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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29. 2024

SUMMER OF '42

나의 여름은? 그 남자의 초상

[Summer of '42, 1971] MOIVE IMAGE PHOTOSHOP EDITED by CHRIS


<42년의 여름>, 제목이 선사하는 묘한 향수는 영화 <Summer of '42>를 펼치는 동시에 급격하게 터져 나온다. 한 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의 중심에서 더위에 늘어진 몸을 재촉하는 세월은 팽팽한 긴장을 버리고 내 이마에도 한 줄기 시름을 얹어놓는다. 폭염이 가득한 섬은 그때처럼 Celsius 42를 가리키고 있다. 15년 전, 마음에 폭풍이 불었던 그 해를 기억하는 남자를 따라, 추억을 거스르는 여행에 동행해 본다.


마시멜로우를 말랑말랑하게 녹이면서 되돌아간 열여섯 여름. 해변 초소를 불시에 습격하던 두 명의 장난꾸러기 친구들의 관심사는 유치함, 그 자체다. 여자, 섹스, 놀이. 열 두 단계로 나누어진 계획을 따라야 반드시 섹스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는 돌콩만 한 가슴엔 성적인 호기심이 생의 전희로 온몸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여기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사랑을 탐험하고 싶은 한 소년에게는 성숙의 시간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준비되어 있다. 소년들에게 그 해의 여름은 정말 아름다웠을까?


나는 영화관에서 틀어주던 베티 데이비스(Betty Davis)의 <현재의 여행객 | 나우, 보이저 Now, Voyager 1942>를 보면서 언덕 위의 집의 그녀와 스칠 때, 뱃고동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퍼지는 소년의 심장박동을 들어보고 싶었다. 살아있음! 그래, 열정적으로 살아있고 싶다. 어리석고 서툴고 무모할지라도 지쳐버린 눈물보단 당혹스럽지 않다. 혹은, 묵은 먼지로 넘치는 다락방에 머리를 처박고 아름다운 나체를 생각하며 다리를 건들건들 떨고 싶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사춘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몸과 마음을 훌쩍 크게 만든 어느 날의 여름과 소꿉친구, 과거로의 여행 티켓을 쥔 첫사랑이었으니까.


로버트 멀리건(Robert Mulligan)이 그린 질풍노도의 풍경은 전체적으로 새벽에 찍은 듯한 느낌이었다. 자글거리는 파랑. 서서히 깨어나는 기지개지만 미명을 벗지 못한 어두움과 새로움을 받아들인 염원의 기운을 섞은 여름 새벽, 마치 폭풍전야와 폭풍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듯 격정의 떨림과 불안한 태동을 동반하며 다가오는 섬으로의 휴가는 상상만 해도 아찔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적적함이 감도는 도시에서 태우지 못한 혈기를 그곳에서는 마구 내지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언덕 위의 집에서 처음 만난 그녀. 한순간 가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혼란은 새우 덮밥이나 랍스터, 장어구이로도 달랠 수 없게 소년을 꽁꽁 옭아맨다.


"당신을 좋아해요."

- 나도 네가 좋아.


마음끼리 안녕하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 약국, 정육점, 극장, 시장, 도넛가게, 한적한 거리. 그녀 대신 무거운 식료품 봉지를 운반하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뜨거운 블랙커피에 혀를 데면서도 그녀에게만은 무너져버리는 나의 미소. 그러나 이미 한 사람의 마음에는 사장된 다른 이가 누워있고 애써 그녀의 사랑을 담으려던 소년은 슬픈 날에 가볍게 안아주다가 서로를 품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유년의 상처로 남았던가. 울타리에 기대 준비도 없이 커버린 소년을 보며 갈대로 가려진 언덕을 나홀로 내려오고 말았다. 남편을 대신한 존재. 온전하게 그일 수 없는 껍질은 42년의 여름에 묻어두고, 때로는 불에 덴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때로는 미약한 자신을 그대로 직시하도록 질풍의 파도 앞에 그 아이의 침묵을 요구할 테니까 말이다.


나의 괴로움과 번민은 밤마다 잠을 깨게 만들었던 사춘기의 성장통처럼 어느 날에는 사라질 것이다. 제대로 추억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주어진 삶의 시간을 한 톨도 남김없이 꼭꼭 먹어치워야겠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직시하면서 가슴에 채워야 할 것은 오롯이 담고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보내야겠다는 다짐이 밀려왔다. 파도도 치지 않는데 창문 밖 자동차가 내는 소음이 파도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검푸른 바다의 호흡을 거칠게 뿜어내는 저 빗소리와 함께…


2005. 6. 27. MONDAY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파도 소리를 닮았다.

도시에서 바다를 경험한다!

머리를 적시는 비는 바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년의 눈망울과 떨리던 흥분이 기억난다. 조용히 소년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아, 저런 감정이라니!" 혼자 중얼거렸다. 가끔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을 보면 첫사랑이 주던 파란색에 허우적거다. 언젠가 꿈에서 한 청년을 보았다. 선명한 기억이 가시지 않아서 꿈을 적어놓았다.




그 남자의 초상


짙푸른 안개로 뒤덮인 섬이었다. 어둑한 숲길 사이로 허름하고 조그만 상점이 보였다. 그곳의 주인은 귀가 먹고 기력이 쇠약한 노인이었다. 쪽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선 나는 손짓발짓으로 동행할 사람을 구한다는 시늉을 했다. 노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아들을 불렀다. 고기를 담을 망태를 들고 내가 앉아있는 곶으로 다가온 남자는 검고 마른 듯한 몸매에 콧대가 반듯했다. 검은 눈망울이 해맑은 청년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내게 살갑게 굴었다. 닳고 닳은 뭍 소년들의 궁금증과는 다른, 텅 빈 구석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농밀함인지 친밀함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애무를 동반하면서.


"너 정도면 좋아하는 사람들 많을 거야. 그런 이야기 안 들었어?"


그는 여자를 구경한 적이 별로 없다고 했다.


“사귀면 되지?”


고개를 저었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네 또래 아이들이 많이 있단다. 섬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니?”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좋은데요.”


태양이 지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철썩거리는 파도는 가녀린 비명을 냈다. 시어 빠진 그을음을 내뿜는 바다가 취기를 몰고 왔다. 눈을 감고서 아무 곡조나 흥얼거렸다. 갑자기 등이 따뜻해졌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함께 살래요? 떠나지 말아요.”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귓바퀴를 맴돌았다.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머리를 기댄 채 묵묵히 파도소리를 들었다.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떴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와의 잠자리가 생각났다. 그와 이틀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떠나지 말고 함께 살자던 그 사람과 헤어지기 싫었다. 어둠이 몰려왔을 때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에게 이대로 안겨있으면 영영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 좋았지만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본 것은 그의 영혼이었을까? 십 년 전의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2005. 12. 11.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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