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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HEIGHTS OF DESPAIR

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Pe culmile disperării》

by CHRIS
[Beneath the depths of Sleep]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루마니아는 드라큘라의 고향이다.’ 이 생각이 꽉 들어차 있다. 루마니아 풍경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해보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먹구름이 끼면 피의 바다가 펼쳐질 거란 상상을 떨칠 수가 없다. 전설의 그림들이 그랬고 영화들이 그랬고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유난했던 에밀 시오랑(Emil Cioran), 그도 그랬다. 귀족적인 윤곽에 드리워진 우울한 풍경. 언제나 불면이 가득했다는 것도 나와 많이 닮았다. 접한 글이란 달랑 절망의 끝에서 Sur les cimes du desepoir가 전부라는 것이 단점이지만 말이다. 가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하는 글들을 보며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스스로 너무 어두워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주변의 것들과 닮아가는 인생이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밝고 행복한 그림과 글, 노래에 시선을 두려고 하지만 쉽게 읽힐 뿐이다. 도리어 삶은 다르다는 자각이 강해지니까 선택하는 것조차 심드렁해진다.


스물두 살의 시오랑이 불면 속에서 본 절망은 난해한 언어 속에서 분노한 삶을 떨치려 했던 나의 어린 날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정신상태의 폭발은 불면의 밤을 굳이 청산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다독인 고문실에서의 해방과도 같다고 했던가. 직업이라곤 철학교사직을 가져본 것이 전부인 절대적인 소외자의 부름, 피와 살과 신경이 노래한다는 탁월한 공감은 한마디로 기쁨이었다. 영원한 배움에 놓인 학생이 다락에서의 연명을 통해 깨달은 처절한 사유가 사는 이유가 된다면, 정신착란과 혼동되기도 하는 서정의 극치가 피와 진지함과 불꽃이라면 나도 살만 했다. 힘들었던 낮을 접고는 굳세게 다짐했다. "질병이 던지는 아픔을 보고서도 무감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매일 곪아가고 또 곪아가리라." 그랬었는데 이젠 곪아서 쏟아져버리기 쉬운 물컹해진 살들을 만지게 된다. 고독은 숙성되지 않은 살코기보다 더 질기지만 눈물이 뜨거워지면 절벽에 추락하는 소모감은 화덕보다 더 뜨겁다. 부조리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면서 독한 광기를 들쑤신다.

스물둘이었던 해, "사물의 독만을 맛보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이 있다"는 구절에서 푹 놀랐다.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의 척도를 비웃는 평온한 자들의 부드러운 본성은 이후로 부럽지 않았다. 고립을 모르고 화합을 부르짖는, 의미를 모르고 의미를 추구하는, 소멸을 모르고 생성만 아는 그들의 가식은 퇴폐적인 죽음을 보고 심연에 드리워진 자신을 모른다 할 것이 뻔했다. 잔잔하게 해체됨이 미동을 파괴할 텐데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스치는 바람에 떨림이 없을까? 윗물은 세차기만 하여 깊게 잠기면 잠잠해지리라 여겼던 나는 완전한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두려운 체험의 환기가 확실하게 믿었던 세계를 분산시켰기 때문이었다.

껍데기를 비추며 현기증에 빠지게 하는 해석할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은 놀랍도록 매혹적이었다. 성장기 아이들이 겪는 산만한 몽상, 정리되지 않는 불균형, 연극적인 능동의 우수를 음미했다. 불분명한 단어에 마비된 그 새벽에 불순한 농담에 즐거이 웃었고 텅 빈 낱말에 시선을 주었다. 어리석은 엑스터시와 사악한 발악이 열심히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유독 재미있었다. 순진한 바보였는데 갑자기 인간답다 여겨지는 순간이 있었고 얼마 안 가 영악하게 폐쇄로 돌아가는 원점이었다. 버팅기고 있는 고목이 썩어가야 보이는 생의 고마움인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하루를 접으며 비정상적인 고민에 빠져 들어야 현실의 쓰라림을 잊을 수 있는 취미는 변했다. 과장된 수식어를 붙이면서 유약하게 재잘대는 세계를 얼빠진 환상으로 바꿔버리는 유별났던 마술사는 저주를 여흥으로 바꿔버리고 파괴를 탐미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야수의 날개를 꺾어다 죽음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부메랑을 날렸다. 살면서 죽어야 했었기에 추상을 깨뜨리고 우아함과 결별하고 형식적인 의자에 앉는 것은 그녀가 아는 최고 형벌이었다. 신비로움을 벗고 건방진 동정심만으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절망의 낙관이란 마법적인 감수성이었고 절망의 서막은 애매함만이 혼을 빠져들게 하였다.

