."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여행, 관광의 최상의 형태이고 세계를 넓히는 가장 주요한 현대적 수단이다."

 "최종적인 사진은 없다."


 수전 손택의 사진미학적 언어는 사유적이고 함축적이다. 단지 몇 줄의 문장으로 표현된 사진에 대한 의견은 카메라를 들었던 이유와 기억을 소실한 과거의 시간까지 소환시킨다. 렌즈로 한 단계 걸러진 사물들은 발견과 혁신에 대한 현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 대상에 대해 하나의 조각이자 파편의 단위로 보는 방식인 사진은 법적인 태도나 서술과 유사하다. 현실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부인하며, 파편적인 현실을 다시 짜 맞추고 자유롭게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시간에서 멀어진 '실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초청하며, 현실에 놓인 경계를 지나간 어제로까지 확장한다. 손택이 지적하듯이 전쟁, 악행, 유행병, 자연재해처럼 사건을 확인하는 사진은 일차적인 겉모습을 기록하며 변화와 파괴로 기억을 이끈다. 보고 주목하고 인식하는 세련된 사진만의 방식은 이를 예술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현실을 약화시키거나 강렬한 감흥을 주기보다는 가시가 제거된 부드러운 방식이 아닌지 우려를 낳기도 한다. 초현실주의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예술적 사진들은 사건이나 상황, 갈등과의 거리를 두면서 시간을 제거하고 공간적인 현실의 폭력과 감정들을 멀리서 바라보게 한다. 시각예술의 한 장르인 사진은 존재에 대한 우리의 태도 정립을 요구하며 현실의 비정상성과 존재의 동시성, 비밀스러운 세계와 배척당한 감정에 대해 파편을 파편으로 남게 하는 동시에, 시간에 축적되지 않는 성질과 함께 완결을 거부한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문에 관하여>에 대한 소고에서 주목할 점은 역시 사진의 역할 부분이다. 현실을 보도하는 고발성 매체가 된 사진은 어떤 갈등에 관한 기억의 경도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악명 높은 사담 후세인의 아부그라이브 형무소에서 미국인들이 이라크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사진은 "학대"와 "고문"이라는 단어로 변명하기에 급급한, 선동적이고 의미 없는 전쟁을 시작한 지배자들의 실책을 소환한다.


 "어떤 사람이나 또는 제삼자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의도적으로 가하는 모든 행위"라고 고문의 정의를 끌고 오는 손택은 고문과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을 방지하는 협정(Convention Against Torture and Other Cruel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 1984)에 기재된 바를 상기시킨다.


 "어떤 종류의 예외적인 상황도, 전쟁 상태라거나 전쟁의 위협이 있다거나 국내 정세 불안이나 그 밖에 어떤 비상사태라도 고문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폭력적이고 어리석은 정부의 타락성이 사드 (Marquis de Sade)의 사디즘 (Sadism)과 마조히즘 (Masochism)의 중간 사이라고 말한다면 사회고발적인 주제가 성적으로 비하되어 보일 것이다. SNS나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은 편집되지 않는 삶에 대한 앤디워홀의 이상을 중계하면서 에로틱한 삶까지 디지털 사진이나 비디오로 포착해 가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인간의 관음성을 흉내 낸다. 무력하게 결박된 벌거벗은 인간의 돌출적인 욕망은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수감자들의 자위행위나 오럴섹스와 같은 변태적인 수치심을 이끌어내도록 가해자들의 가볍고 악한 심리를 초대한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억제된 욕망을 뒤집어가며 실망스러운 재미로 시작된 폭력의 환상이나 실천이 잔인한 오락거리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극단적 사도마조히즘적 욕망의 실천을 청춘의 장난이나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인간의 잔인한 만행을 멋지게 여기는 생각 없음을 애원하는 사회는 수치심 없는 문화를 보여준다는 손택의 말에 맞장구를 쳐본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의 섹스 비디오가 조루가 되었던 한밤에 한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시각적 약효가 떨어지면 흥분이 급격히 사라지듯이 한 국가나 정부의 실책적인 상황은 스크린에서 지워질 수 있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며, 사진으로 소고 되는 습격적인 사건들은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혹은 거만한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소국주의의 비겁한 응대까지도 분개하게 만든다. 디지털 거울의 방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바는 끝이 없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멍청한 사건들에 집중되도록 입맛에 맞게 사진과 글들을 검열하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편집국의 무지까지도 파괴해야 한다는 멈출 수 없는 자성일 것이다.        

   



III. 투쟁하는 독자


"문학은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다."


의미심장하고 개괄적인 말은 동굴처럼 깊고 어둡고 음침한 방을 형성한다. 독서와 토론으로 형성된 사색의 세계는 말하는 자와 경계를 가진다. 독립된 목소리를 가지는 문학의 명예란 "다른 한편"과 "다른 것"을 생각하는 다양성에 대한 숙고를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심사를 열어주고 변화의 열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손택은 역설한다.


