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ATHY FOR LADY VENGEANCE. 2005], DVD VERSION HARD COVER.
불친절한 혜교씨라는 만화의 첫인상은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정말로 재미있을까? 인간의 뇌는 굵은 글자에 선제 반응을 한다. 긍정은 긍정으로 부정은 부정으로, 일단 명제에 순응, 선택적 조건반사를 따라가는 친절한 대중들. 하지만 그들 내면에는 반전을 기대하는 깜찍스러움이 도사리고 있다. 복수의 트릴로지는 결말의 성경식 해석과, 과정의 코란식 해석을 분리해 적용한다. 사랑을 말하고 주변을 말하며 구원의 종착지에 서 있는 나라는 인간의 육신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파괴와 죽음을 통하여 모든 곤충들이 그러하듯 껍질을 벗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절벽에서 고민한다. 결국 같은 원리에서 시발하고 작동하지만 시점으로 표현되는 해법이 다른 양식을 취함으로 인하여 관객들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기대를 충족한다. 그러나 같은 건 같은 것이다. 왜? 같은 사람의 물건이지 않은가? 물론 제작자나 스폰서는 개인들의 사상보단 수요를 따르겠지만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따끈따끈한 시나리오로, <올드보이>는 올드한 비디오로, <친절한 금자씨>는 친절하게 극장에서 만나보았다. 박찬욱은 카메라에 싣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노출적 광기를 제어하지 못할 때 표현의 수위가 과하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감독이다. 솔직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추킨 <올드보이>를 보면서 짜증을 잠재우지 못했다. 폭력의 신화 속에 잠들어있는 비판을 노여워했고 일본 만화의 상상력에 덧붙인 근친상간이란 배타적인 주제의 노골적인 시선과 의미 있는 폭력이면 손쉽게 용인하는 대중적이고도 모호한 분노의 의식을 화가 나도록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는 절제가 필요해."
<복수는 나의 것>처럼, <올드보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오직 나에게는, 스타일만이 유용한 선물이었다.
헌데 기다림의 세월에 절었던 금자씨가 궁금했다. 옷도 복고에다가 의식과 분노조차도 복고인 여자. 주말 극장가에서 볼 거라곤 이것밖에 없어서 보았다고 하나, 머리로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이힐을 신고 담배를 꼬나물고 가죽옷을 즐겨 입고 강렬한 화장을 과도하게 문지르는 무표정 속에 얼어붙은 즐거움을 알고 싶었다.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사는 것도 해볼 만 한가? 처단의 전야제에서 기억을 해체하기 위하여 여 사제는 눈두덩이에다가 아이섀도를 시뻘겋게 칠한다.
“친절해 보일까 봐.”
순결한 응징을 시도하는 그녀는 범죄자의 껍질을 벗고 벗기는 놀이를 시작한다. 유괴와 처단으로 상징되는 고난의 길은 적나라하다. 그녀의 상처는 외부에서 있지 않으며 집약적으로 그녀 내부에서만 황폐하게 무너져 내린다. 코믹한 성채, 금자를 보며 입에서 맴돈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이제부터 스스로 구원받게 될까?”
복수를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기대 사는 경향이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악몽들을 테이프로 돌려가며 지난날을 연구한다. 나를 현재에 놓아둔 사람 주위를 맴돌며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몰랐던 조각들을 순서에 맞게 맞춘다. 금자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내레이터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서야 박찬욱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바로 금자였다. 복수에 대한 동정을 갖는다는 건, 자신의 감독인생, 13년을 회고하는 것이었다. "13"은 서양철학적으로 복선적인 숫자다.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한 불길한 저주요, 순결의 여정이 핏빛으로 물든 파멸의 행로이며,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삼일 밤낮의 죽음이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걸 증명해 준 골고다의 산 증거니까. 과도한 중간점검을 끝내고, 온화하게 팔을 벌리며 피날레를 장식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얗게 되리라! 년 수로 치부되는 하중을 떨궈내고 몰라봤던 "나"에게 복수를 철저하게 한 뒤 부활을 꿈꾸는 사람이 한 말은 "두부처럼 하얘지고, 두부 먹고 새 인생을 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 박찬욱. 연민과 인정(認定)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상에 알려져 있는 사람일수록 바깥의 찬사보다는 자기에게서 받는 만족감의 비중이 시간의 가중을 받게 된다. 마치 복수처럼 안에서 끌어 오르는 감정들을 어떻게 주체해야 될지 몰라 계획을 하게 되고 모두가 파괴된 미래의 장면을 연상하며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자기애가 무척 강하군.”