나이가 들면 어렸을 때의 언어는 세련되지만 사람의 본성까지 세련되게 변하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곁에게서 추방되고 싶을 땐 유치하고 어렵고 분절된 말들이 좋아지곤 한다. 모난 글들이, 삐뚤어진 형상이, 억센 힘이, 동굴에 잠자고 있던 사랑의 활기를 흡입해 버린다. 잊었던 천진함을 분열시키고 끊임없이 분출되던 환각을 던져주면서 쾌락을 즐기라 한다. 흉측스러운 죽음과도 같아 결코 옹호할 수 없었던 불면은 그렇게 리듬을 타면서 축복이 된다.

맹목적인 충동, 모순과 변덕이 심장의 돌이 된 나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할 만한데도 적당히 안된다. 터무니없는 진리를 비웃고 빈약한 지식의 줄기에 조소하며 오직 불꽃만이 아름답다 말한다. 나, 고백하자면 자조는 감정의 빈곤을 감추기 위함이었고 반항은 빈약한 생을 포장하기 위함이었다. 너무나 너와 같았던, 그러나 다른 슬픔의 감탄이 오늘도 지속됐기에 무한한 퇴보를 거역하기 위해서, 희망을 상실한 아침을 멀리하기 위해서, 꿈을 혼합했고 먼지를 매달았다. 더 이상의 타락은 없을 것이고, 유배된 아픔도 없을 것이며, 반복되는 원칙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기 위하여 삶과 죽음의 무가치한 이중의 리듬을 다시 또 꼰다.

나의 역설이 너를 살리기 위한 아름다운 마법이 될 수 있다면 연약한 환상을 취함이 어떤가. 옹졸한 권태가 부도덕한 찬사와 빌려온 핑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절망하는 것도 어떠한가. 내 비록 지금 너를 강철같이 뚫어볼 순 없어도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은 잊지 않으리라. 그것이 나를 유일하게 유혹한 착각이라 해도 끝없이 널 믿으며 허물어진 존재를 바치리라.


2005. 3. 2. WEDNESDAY


굳게 닫힌 문을 연다. 바람이 불더니 끈적한 액체의 파도가 몸을 덮친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열린 구멍들과 틈 사이로 물밀듯이 쏟아지는 감정의 물결에 속눈썹이 넘실거린다. 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고 자신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이 턱 밑까지, 어쩌면 눈 밑까지, 사실은 정수리를 넘어 온몸에 드리워져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간다. 부력 하는 몸을 내리누르는 정신의 진물은 몸 밖으로 빠져나와 나를 가득 채우고 수면 아래로 올라올 수 없게 감정을 밀봉한다. 가볍게 책장을 열면서 미뤄뒀던 의식의 정리를 해보려 했다가 손댈 수 없는 침묵에 사로잡혔다. 십 년 전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의, 그리고 학창 시절과 그 이전의 기록들을 버리지 않고 남겨놓은 사실은 생을 향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남김없이 드러낸 증거였다. 침묵하는 입술로 은근하게 당신을 설레게 하는 말문이 트이는 날이 올 것이다. 말할 수 없어서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는 자해는 그만두려 한다. 말하지 않고서도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그 길을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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