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보수 THE WAGE of FEAR> 공포의 값어치
몸을 휘감은 문신, 팔뚝이나 발목에 새긴 수형번호, 선천적인 반점으로 칭하는 낙인(烙印)이 있지만 인간의 물욕으로 낳은 낙인은 가히 무섭다. 현실에 커튼을 치고 타인을 몸종으로 부려대는 탐욕스러움은 몸 밖으로 풍기는 살기(殺氣)와 마찬가지다. 평범하고 무식한 인종들의 조작된 변명을 듣다 보면 불에 덴 아이들이 불을 보면 겁먹는 것처럼 비슷한 유형의 식인귀와 마주치는 듯 메아리치는 공포가 밀려온다. 새콤한 레몬 시럽이나 달콤한 바닐라 시럽, 쌉쌀한 커피와 고소한 아몬드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면서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단순함을 맛보고도 한 가지만을 생각하면서 기뻐할 수 없다는 것. 복잡한 테두리에서 커버렸단 사실. 하루 걸러서 발생하는 인성에 대한 경종. 몇 십억을 짊어진 호기로 식은땀을 흘리는 떠돌이 운전수도 되지 못하고 돼지 젖가슴처럼 더덕더덕 붙은 삶에 대한 회의가 밀려올 때면 온몸 여기저기서 제거하지 못한 빈혈이 돋는다. 게으름뱅이처럼 보이기에는 연명할 투정이 흘러넘치는 빈털터리 신세. 짊어진 이 무게가 단순히 우유통에 담긴 니트로글리세린 한 트럭이라면, 공포의 보수라도 받을 텐데 목숨을 바친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절고 있는 가슴 한편에는 시체처럼 나동그라진 삶의 의미뿐.
사실 공포에 무슨 보수가 있는가. 인생은 흡혈귀의 그물에 걸리기까지 접근이 쉬운 비행장이었다가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어렵고 미로에서 못 빠져나가면 말라죽는 끈끈이 죽 같은 감옥이다. 굶주림이 인간의 눈을 뒤집히게 만든다더니 기근한 고질병은 몸을 죽이지만 못생긴 불청객이 싸질러 논 욕심의 굶주림은 영혼을 죽인다. 철학자처럼 어렵게 생각한다면 인생은 운명의 시험대가 되는 구정물 속의 이야기겠지. 서부의 사나이가 되는 변술이 필요한 걸까? 모자를 쓰고 말을 타고 담뱃불에 인생을 지지는 총잡이. 총질 한방에 모든 것이 행복해진다고 주문을 외우며 한 건 처리한 걸로 새 인생이 펼쳐질 거라 꿈을 꾼다. 그런데 반항의 시절이 청춘의 값어치라고 인정되는 사춘기도 아니고 삶에서 여전히 수영 실력은 제로인 채로 이성적으로 상황에 대응하라는 책 속의 사실만 반복해야 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어째서 감정은 그림처럼 동강 나지 않는 것이며, 정신이 분열하기엔 때가 이르다고 고삐를 늦추는 걸까? 알고 있는 가치들이 무너져버린 뒤에 다시 쌓아보려 노력해 봐도 시선을 제대로 맞추려는 고개가 자주 꺾인다. 하루에 몇 번이고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정말 이게 무슨 짓거린가 싶다. 도망갈 수도 없고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고 제시되지 않은 내일과 삭아버린 인내만을 남겨두는 것은 간접 살인이다. 사막의 열기에 뜨겁게 휘어지는 엿가락처럼 자성만으로 곧을 수 없는 구토한 현실은 넘볼 수 없는 곳에다 울타리를 쳤다. 주변의 온도만으로 쉽게 변하는 욕심은 그만큼 파괴적이다. 같이 끓지 못한다면은 홀로 터져버릴 것이다.
저 물건에 비하면
난 위험하지 않아,
절대 위험하지 않아,
기름 타는 냄새
살이 썩는 냄새
의식이 사라지는 냄새가
위험한 거야.
살기 위해 기억을 지피고 있어,
울타리 너머 무엇이 있었는지를
고장 난 펌프는 무엇을 끌어올리던가!
바람 부는 이 땅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 아무것도 없었지.
계속해서 머리가 울렁인다. 이럴 땐 뇌에다 니트로글리세린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다 날아갈 텐데. 연상은 나의 일부며 몇 안 되는 유희의 즐거움이지만, 봤던 걸 되살려봐도 도박 같은 매혼(賣魂)에 미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망각보다 더 위험한 일임을 절실하게 되새기게 된다. 진지하게 죽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력은 놀랍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Henri Georges Clouzot) 감독의 영화 <공포의 보수>에는 강력한 폭발 물질을 운반하는 뜨내기들의 공포가 화면 전반에 흘러도 인간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은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깨끗하게 면도하려다 흘린 한 방울의 피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가벼운 담뱃재의 후폭풍이, 검은 해저에서 범벅이 된 망가진 두 얼굴과, 울타리 너머로 굴러가는 공포의 단순한 보상이 긴 여정의 끝에 남는다. 몇 년 된 우정, 돈에 생명을 걸었던 희망, 부를 위한 성취가 아닌 죽음만이 살아있다.
극동의 찌는 열기에 검은 보석을 찾아 들어온 티켓이 백 배로 늘어난 것을 행운의 표적으로 삼는 승리자의 웃음은 건조한 바람을 탄다. 춤을 추는 불씨가 되어 허무하게 메아리치는 검은 연기들. 불타버린 티켓은 누굴 태울까? 뼈도 태우는 불인데 가루가 된 지폐는 너를 어디로 운전해 갈까? 건조하게 말하면 사실이 잘 저장될지도 모른다. 미라의 효과처럼 파피루스의 흔적을 들추듯이 기간산업을 성공리에 마친 배불뚝이 사장처럼 담배를 물면서 슬픔을 거들먹거릴 기회가 올런가. 감정이 없는 화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나아질까 했는데 심장을 자극하는 배앓이가 뇌수를 가르고 있다. 그곳엔 공포가 울고 있겠지. 보상 없는 공포가 영원한 절벽을 타고서 울타리 너머를 그린다.
2005. 4. 8. FRIDAY
지글거리는 흑백 영화는 피 또한 까맣고 파괴되는 풍경도 까맣다. 공포를 주 재료로 삼는 인간의 삶은 도전 품목이 위험할수록 비용이 올라가고 안전을 추구할수록 저비용으로 내려앉는다. 하드 캐리한 마초적 삶에 길들여진 사회는 도전적인 인간을 멋진 영웅으로 묘사한다. 아버지 세대가 그랬고 선조들의 삶이 그러했다. 밑바닥에서 일하다가 사회와 가정과 자식의 발전을 위해 등이 밟혀야 하는 세대.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젊은이들은 없다. 고위험군의 3D 직종에 종사하거나 스스로를 희생하여 삶의 테두리를 바꿔보려는 자는 헛된 수고를 한다고 치부하기까지 한다. 권리와 복지는 누리려고 하나 책임과 노동은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 시대는 내리막길로 향하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절벽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사회적인 공포심을 만드는 가난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은 실행자의 입장에선 피곤하고 힘든 시도이다. 안전하게 기반시설을 만드는 기본은 고비용을 요구한다. 삶의 형태가 불균형적일수록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은 평형점을 만들기 위해 고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공포를 떨친 인생의 말로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과감하게 비틀거릴 수 있는 마지막의 허무는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