그는 무명시절 배고픔과 매체에 오도된 서러움을, 유명이 준 어리둥절함을, 스스로 우쭐해졌던 칸느와 인기 엑스트라와 카메오의 짬뽕으로 얼룩진 영화판을, 요트라는 사치품을 사려고 청춘을 담보로 자신을 던졌던 일꾼들을 죽이는 빗나간 자세의 인격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냈다. 나는 박찬욱의 과도한 재능과 해설을 견제했던 심재명과의 합작품, <공동경비구역 JSA>를 좋아했다. 코미디적인 재능이나 기술적인 태도는 박찬욱의 열정에 부응하였지만, 그의 의도대로 인생을 돌아본다는 것이 웃찾사 모둠 메뉴에서 나오고 만다면, 한번 웃고 말 잠깐의 인기는 되지 않을지 오지랖 넓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친절한 금자씨>의 전체적인 내용이 CF처럼 짤막하게 끊어져버린 이유는 현란한 이미지와 현악기의 과도한 사용을 통해 지나왔던 생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이번으로 한 방에 끝내겠다는 듯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먹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어느 시절의 그를 말했으면 내용도 살고 의도도 살았을 것을. 친절함은 과욕 속에서는 그 의미가 희미해진다. 다음에도 금자가 두부를 먹으며 참회하면 두부를 던져버리겠어. 하여튼, 자기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사람은 자-알 해야 한다.
"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찬욱씨."
2005. 8. 7. SUNDAY
한 방의 세계. 자극적이다. 한 방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은 심리는 비참하고 좌절된 현실의 보상체계에 근거한다. 한 방으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 한 방들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던 시절은 인생에 한 방은 없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반면 복수는 한 방으로 끝내기엔 아쉽다. 상대를 처단할 때 지지고 볶는 여러 가지 방법유형으로 잔인하게 복수를 마무리하겠지만, 가슴에 남은 복수심은 상대가 사라져도 저조하고 개운치 않은 심리적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생활이 각박했을 때 마음도 메말랐는데, 코미디와 액션영화를 보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폭력적인 장면과 비꼬는 말투에서 비틀린 현실이 겹쳐졌다. 공짜표가 오면 거부하지 않았지만 이런 영화적 취향 덕에 타인과 영화 보는 것은 드물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그것 같을 때가 생긴다. 거시기가 거시기하여 거시기했다는 사투리로 착각하는 표준어법처럼 새로운 스타일은 없고 모두 간도 안 된 짜장 오므라이스에 내용도 알음새로 넘어간다.
과거에는 대부분 불친절한 편에 속했다. 모두가 거짓되게 친절한 세상, 꼭 시류에 발맞춰서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나? 뭐 그런 아니꼬운 심사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나의 문자적 세계에는 이모티콘과 감정의 표현적 기호들이 적다.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전화를 돌리거나 직접 만나서 상대의 목소리와 의중을 파악하는 습관으로 인해 스스로의 소리를 들려주길 거부하고 진실된 감정을 가리며 기호 문자적인 예의바름으로 포장되는 나약하고 소심한 모습들에 실소를 했다. 맞대응 방식은 불친절한 세계에선 친절하게, 친절한 세계에선 불친절하게.
마음속에서 복수가 필요했지만 복수할 대상을 잃어버린 나는 금자처럼 눈두덩이와 입술을 시뻘겋게 칠하진 않았다. 쥐 잡아먹은 것 같은 스타일은 이미 저승사자로 넘어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네거티브한 감정을 사랑하는 정신 나간 <아담스 패밀리>와 쓸데없이 입만 길게 찢어진 <조커>처럼 어둡고 암울한 고담시티에서 미친 듯이 뒹구는 고스적이고 고딕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터트릴 수 없는 분노 속에서 단련되다 보니 갈 곳 없는 복수심은 널브러졌고 무심한 스타일로 넘어가 버렸다. 이젠 평온한 게 좋아. 친절이건 뭐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