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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30. 2024

8½ FANTASIC FESTIVAL

인생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

[THE ROTATING CHANBER of MEMORIES] BEIJING. 2018. 4. 30. PHOTOGRAPHY by CHRIS



인생은 축제요, 함께 삽시다. 서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Domenico Marcello Fellini)의 <8½ : 8과 1/2>. 정식으로 본 횟수로만 따진다면 아마 3과 1/2 정도 될 것이다. 정체된 도로에서 우두커니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와이퍼로 한 번에 밀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그들은 잠시 스쳐가는 '나'라는 타인에 대해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뇌리에 남는 기억은 현실에서 얼마나 지속되는가? 평생? 인스턴트 조리용? 아! 나름의 적당한 시간. 굳어진 머드팩에서 탈출의 욕망이 불거지고 창공을 향해 한없이 날아갈 연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 하지만 이 세상에 살 때까지는 우리는 묶인 연(kite)이고 절망은 A4지(紙) 한 장에 쓰인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


기쁨이 희미하게 디졸브 된 영상과 활기찬 음악 뒤에는 장례식을 기다리는 병자와 노쇠한 늙은이들이 목마름을 가셔 줄 물 한 잔을 기다리고 있다. 물을 주는 사람도 물을 받아마시는 사람도 모두 지쳐있다. 이럴 때 환상이 필요하다. 샘물을 길어 온 처녀는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는 검은 선글라스도 벗길 만큼 아주 매력적이어야 한다. 작품에 내재한 문제의식이나 철학적인 전제는 시적영감이 부족하고 사건의 조합이 조잡하다는 비평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창조라는 기준은 시대의 복종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대중적이라고 말해지는 블록버스터 케이스는 대규모 자위군단을 거느린 어릿광대에 불과할 경우가 많다.



영화 <8과 1/2>은 자신을 자기 인생의 감독이라 설정하고 대입해 보면 단지 펠리니만의 고백만이 아님을 발견한다. 우리는 사회의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소위 친구라는 사람들의 명함을 받는다. 친밀한 이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아첨과 비판을 착각하여 설포 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제작자는 제작될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겉핥기로만 알고서 돈을 대기가 일쑤고, 스토리라인과 암시의 골목을 짓기 이전에 기차가 도착하면서 핸섬한 감독조차 나긋한 불륜의 유혹에서 허우적거린다.


클럽 샌드위치처럼 간편해진 부정(不貞: Infidelity)은 벨벳모자를 쓴 여인의 입에서 점심의 수다처럼 무심히 흘러나온다.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짓다가 무료함에 지쳐버린 남자는 여자의 눈썹을 창녀처럼 추켜올려서 그려본다. 내가 치즈와 복숭아에 민감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조용한 어머니뿐인데 이미 고통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마지막 애정의 피난처는 퇴역한 군인이나 러시아 장교를 아버지의 대역으로 삼으면서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길을 달리면서, 집중할 수 없는 호텔에서, 불철주야 인생을 꿰는 것은 고역이 되었다. 정파적인 사고나 의식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보단 진실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말하고 싶을 뿐인 것을!



창작은 귀여운 아내나 매력적인 정부, 혹은 건장한 남편이나 잘생긴 애인 사이의 갈등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행복함을 떠올리게 하는 샘물은 마술이 아니라서 신성한 생각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 자신을 안아줄 부모들의 품에서 밤이면 얼굴이 변하는 초상화의 결말을 보지 않고 잠들 수 있다면 악몽에서 숨 쉬는 아이들은 쉽게 무엇이 될지 알 수 있을까? 인생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실수투성이일 수도 있고 또한 내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위기에서 흔들릴 수 있다.


성스러운 사랑이나 세속의 사랑이 겹쳐질 수 없다고 믿는 경직된 대리자는 편협한 종파와 사상으로 아직까지도 고결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 유년기를 거친 의식은 냉철한 논리와 지식을 낳을지 모르나 감성과 추억까지 똑같은 상태로 낳는 건 아니다. 혼란함과 애매함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는 내면은 혼탁한 스팀 속에서 방황한다. 모두의 흥미만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벌거벗은 자들의 기도는 같은 색을 띠게 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바닥에 제대로 포복할 수 조차 없다면 어떻게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가.