 번역성(Translatability)에 근거한 문학은 가독성과 운문성에서 원본보다 감각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읽어온 동서양의 다른 세계관은 빼어난 번역이 아니었을 경우에도 원작자의 풍부한 이야기의 본질을 해치진 못했다. 다만 개인적 경험에 따라 이해도는 차이가 날 수 있고 모국어로 변환해 언어로 들리는 상황에도 감상이 덜할 수는 있다. 번역된 문학에 대한 반동적인 생각은 언어의 차이로 다른 층에 나눠 사는 바벨탑 속의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며, 다른 나라로 떠나는 정신적인 여행의 티켓을 손에 쥐어줄 것이다.


  "원칙에 대한 행동"에의 연출법은 정치적 행동이며 모든 투쟁이나 저항은 구체적이고 도덕적 상상력의 중심에서 용기 있는 실행력을 갖춘다.


 독일 서적출판조합 평화상(Friedenspreis) 수상 연설인 <문학은 자유다> 섹션은 손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리된 단락이었다. 민주주의, 자유, 문명의 이름으로 확산되는 진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과거의 유럽보다는 새로운 토양인 미국에서 자생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낡은 것'으로 대변되는 과거, 지혜, 기억, 슬픔, 현실을 담고 있는 '지나간 것'과 활기, 낙관, 맹목적인 생물학적 갈망, 화해할 수 있는 치유력인 망각이 존재하는 '새로운 것'의 대립은 극단과 공포의 세기에 개선주의(改善主義)적인 원칙을 상기한다. 문학의 임무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진술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문화가 진화하고 상호 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살아있고 죽어있는지에 대한 인간반응의 역사이다. 미국지배의 현실에서 양극화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원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선호하는 손택은 문학이 언어와 서사를 가지고 형상화된 기준을 제공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전달하며, 우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말한다. 폴란드인과 유대계 리투아니아인 이민 3세대인 수전 손택의 고백은 히틀러 지배의 토양을 만들어냈던 괴테시절, 유대인들의 헌신이라든지, 그녀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내전에 관한 의미로운 발설을 만드는 이유와 전쟁에 대해 지속적인 반대를 감행하는 행동의 근거를 제시한다. 문학은 우리에게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하는 여권이며 국가적 허영이나 속물주의, 알맹이 없는 교육과 결함 있는 운명과 불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이었음을 그녀의 일생을 통해 증명하면서 독서와 내성의 가치를 기르는 문학은 자유라고 외친다.


 소설가와 도덕적 논리에 대한 나딘 고디머 강연, <동시에 At the Same Time>는 수전 손택의 평론 모음의 영어 원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녀의 말은 기억해 둘 만하다.


 " 단어를 사랑하고 문장을 두고 고민하는 것.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


 근래 한국 작가들의 소설이나 문장들에서 받는 인상은 경험치가 얕고 가볍고 자극적이며 개인적 감상에만 몰두한다는 느낌이다. 잡다하고 의미롭지 않은 언어를 구성하는 작가들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하락시킨다. 문학적인 관심이 과거나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현재에 가중감을 갖지 않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라고 슬며시 말해본다. 진지하지만, 냉소하지 않는 진지함을 가지는 것은 대상에 대해 개선할 태도이긴 하다. 과거의 억압에서 성장했고, 세상에서 사유를 시작한 상태라면 글을 쓴다는 것이 앎의 방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대중적인 문화가 현실을 단순화하고 지혜를 무시하라는 경박한 언어를 호소하지만, 지적인 상태에서 문학의 명징함과 열정에 대한 작가의 책임을 기억한다면 시간의 세계에서 우리의 경험이 제공하는 본질적 구조를 파악하고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잠재적으로 풍요롭도록 이해를 갈구해야 한다.


  "소설가의 이해는 공간적이거나 시각적이라기보다 시간적이다."


 소설이라는 매체가 시간 감각의 표현이라는 손택의 말을 들으며 투쟁, 갈등, 선택의 시간적 싸움에서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 떠올랐다.


 "소설은 만들어지고 경험되고 완성되는 여행 그 자체이다."


 손택의 문장 해설을 음미하면서 가설적인 총체적 경험의 결말조차도 마술적으로 수렴하는 문학이 완결된 종결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기억해 본다. 서사가 가득한 이야기의 보고(寶庫)인 소설은 고통에 대한 인식과 부자연스러운 상상력조차도 해체하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할 권리를 바탕으로 윤리적 시간 안에서 존재의 임무를 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실과 정의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한다면 '진실'을 택하겠다는 손택의 말은 언제나 가지의 명제에 부딪히고 갈등했던 젊은 날을 상기시킨다. "악법도 법이다"라며 퇴보 없는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는 사회적 질서와 법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진실과 정의를 증명할 수 있었다. 진실에 허덕이고 진실에 상처받으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선택하는 예술가들 또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말해야겠다. 내적 성찰의 힘이나 열정적인 지적 추구, 자기희생의 코드와 무한한 희망이 가득한 손택과의 문학적인 산책은 언어적인 정리에 소홀했던 과거의 시간들까지도 보듬으면서 새로운 파괴를 향해 나아가라고 내 안의 자유를 격려한다.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의 자유로운 동시성이 살아있는 문학적 향기를 가지고 낡은 것에서 새로움을 보는 시간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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