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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

고통

by CHRIS
[See the Pain] 2008. 6. 17. Beijing. PHOTOGRAPH by CHRIS


쇄골과 가슴뼈 사이


일 년 전인가 갑자기 한 달간 한 곳만 아팠다. 사고를 당하거나 일 년에 감기 한 번 크게 걸린 거 빼고는 몸이 아픈 적이 없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누군가와 만났을 때도 심장만 쇠 곡선을 그렸지 뼈까지 뜨겁게 저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또 그렇다. 오른쪽 쇄골하고 가슴뼈 사이가 아프다. 아침부터 한참을 문질러봐도 별 나아지지 않는다. 괜찮아지려나.


난 시간에 따라 성격이 무척 많이 변한 인간이다. 미친 듯이 놀러 다닐 땐 마냥 밝고 즐거운 얼굴 아래 마음이 컴컴하게 심란했다. 고민이 많았다. 그 코딱지 만한 눈에도 세상 보이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은 "넌 어쩌면 그리 밝고 참 잘 웃냐. 세상이 즐겁냐?"라고 물었을 때도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스스로도 괴리였다. 꼬맹이 속은 우는데 밖은 너무 명랑해서 그것 때문에 잠도 안 왔다. 뽀글이 파마해서 굴러다니면 귀엽기야 했다. 사람 복은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크면서 속마음과 바깥이 어긋나 보였다. 미친 듯이 웃으며 온 사방을 헤매도 웃음 뒤에 가려진 먹구름은 항상 마음을 짓눌러 댔다. 고민하다 냉소적으로 픽픽 대기로 했다. 공부고 뭐고 시큰둥했다. 잠자다가 수업을 듣고 시험은 대충 찍어대고 싸돌아 다녔다. 밤마다 밤새고 담 넘고 자율학습 빠지고 텅 빈 공간에서 연극하고 친구들을 선동해서 놀았다. 신기하게도 선생들이나 부모님 그물망에 한 번도 걸린 적은 없다.

외모도 많이 변했다. 굳이 분첩으로 감싸지 않아도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사진을 찍어도 거울을 봐도 마음을 둘러싼 이 몸뚱이가 내 것 같지 않다. 까무잡잡한 건 여전하지만 꼭 노란 벽에 검댕이 묻혀댄 것처럼 괴기스럽다. 이 삼 년에 한두 번 어렸을 때 친구들을 길가에서 마주쳐도 난 알아보는데 그들은 날 못 알아본다. 옆을 지나도 말이다. 얼굴을 쳐다보고선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친다. 피식 웃으며 투명인간처럼 그들을 지나간다.

생각이라는 걸 처음 했을 때 달을 보며 빌었던 소원 중 하나가 이 세상을 다 느끼게 해 달라는 거였다. 아파도 슬퍼도 고통에 허우적대도 좋으니 한번 다 보고 이 몸으로 감싸 안고 눈감게 해달라고 했다. 부질없는 기도였다. 아직 다 보진 못했으니 이렇게 살고 있는 거 아닐까. 가끔은 묻는다. 평소와 다르게 몸 한 자리가 아플 때 가져보지 못한 느낌이 엄습할 때 이건 어디서 오는가. 확실히 아프고 나면 나무의 흔들림을 더 잘 보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며 세상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욕은 불끈하게 솟는데 다 퍼뜨리진 않는다. 흘러가는 물에다 탈탈 털어낸다. 그래도 잿밥에 오십 년 재 털어낼 만큼은 쌓여있다. 욕을 퍼부어야지 안 그러면 패혈증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잘 볼 수 있을까. 안과 밖의 세상 말이다. 아픔. 고민. 싫은데 지겨운데 계속 볼까.




고통(苦痛)


1. 아픈 자에게서 보이는 세상은 건강한 자의 세상과 현저하게 다르다. 똑같은 공간에 담고 있는 상상의 물건은 양(量)과 질(質)적인 면에서 차이가 난다. 강력한 주사를 한 대 맞은 멍함. 기분 한번 벙 뜬다. 아름답고 신선한 공기. 높다란 하늘. 산들대는 바람. 아픈 뒤의 느낌만큼 멋진 것도 없다. 기억을 놓거나 가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2. 아플 때 머릿속에서 게걸스럽게 쏟아내는 생각들은 놀랍도록 존중받을 만하다. 순차적이지 않고 즉흥적이며 단편적이지만 혁신적이다. 결코 잡아맬 수 없는 섬광들이다. 너무 많은 게 지워진다. 그러나 또다시 생겨난다.


3. 생의 정수(淨水)가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섬광이라면 그 찰나의 시간을 맛보기 위해 아프도록 살아야 할 당위성이 있단 말인가. 자연도 인간도 공기도 무력도 세계도 우주도 병들고 있다. 쓰러져가는 공간에서 무엇을 믿을까.


2004. 9. 14. TUESDAY





아픈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말을 건네기가 어렵다. 그러나 말은 허약하고 적막하고 초라한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위로이다. 듣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를 알 수 없듯이 조그만 소리가 주는 위안은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2013. 9. 13. FRIDAY




여기저기 조각으로 남겨둔 글을 보며 지워버릴까 고민한다. 한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육체적 소속감은 같지만 실체적 자아의 면에서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숨겨두었던 모습들에 연민을 가지면서 시들고 나약한 사념들을 놓아본다. 단편적인 생각을 적어놓고 한참 뒤 말머리를 굴리다 보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차곡차곡 말 토씨하나 숫자하나 담아두던 기록이 광선의 속도로 지나가면 그날의 일을 펼쳐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빡빡하게 살기 시작한 이래로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자신의 아픔에 얽매인 날이 길어지면 타인들이 말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스스로 한 말도 시간에 의해 존재와 분리된 낱말의 객체가 된다.


숨이 찬다. 말할 수 없으면 턱 밑까지 숨이 가빠온다. 말하지 않으면 화병이 도질 것 같은 답답함에 글을 적는다. 신들린 듯이 속마음을 적어놓으면 쓰다가 한 줄 지워버린 말속에서 한숨과 푸념이 길게 늘어져 있다. 상처는 아무는 과정이 필요하고 스스로 잊는 과정도 필요하다. 말을 내뱉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말을 삼킨 사람은 잊지 못하는 것을 상처라고 한다. 때린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맞은 사람은 원망하는 것을 상처라고 한다. 고통은 아픔을 잊지 못하고 그대로 느끼는 상태이다. 고통에서 출발한 상처는 기억에 흔적을 남긴다. 작은 상처에도 크게 소리 지르는 사람과 큰 상처에도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자신 말고는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는 못한다. 고통이 인간을 성숙시키고 단련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스스로 고통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하다. 세월에 스며든 습관처럼 아프지 않은 흔적들을 보며 뭉글뭉글 시절의 기억이 올라오면 가슴이나 머리 한쪽이 저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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