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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ERTINE, ROCHESTER

<리버틴, 로체스터> 그 몽상적인 자유로움

by CHRIS
[John Wilmot 2nd Earl of Rochester, le dernier des libertins]


사랑한 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면 그것의 다른 말은 책임일 것이다. 자신이 벌인 사소한 일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신감이 결여된 인간 군상 속에서 널린 자유를 포기하고 사랑을 택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과연 모든 것을 걸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불꽃같이 소중한 재능을 나누고, 그 사람을 위해 버리고 싶었던 무료한 오늘을 이어가길 원한다면, 그 사랑의 의미는 순간을 이어 만든 강렬한 열정의 소산인 연극처럼 산발된 아름다움을 지녔을까?


나의 깊은 내면은 한순간도 방탕을 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태초의 생명과 연결될지 모르는데 따른 의식적인 거부나 다소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방해받기는 했어도 가슴속에 응어리지게 달라붙은 열정이 늦여름 불어오는 한줄기 가을바람처럼 강렬히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면 세상의 구속이나 금기는 뒤로하고 친밀한 것들에 안녕을 고한 뒤 뜨겁게 저지르고 싶다.


시 한 소절 끄적거리고 술독에 진창 빠져 여자를 주무르는 것이 17세기 한가한 영국 귀족들의 로망이었다면, 시답지 않은 카드 한 판 치고 술독에 진창 빠져서 애인을 주무르는 것이 오늘날 졸부들의 로망일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다. 세상은 어리석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리석다. 어둠의 무대에서 목소리가 미약한 광대는 군중의 야유 속에 퇴장하였다. 혼란함에 절은 얼굴로 나를 찾고자 하는 이가 있어, 영악한 당신이 손 내밀자 말없이 덥석 잡아버렸다. 진실한 글을 쓰고자 하면 거짓을 말하는 손에서 값진 보석을 놓아야 하는데, 마음이 가난한 우리는 황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랑이 과해지면 성기와 얼굴에 열꽃이 핀다. 나는 사랑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LOVE. 진흙탕 위에서 춘화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딜도를 머리에 쓰고서 말짱한 다리 두쪽을 절어가며 오줌을 쌀 것이다. 할 말도 다 못 하고 극이 끝나 아쉬웠다. 예수가 십자가에 양손 박은 서른셋의 나이에 똑같이 관속에 눕길 자청하니 어금니로 씹기엔 어린 양도 아니고 질긴 퇴물이었지만 거룩한 신들이 이 타락한 영혼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생선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올 것 같은 로체스터 백작의 까만 입술이 슬퍼 보였다. 영화 내내 음악은 감미로웠다. 나의 로망은 몽상을 끝없게 하는 어두운 밤, 모르는 사람과 격렬하게 사랑하며 잠드는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알고 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만나지 않으리라.


2007. 9. 11. TUESDAY



사랑하는 단어 '자유', 열정을 토해버린 자유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국에서 <리버틴 THE LIBERTINE | Rochester, le dernier des libertins>으로 개봉된 로체스터 백작의 방탕한 일대기는 구속을 탈피한 시인의 예술적인 삶에 대해 바라보게 했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의 결과가 아름다운 작품이라면 썩어버릴 몸을 던져가며 자신을 희생해야 할까? 방종, 후회, 죽음, 소멸. 로체스터 백작의 예술에 대한 기행은 흥미롭고도 안타까웠다. 절대 잊히지 않을 듯이 뇌리를 울리던 재능 있는 인간에 대한 아쉬움 또한 세월이 흐르면 희미해지는가 보다. 우리들이 잡고자 하는 시간은 감정의 어느 한 소절에 머물러 있다.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아직도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일지 미지수이지만, 어두운 밤 시궁창 속에서 피어나는 삶에 대한 의지는 그 냄새가 역하고도 강렬해서 잊히지 않는다. 검게 흘러내릴 듯한 사랑이나 검은 망토를 쓰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은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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