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책장 사이에서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아포리즘이 뭔지도 잊고 있었는데, 그런 말이 불쑥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명상의 길은 너무 멀리 있고 에세이는 건방져서 힘이 들었다. 말없이 거리를 달려보고 싶던 차에 참으로 어린 내가 있었고 무척 반가웠지만 그때의 선택을 안기엔 현재 난 비틀려 있다. 뱅뱅 돌려진 글을 좋아했고 그렇게 마무리하는 걸 즐겼는데 그건 마술에서 깨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의 저항이란 걸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술을 즐긴다. 가벼이 손을 놀리고 머리 좀 쓰는 것 밖에 모르는 마법으로 환상이 지속될 수 있다면 놀이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2005년 3월 2일 수요일 새벽 두 시,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를 읽고 푸념을 적은 속마음은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른 뒤 피로한 입김을 뜨겁게 내뿜는 소의 혀처럼 푸닥거리로 늘어져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글을 적는 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탐색의 과정이다. 언제부터인가 집중할 수 없는 감상이 밀려오면 타인의 글이 잘 읽히지 않는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더 이상 받아들일 게 없으면 자신의 말을 내뱉어야 하는 것이 대칭적인 호흡의 원리다. 니체를 읽다가 그의 말이 고매한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성현들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나보다 훨씬 어린 젊은 청년의 토로같이 들렸다. 눈을 괴롭히는 안질로 인해 보는 것을 멈추고 쓰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고백 속에서 편안하고 순탄한 상태에서는 창작이 일어나기 어렵고 한계점이나 장벽만이 새로움을 가져오는 역설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앞날의 계획을 세우고 현실적인 상황에 부딪히면 기대와 달리 현재의 모습은 각박하다. 실행할 조건들이 부족하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사라져 있다. 살기 위해 꾸준히 글을 쓴다는 니체는 젖은 나무처럼 서서히 불에 태워지는 고통의 순간이 철학자를 심오하게 만들며 인생을 하나의 문제로 의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던 한 인간의 나락으로부터의 회귀, 심각한 질병과 심각한 회의에서 돌아온 자는 새로 태어났는지 궁금해진다.
AMOR FATI 운명애
"새해가 밝았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어야만 한다. 나는 세상의 필연성을 아름답게 바라보고자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운명애(Amor Fati), 앞으로 이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수단이 운명애다. 우리의 영혼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가 필연적으로 덮쳐오더라도 이를 감내할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것이 나의 사랑이다! 추한 것들과의 전쟁을 멈추겠다. 바라보지 않겠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며, 앞으로 나는 긍정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모든 운명을 사랑한다. 이것이 나의 가장 은밀한 본성이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 Ecce homo,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삶은 표현된 결과물만큼 심각하지 않다. 나는 심각한 인간은 아니다. 심오하다는 말은 마음에 든다. 그런 표현이 어울리려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 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물건을 제작하고 영상을 만드는 작업들은 나를 알아야겠다는 니체의 결심과 일맥상통하다. 진리에 대한 회의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더 진실하다. 모든 것의 절댓값은 현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생각들을 머리 밖으로 몰아내는 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를 가시적으로 펼쳐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느니 모두가 읽을 수 없는 책을 쓰고 싶다"는 니체의 열망은 모든 원대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소망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은 자기만의 생을 반영한 고유하고 독창적인 전유물이다. 전투적이고 열정적이고 열렬한 독자에게 읽혀버리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상대방에게 속박될 것이고 불확실한 미궁에 함께 나뒹굴 것이며 영민한 지성으로 광활한 바다를 같이 표류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엇갈려 누군가의 사후에나 혹은 한참 뒤에 발견되는 사람들은 비슷한 영혼을 갖고 있어도 시간적이나 물리적으로 함께 하기는 어렵다. 결국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ART 예술
"예술은 삶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움직임이며, 평범한 삶에서 도피할 수 있게끔 사람들을 자극하는 위대한 유혹이다. 예술은 삶을 부정하려는 모든 의지를 짓누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예술은 인식하는 자를 구제한다. 예술은 행동하는 자를 구원한다. 예술은 고뇌하는 자를 구원한다. 예술의 유일한 의미는 삶이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예술이란 삶의 문제다. 예술은 삶을 고양시키는 것을 찬미하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들에 반대해 왔다. 예술이 예술로만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술은 오직 삶을 위해서만, 삶에 근거해서만 존재해 왔다."
