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낮이라고 부르는 시간은 빛이 가득한데, 왜 우리의 가슴은 밝을 수만은 없는 것일까? 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고 서리가 끼는 어두운 창. 모였다가 흩어지고 떨어졌다가 붙어도 생경한 가운데서 한 테두리에 머무르는 상태를 허용하는 것이 가족의 정의인가? 마음속의 응어리를 한가득 뱉어내도 시원하지 않은 인생은 태동과 진동이 공유하는 조용한 격전의 장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부터 그 이름이 생겨났는지도 모를 가정이 자리한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깜깜한 터널을 쏜살같이 뚫고 지나가는 세월을 붙잡고서 이야기한다. 물 흐르면서도 거스르지 않고 굽이쳐 엉키면서도 진로를 방해하지 않는 인생레일을 밟아가는 사람들, 각자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이들은 어느 지하철 역에서 수십 번이나 만났을지 모른다. 서로를 모르기에 다시 마주쳐도 언제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수천 겹을 지닌 타인인가 보다. 어쩌다 일로 부딪치고, 뜬금없는 사건들로 대면하고, 암세포처럼 증식하는 감정의 폭증에 휘말린 사람들은 연인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고, 직장 동료가 된다. 그러나 어느 월요일 아침, 시청역 지하철 안에서 부대끼는 숨을 토해내는 이방인처럼 눈을 마주치기조차 지긋지긋한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대단한 감전을 겪었는데 아주 무덤덤하게 처음보다 못한 상태로 돌변해 버리는 관계는 또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영화는 사소한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만 그다지 해악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화면이 그려내듯이 잔잔하고 소박한 풍파만으로 삶을 진행시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마술처럼 아무는 상처의 치유와 회복에 대한 감상을 적절히 그려낸 점은 적당히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편안히 어제를 되씹고 목 넘기도록 도와준다. 언젠가 힘이 들 때면 슬픔과 눈물을 삼키지 말고 글을 적어보라고 충고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한 땀씩 써내려 간 오늘이 수년이 흘렀다. 이젠 속마음을 적어내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 지금이란 시간은 타인들과 내가 겪었던 아픔의 한 소절일 것이다. 요즘은 나를 둘러싼 또 다른 성격의 가족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이란 이름을 진저리 치게 떨쳐버리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빗물도 마를 때가 있을 것이다. 독립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이 세상 밖으로 나를 만들어내고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2006. 8. 27. SUNDAY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고정된 석고상의 모습으로 굳어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마다 입버릇처럼 생각과 사물, 공간에 관하여 정리를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인간관계를 정리하기란 쉽지가 않다. 단칼에 잘라낼 수 없는 시절의 인연은 버리기 힘든 미련으로 남는다. 서로 알게 된 시간이 짧을수록 마음의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상대와 멀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우리는 모르는 타인들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어떻게든 살고자 하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존재의 사후를 생각한다던지 관계의 부족함에 대해 집중하다 보면 다가오지 않는 미래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모든 것에 탄생이 있으면 성장과 쇠락이 있고 소멸도 있다. 이론으로도 이해하고 자연의 원리로도 알고 있지만 핏줄의 묶음과 해체는 머리로 이해 불가능이다. 고민이 길어질 때는 욕망과 파괴적인 충동 뒤의 본심을 살피게 된다.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항변하지만 실은 알 수 없는 책임에 허우적거린 시간의 길어서 그 원망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건조하게 보이는 얼굴 뒤로 나를 키운 애정보다 내가 키운 애정의 몫이 더 커서일 수도 있다. 변화를 결정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함께 한다는 것은 말하기 쉽고 듣기 좋지만 실제 행동에서 발생되는 관찰의 모순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