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The way to know the truth 진실
박사학위를 딴 제이콥 싱어는 우체국 직원이다. 월남전 파견 후 그의 기억은 도난된 과거를 찾아 우편을 띄운다. 발신자가 없는 편지들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꿈은 혼란을 거듭한다. 죽음의 위협, 악마들과의 접촉, 흥건히 젖은 땀. 폴을 만나면서 지워진 전쟁의 참상을 더듬어가는 그가 타고 갈 사다리의 끝은 어디인가. Peccant. 지옥에서 불에 휩싸이는 것은 인생에서 포기하기 싫은 부분이다. 기억이나 애착 같은 것이다. 모두를 태우는 것은 형벌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살려고 버티면 악마가 인생을 빼앗는 걸 보게 된다.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면 악마들은 천사가 되어 삶을 자유롭게 해 준다.
1971년 메콩 델타(Mekong Delta). 생화학 실험이 이뤄진 베트남 전쟁에선 극비로 진행된 환각제 공포가 살포된다. 사람을 자극시키고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약이 삼각지에 뿜어진다. 환각제의 이름은 무력의 사다리(LADDER). 그것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지렛대인가. 환영의 그림자는 적(敵)을 사다리 밑으로 추락시키겠다는 냉혈한 침묵에 잠겨 있다. 정글의 원숭이는 서로의 머리를 부수고 눈과 꼬리를 뜯어먹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 놓인 전우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전쟁포로와 베트콩들. 자폭을 부르는 참극. 환각제 BZ는 연무의 어둠에서 사람들을 어디로 몰고 가는 걸까.
제이콥 싱어의 삶에 대한 고집은 영혼으로 남아 세상에 머물러 있다. 전쟁의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던 같은 공간 내의 친우들의 살육은 육신을 떠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밧줄이 되었다. 환상과 피의 얼룩 속에서 수십 년을 이어간 삶의 진실을 알고 난 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었는가? 전쟁은 표면적인 시간에서는 흔적을 지울 수 있어도 인간의 기억 속에선 끔찍한 악몽으로 영혼을 압박한다. 추악한 괴물과 이별하기 위해선 스스로 잊는 수밖에 없다.
전쟁영화는 지루하다. 대부분 보다 보면 잠으로 때운다. 하지만 참혹함도 눈감아버린 밀폐된 상자 안에서 많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우리의 과거와 겹쳐진 베트남 전쟁은 우리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참전을 했으니까 현실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또다시 이라크로 발걸음을 가하고 있는 건 어떤 후회를 부르고자 함인가.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재킷 Full Metal Jacket>이나 프랜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Platoon>, 비디오로 본 <굿모닝 베트남 Good Morning, Vietnam>, <디어헌터 The Deer Hunter>…. 모두들 전쟁에 대한 괴롭고 핏물이 가득한 시각을 비틀어 얼굴에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갖다 댄다.
남에게 총질을 하는 행위는 외부와 싸우는 혈전이 아니라 내부의 마귀와 맞서야 하는 참극이다. 지구촌 어딘가에선 지금 이 시간에도 <브레이킹 뉴스>라는 제목으로 수십 편의 전쟁 영화가 판을 벌인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 간의 보도되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죽은 사람도 기억하게 하고 그 안에 벌어진 일도 기억하게 하는 서늘한 기록들이 소름 끼친다. 그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폭탄과 고함에 한쪽 귀를 먹었다. 그래서 연막을 벗어난 수십 년 후에 피로 낳았던 나의 외침도 거부한다.
2004. 9. 25. SATURDAY
일하는 근처에 <JACOB'S LADDER>라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있던 그곳을 지나쳐갈 때마다 전쟁에 시달린 듯한 환각적이고 울렁거리던 화면이 생각났다. 하얗고 깔끔한 외관과 달리 야곱의 사다리는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 망각을 원하지만 망혼이 머물러있다가 실족할 수 있는 위태로운 계단으로 연상되었다. "아이러니한데..." 간판을 볼 때마다 동명의 영화가 떠올라 중얼거렸다. 한참 그 길을 가지 않았다가 언젠가 보니 호기심 어린 물음을 던지던 그곳도 사라져 있었다.
육신과 영혼을 잇는 야곱의 사다리는 고통과 기쁨이 함께 하는 연결 통로이자 지상과 하늘 사이에서 천사의 오르내림을 통해 현재의 삶이 변화되는 기점이다. 현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한다.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오직 발전만을 기본 윤리로 삼는 오만한 세계는 희망이 없다. 전진을 위한 폭력과 이민족 지배를 축복받은 자의 선의로 포장하는 현대 기독교 사상은 자신과 동일자의 존재로 타자를 바라보기보다 계단 아래의 존재로 구분하는 시각을 은연중에 내포한다.
각자의 존재는 형성된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대상을 해석할 수 있고 개성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바라볼 자유는 있지만, 하나를 점령하고 소유하기 위해 야기하는 부정한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절대화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행위에 대한 원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이 일률적이면 보기가 거북스러울 때가 있다. 살과 피가 튀기는 전쟁 영화가 현실에서 가득한 요즘, 뉴스를 보기도 영화를 보기도 힘겨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