위선적이지 않는 삶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고독의 효과는 자아성찰에 어떤 성능의 위약을 갖다 주는가. 신경질적이고 급변하는 성격의 사람만이 거짓 없는 진실한 삶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에게 단순한 말로 투정한다. 모두에게 줄 평온과 안식, 영혼의 유쾌한 절정은 선택할 수 없는 자들과 모든 것을 쥐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판단의 문제를 풀도록 유도한다. 물론 눈 가린 이들은 그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이가 들어 체중이 늘고 군살이 붙고 어린 시절의 밝은 페르소나(Persona)가 어둡고 음울한 위인으로 바뀌면 다시 한번 불쾌한 기억을 접고 자기를 낳고 들어 줬던 사람을 찾아 날씬한 몸매로 다듬어보길 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기 이전에, "행복은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슬픔이나 기쁨이 초콜릿 포장지에 적힌 문구가 아닌 걸 안다면 한낮의 열기에 쉽게 질식사하지 않을 것이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되는 인생의 영화들. 불빛은 펼칠 터와 흰 천만 있으면 자신의 그림자를 비춰낸다. 삶의 혼돈은 종국에 말한다. 구제불능 로맨티시스트에게 사소한 가치도 절망 속에 그대로 파괴하기보다는 시간에 불어왔던 혼란을 접고 누더기 된 사건을 잘 마무리해서 되돌아오는 트랙에서 진실하게 굴려보라고 한다. 극 중 구이도(Guido)도 그렇게 말했던가.


"오, 인생은 축제요, 함께 삽시다. 서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


전율과 행복이 넘치는 잔디밭에서 쓸모없는 배역들도, 다투던 이들도 모두 손을 잡고 춤추는 날에는 바람이 불 것이다. 속 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악단의 꼬리를 밟고 끝이면서 시작을, 마디가 끊어진 곳도 이으면서  비율의 와이드 스크린에 타오를 날을 꿈꿔본다. 나의 발을 감아 원점으로 돌릴 노끈은 아, 사양하오!
 

2005. 3. 20. SUNDAY




[8½, FEDERICO FELLINI]  MOVIE POSTER. 1963.


인생은 환상, 기억, 현실이 결합된 영화 같은 것


정말 오래전에 본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면들이 기억난다. 펠리니의 의식을 따라가는 흑백 필름은 초현실적으로 공간을 이전하는 나의 머릿속처럼 삶에 대한 깊은 물음과 연상들을 감아댔다. 구이도(Guido)는 펠리니였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였다. 


인생은 한바탕 축제이자 환상, 기억, 현실이 결합된 영화 같은 것이다. 축제의 서막에서 8과 1/2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8½은 펠리니가 만들었던 영화들의 기록이다. 스크린에 새겨진 이야기를 한데 묶은 자전소설은 무의식적인 꿈에서 과거의 회상과, 의식적인 기억에서 어긋난 현실을 넘나들며 자조적이면서 허탈한 내일을 그려낸다. 지루함도 꽁꽁 묶어 버리는 초현실적인 화면은 이상적인 여성에게서 구원을 찾는 남성의 의지가 망연자실하게 꺾여가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게 웃겼다. 자신의 꿈이 한낱 먼지일지라도 그 너저분함조차 인정하는 사람은 멋질 수밖에 없다.


꿈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꿈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혹여 꿈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누구나 바라보고 싶어 하는 저 밝은 세계만이 아니라, 시선을 돌려 어둡고 슬프기만 한 나의 검은 동굴로 향해 달려가는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날 시간의 필름에는 당신의 기억을 잡아둘 만큼 검은 암실의 동굴이 충분히 크고 넓으니까 말이다.