《우상의 황혼, 니체 Götzen-Dämmerung, oder, Wie man mit dem Hammer philosophiert,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신성한 의무를 거부하는 사자는 경건한 정신의 위대한 약탈을 감행한다. 나에게 독서는 나를 내려놓고 현실을 점검하는 휴식이다. 작은 우물에서만 맴도는 나약한 정신을 끌어다가 타인의 개울과 강과 바다와 하늘에서 노니는 여행이다.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는 독서가 끝나면 나에게로 몰두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즐겨 찾는 철학자들이 독자를 위해 쓰고 싶지 않다는 고집스러운 말을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만큼은 고정급을 받는 초상화가나 프로필 사진가, 대필 작가, 수선집 오퍼레이터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이런 일이 될 놀라운 사건이나 대박 인생과도 멀고 체험 삶의 현장이라던지 생활의 달인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에 수집되어 가는 삶과 다르다. 나를 만들어가고 찾는 일은 고독한 길을 택한 이상 일생에서 걸어갈 과업이다. 천재적인 영감은 임계점만 넘으면 물 끓듯이 쉽게 끓어오르지 않는다. 대세를 추종하길 거부하는 자부심이 있어야 작품 속에 자기만의 색이 드러날 것이다. 자신을 위해 나를 기록하는 자가 있고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를 기록하는 자가 있다. 철학과 예술은 고통을 전제로 하고 우리는 그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해 몸부림친다. 각자의 '지금'과 '현재'는 누군가에게 지나간 과거이며 존재한 경험이다.
"두려움은 축복이다. 예술은 전달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전달의 재료 중에 두려움만큼 위대한 재료는 없다. 인생을 추락시키는 강력한 적수의 등장에 인간은 재난과 공포로 감정이 마비된다. 이 마비된 감정에서 깨어나기 위해, 용기와 자유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예술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래서 예술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거둔 승리란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이며 예술은 그 두려움을 찬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상의 황혼, 니체 Götzen-Dämmerung, oder, Wie man mit dem Hammer philosophiert,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이것이 그대가 말한 인생이었던가?
그렇다면 생이여 다시 한번!
자신이 극복해 낸 사건만을 말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경험의 가치는 벌어진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겪고 그것에서 벗어난 인간의 몸에 새겨져 있다. 가끔 경험을 쓰는 일이 부끄러워질 때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묻는다. 평소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알아볼까 두려운 얼굴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힘이나 실력을 겨룰 때 호기로운 사람들은 계급장을 떼고 한번 붙자는 말을 하곤 한다. 사람들끼리 편리하게 부르는 명칭이나 규칙을 위한 기호는 어떤 대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창조하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가진다는 니체의 의견은 묵직하게 가슴에 꽂힌다. 창조가 진정한 권력인 반면 권력은 지배가 아닌 것이라면, 자기 권력의 충만한 상태는 초인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해야 할 말을 잊고 사는 짐승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들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다.
삶은 맛볼수록 쓰디쓰다. 달콤 쌉싸름한 인생을 꿈꾸는 자들은 부모와 같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 그들의 그림자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위에서가 아닌 아래에서 태동한다. 그래서 조용히 숨겨두었던 역린을 건드리면 역류하는 쓴 물이 올라온다. 추억이 고름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차마 얼굴을 닦지 못한 채 동분서주로 뛰어다니는 발바닥은 뜨겁게 갈라져 있다. 삶에 다가가고 그 의미를 해독하기 위한 의지의 불꽃은 아직까지 꺼지지 않았다. 구부러진 진리와 둥근 시간을 거쳐가며 기나긴 시대를 잠들기 위해 하루종일 눈뜨고 있는 삶에게 경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