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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ODOR DOSTOEVSKY, POOR FOLK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 오십 다섯 통의 편지

by CHRIS

a thoughtful day.jpg [A Thoughtful Day] 2024. 9. 9.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한여름의 화살이 당겨졌는지 시트는 온통 땀에 절어있다. 남미의 고원에 서서 온몸에 불어오는 열풍과 마주하는 것도 아니고, 뜨겁게 달구어진 철가방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마음은 조급하게 익어간다. 도시로 접어들면 매연 때문에 목이 따갑다. 도시 언저리에서 달려도 매연보다 심한 악질들 때문에 심장이 아프다. 속도조절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적막한 돌발은 들리지 않는다. 차를 아무 데나 박고서 고통 없는 위로를 꿈꾸지만 차는 그녀 것이 아니다. 옆 자리에는 심약한 사람들 투성이다.


먼 길을 다녀온 이후엔 일렬로 쌓인 책더미를 본다. 술잔을 기울인다. 흐느적대는 그의 발소리는 기척이 없다. 책 껍질을 이리저리 흔든다. 쉰다섯 통이든 아홉 통이든 책장 사이에서 편지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책장에 철썩 붙은 정나미들. 투박한 종이 위에 하얀 형광등이 그대로 부서진다. 술기운에 졸린 그녀, 깎은 나무냄새를 맡으며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매달고 책상에 엎어진다. 무게는 결코 없다. 가만히 얇은 숨은, 책 모서리로 흐른다. 책은 속지부터 젖는다. 곧, 하늘은 어두워지고 비가 내린다. 겉표지가 젖기 시작한다. 돼먹지 않은 부류의 족속에게 가난한 소설은 금지되어야 한다. 부유한 희망도 그대로 떨어뜨리고 마는 망상. 주정은 끝이 없다.


허리가 아프다. 쌀 네 가마니를 들다가 삐끗했으니 할 말 다했다. 낙센을 먹고 드러누웠다. 잠이 오지 않는다. 편지라도 쓸까? 쓰기 싫어서 편지를 읽기로 했다. 친절한 연인을 초대하기로 한다. 낮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흰 진달래도 있다니, 그런가? 솜사탕이 뭉게구름 한 조각 같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무드가 없어진다. 바람을 피울 때나 수단에 못 이긴 목적이 꿀을 바르는지 감성이 야들야들해지지만, 정열이 식으면 그런 것이 있을 게 뭔가? 철든 봄과 천진난만한 새. 인간의 공상은 장밋빛에 근접하지 못한다. 우리는 새가 되지 못했으니까. 하늘의 새가 되지 못했으니까.


모서리 방에 불이 켜 있다. 연애 시나 연애편지는 브라우닝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르바라와 마까르의 편지는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수에서 밋밋하다. 사랑이 어쩌고 저째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아프면 잘 익은 포도를 배달해 주고, 덧붙여 분주한 하숙집 출근표정을 세심하게 표현하거나 살면서 불행했던 삶의 한 소절을 기록한 노트를 건네받고서 소박하게 슬픔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 새벽녘의 광선을 사랑하고 불현듯이 메어오는 빈 가슴을 위로하며 돼먹지 않은 문체를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운 띄우는 수줍음이란 낯선 것이다.


곱상한 단어를 쓰는 건 간혹 기분을 상하게 한다. 확실히 평서체는 재수 없는 인간들을 멀찍이 떨구어 놓을 수 있는 방편이다. 감정을 담는 글은 읽는 순간에 심상을 무너뜨린다. 쓰는 순간도 그러할 것은 당연하다. 하여간 이들에겐 귀엽다는 말이 서로를 향한 최고의 찬사다. 상대방에게 진지한 호기심을 가지고서 유쾌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 말끔한 속옷도 보내고 과일을 설탕에다 절였던 쭈카트도 보내고, 언짢은 그녀에게 세심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천을 골라 멋진 조끼를 만들고 읽을 만한 좋은 책을 보낸다. 그리하여 그리운 벗은 다시 조그만 옷장과 모자를 보낸다. 이렇게 주고받는 가난한 선물은 얼마나 즐거워! 빈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마찰기 많은 하루를 그대로 주어 담지 않고 쏟아낼 수 있는 쉼터를 가진다는 것은 기운이 돋는 일이겠지만, 달리 말한다면 그건 바렌까의 말처럼 불행을 전염시키는 일이 아닐까? 불행과 고독의 결합은 괴로운 것이다.


기분이 당분이 모자란 당뇨환자처럼 휘청거린다. 영혼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건 힘든 일이다. 항상 매달고 다녀야 하는 주사 바늘과 화학 약품들, 아니면 싱싱할 수 없는 신경조직의 괴사, 주먹다짐이나 명예의 실추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는 재기불능의 음산한 재난, 불쾌한 사건. 멸망의 구렁텅이, 노골적인 비웃음. 쓸모없는 구두창, 과거의 회상과 함께 하는 쇠약한 피곤. 모략하게 저무는 약골들. 흡족함이 무너지듯 만두 속이 너절하게 터지는 소리, 타인을 향한 체념 어린 기대, 남자 품에 안기는 사랑하는 비둘기와 이지러진 넋두리, 고칠 수 없는 문장들, 허망한 헤어짐, 달리는 붓, 갈라지는 마음, 손에서 흩어지는 아리따운 보배와 길어진 그리움.


책은 종결됐다. 편지는 허망하다. 긴 머리칼이 바닥에 늘어져 있다. 귓속이 근지럽다. 귀에서 진물이 솟는다. 소라를 구울 때 배겨 나오는 바다의 고름엔 핏물의 회오리도 섞였다. 내일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술도 먹고 빵도 먹고 배가 부르다. 욕까지 얻어먹는다면 더욱 배부르겠다. 정신 하락으로 책을 접었다. 아니, 이미 책은 몇 번째 되풀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2005. 4. 28. THURSDAY.



말할 수 없던 시절을 지나

실오라기에 매달린 가난은

어느덧 저만치


넋두리도 의미롭지 않아

조용한 숨소리 뒤엔

뜨거운 봄날이 흘러


서랍 속 보내지 못한 편지는

시절이 아련하여

띄워 보낼 이도 없는데


한껏 들린 귀밑머리엔

벼랑 끝 계절을 잘못 만난

때 이른 서리가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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