MOVIE,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가쁜 숨의 한 페이지


잡탕으로 간 들여진 잡채는 싫어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어렸을 때는 맛나더니 지금은 별로다. 건져먹다 보면 꼭 종류별로 기다랗게 가공된 구더기 한 세트 씹고 있는 기분이다. 기름에 절은 당면 줄은 느끼해서 건드리지 않고 야채나 버섯 조각만 손가락으로 몰래 헤쳐 먹는다. 굳이 다 먹어야 한다면 바닥에 눌어붙을 정도로 딸딸 볶아서 바삭하게 먹는다. 불기 내며 타버린 갈색 가닥이 좋다. 냄새도 꼬숩고 비슷한 색으로 엮인 모양새도 얄궂은 것이 보기 좋다. 

사실 내 삶은 고백하자면 내가 싫어하는 잡탕으로 버무려진 잡채 같은 인생이다. 하지만 기름기가 탱글탱글하게 얼굴에 빗발치며 튕기는 잡채발로는 만들고 싶지 않다. 입 안에서 저작(咀嚼) 대며 색깔 한번 화려하게 해주고 싶어도 속이 받아주질 않는다. 그냥 그을려 버리는 게 좋다. 안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이미 감각 밖에서 많은 걸 느끼게 해 준다. 속이 좀 타버려도 어떤가. 불기에 저어버린 손이 뜨거우면 어떤가. 보면서 웃을 수 있다.

이 눌어붙은 삶에서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이젠 영화를 거의 안 본다. 불어 터진 잡채발 처리하느라 볼 시간도 없다. 머릿속에 저장된 끊어진 테이프 몇 가닥 한 두줄 빼서 함진 삶의 코드선에 꼽아보고 있다. 그래도 혼이 들린 사람처럼 영화관이나 비디오 가게를 지날 때마다 멈칫 거리는 발걸음은 막긴 힘들다. 조그맣게 입 벌린 비디오 수납기 안에도 시간이 남긴 추억과 애정과 슬픔이 한데 먹진이 돼 있다. 

요즘 영화가 아주 선풍이다.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영화배우, 감독, 출연진, 제작진, 홍보 마케팅팀, 작가들이 던져대는 미끼에 홀려서 영화관에 손 잡고 들어간다. 투자기관, 미디어, 정치, 경제, 스포츠, 문화계, 대중들은 영상이 던져주는 시너지 광풍에 침을 흘리며 넋이 나가있다. 물론 몇몇 영화만 대박이다. 솔직히 나머지는 울상인데 누가 알겠는가. 그 안에서 생각을 쥐어짜며 바쁜지 안 바쁜지 몸을 돌려대고 있는 사람들은 기쁘기만 하지 않다. 

워낙 여러 것에 미쳐 있다 보니 한 때 영화에서도 내 삶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래선지 가는 길에 선이 닿아있다고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만났다. 관련된 일도 해 봤다. 겉멋만 들었지만 필름 조각에 자신을 끼우려는 사람들은 나쁘진 않다. 그런데 고민에 절고 빈털터리 지갑으로 힘들게 지냈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겉보기엔 멀쩡하고 유식한 척 잘난 척 삐까뻔쩍 말발과 자랑발은 죽이는데, 허공을 찔러대는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던 영화판은 나이가 많던 적던 허무함으로 점철된 곳이었다. 수 만자의 필름을 찍어대고서 마음에 안 드는 곳을 가위질 해대며 한두 시간의 기억으로 마무리하는 곳.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잘 되기를 어둠 속에서 발 구르며 숨어있던 사람들. 그러나 모두의 흔적이 한 번에 잘릴 수밖에 없는 곳. 그래서 영화판에는 방황하던 사람이 많은지도 모른다. 


누구나 좋아하는 걸로 자신의 인생을 세워가려 한다. 백수 인생 떨치고 부지런히 일하는 친구들 지켜보면 자기가 원하던 꿈으로 꼭 가진 않지만 말이다. 친구들 만나면 곧잘 물어보는 말이 있다. 


- 너 꿈은 뭐냐? 너 꿈은 기억하냐? 


어렸을 땐 대답도 잘만 하더니 요즘엔 그 대답 기다리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 겨우 듣는 것은 깊은 한숨이다.  


"내 꿈? 글쎄다. 넌 내 꿈이 뭐였는지 기억하나?"

 

왜 그것을 나한테 물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나의 친구들이니까 애정을 가지고 봐줘야 한다. 철진 시간 안에 녹아버린 사람들이니까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세상이란 압축된 진공관에서 시퍼런 면도날 한 장으로 압착되어 버리는 게 인생인가 싶다. 잘못 놀리면 살을 베어버리고, 잘 놀리면 털도 깎고 종이도 자르고 눈썹도 밀고 그림도 새기는 그런 검은 면도날 말이다. 컷팅을 심하게 해 버리면 인생 완전 난장판 된다. 

나는 이젠 그림 그리고 싶다. 내 인생의 그림을 말이다. 녹슬어진 면도날 한 장 들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 보면서 돈 많이 벌 필요 없고 잠시 돌아다닐 여유가 생겼을 때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포즈로 몸을 누이며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한 편의 영화 같이 줄줄이 필름을 뽑아내긴 힘들더라도 가끔 기분 내서 좋은 풍경 몇 장 눈 안의 사진기로 찍어대며, 그렇게 인화된 사진들 마음껏 바닥에 던져놓고 싶다. 면도날로 꼴 보기 싫은 부분 조금만 컷팅하고 가생이는 불에 그을려서 예쁘게 장식 한번 하고 싶다. 딱딱한 부싯돌에 녹슨 면도날 갈아대며 마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2004. 9. 14 TUESDAY




영화와 나, 인생의 작은 상자에 앉아서


직장 상사한테 욕먹고 부인한테 바가지 긁히고 시험에 자꾸 떨어지고 백수로 건들거리며 사는 친구들이 울상이 되어 있을 때 내가 18번처럼 자주 하는 말이 있다.

- 야! 야! 괜찮아. 괜찮아. 누구나 인생을 편집해 필름에 끼우면 멋진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거야.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 그것도 우리 인생처럼 칠팔십 년으로 늘리면 재미 광 땡이야. 시시하고 지루한 3류 영화가 되지. 나? 너? 다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잖냐! 그러니까 멋진 한 컷 만들기 위해 불편한 오늘을 참자. 다 커트! 커트! 라니까.

그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이 말은 나도 해놓고 기특하다. 예전엔 사는 삶의 울타리가 너무 좁아서 영화를 봤다.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뭘 먹고 입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었다. 이젠 이런 학습의 욕구도 절반은 사라졌다. 하지만 계속 영화를 보고 있다. 사람들에 대해선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은데 영상을 근 이십 년간 보아온 학습의 결과 영화는 숨 쉬는 것처럼 일상의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화(MOVIE)라는 그 단어는 정말 매력적이다. 괜스레 꿈을 꾸게 만든다. 영화 비디오테이프 두 개 정도 베고 자면 기분이 뿌듯하다. 친구랑 통화가 안돼 혼자 있을 때도, 처음 만난 사람이랑 멀쑥해 눈돌릴 때가 없을 때도,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밥통에 밥도 없고 냉장고에 먹을 물도 없을 때 돈도 없고 나갈 직장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때 오백 원이면 두 시간은 거뜬히 채울 그림이 있다. 그래서 난 영화가 참 좋다. 재능 없는 감독이 재미없는 이야기로 날 괴롭혀도 꿋꿋이 볼 거다.

언젠간 나라는 인간이 남겨놓은 영화가 심장 박동이 멈추는 순간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질지라도 내 눈 속엔 영화를 별처럼 박아 넣을 거다. 그렇게 영화처럼 살 거다.


2004. 8. 18. WEDNESDAY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툭 던진다. 


"너 인생 완전 영화야."


그럴지도 모른다. 친구는 삶을 글로 적어보라고 했다. 힘들었을 땐 다 묻어두고 싶었다. 요즘은 그날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입안에서 굴려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편안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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