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 LILIES, REST & LEISURE

클로드 모네,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 | 쉼과 여유

by CHRIS
Water lilies, Want to Rest
[Water lilies, Green Reflection, Left Part 1916-1923, oil on canvas, Orangerie, Paris. Claude Monet]


가치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방문자를 반길 뿐이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 의자에 앉아서 길게 드리워진 수련을 보며 한동안 눈과 마음을 놓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번잡한 서울의 미술관에선 관람객의 소음과 등살에 좀처럼 쉴 수 없었다. 아마 먼 길을 불려 온 수련들도 그러했으리라.




Leisure, William Henry Davies


이것은 무슨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나뭇가지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지그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살 눈부신 날, 밤하늘처럼

별들이 가득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에 눈을 돌려

그녀의 발이 어떻게 춤추는지 바라볼 틈도 없다면.

그녀의 눈가에서 시작된 환한 미소가

입가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가여운 삶,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틈도 없다면.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 and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No time to turn at Beauty's glance,
And watch her feet, how they can dance.
No time to wait till her mouth can
Enrich that smile her eyes began.
A poor life this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Leisure, William Henry Davies》


"여유", "여가"라는 의미는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가 적절하게 설명한 것 같다. 일상에서의 여유 찾기는 어느 특별한 휴가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인 충만함을 동반한다. 앞으로 흘러가는 나의 삶이 주변을 살피면서 스쳐가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었으면 한다.




정리 중


침묵 속에서 일 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서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과 가을도 그러하다.

어느 봄날 아침, 꽃이 만개한 벚나무가 서 있다.

이 흰 꽃들은 나무에서 핀 것이 아니라, 침묵의 가는 그물 사이에서 새어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없이 꽃송이들은 침묵을 따라 흘러나온 것이다.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 , 막스 피카르트 Max Picard


석 달 전쯤 '좋은 생각'류의 책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주름진 눈길을 따라가다가 메모했다. 버려질 종이 위에 적힌 내용은 풋풋하다 못해 희망이 넘친다. 들뜬 여름날에 맞지 않게 차분하다. 원치 않는 침묵만큼 갑갑한 슬픔의 방어막은 없다. 과거의 얼룩이 씻기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머지않아 발목을 꺾어 놓았던 날들의 정리가 일단락될 것이다. 까맣게 내려앉은 불안함은 여전하다.




우리는 모두 깊이 상처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특별한 상황 아래에서 특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우리들은 모두 변하고, 성장하고, 가장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다.


친밀함의 7단계, 매튜 켈리 The 7 levels of intimacy, Matthew Kelly


상처받은 경험을 가진 이에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미래에 도래할 성장의 가능성을 감지해서일까? 내가 사랑하고 싶은 이는 절망 속에서도 암담한 현재를 떨치고 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암흑이 던지는 패배를 맛본다고 주저앉지 않고 두 다리가 꺾여도 다시 일어서고 발버둥 치는 용기를 보인다면 그를 사랑할 것이다. 어느 날의 고통에 근접한 느낌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이 순간의 신음이 언젠가는 사라질 날이 있겠지. 많이 나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고무줄의 탄성처럼 강렬하게 경기를 일으키는 경험은 무섭도록 가슴에 인장을 박았나 보다. 떠나가는 마당에 왜 이리 씁쓸하고 허무한가. 잊히지 않는 몇 해의 여름. 땀나도록 아픈 시간들. 고통이 수그러들면 고함치는 습관을 줄여야겠다.


2007. 7. 25. WEDNESDAY




2007년 여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모네(Claude Monet)의 전시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림을 보았던 기억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혼자 갔는지 누구와 갔는지도 모르겠다. 수련 앞으로 혼잡했던 인상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대학 시절 모네의 수련 (Nymphéas) 연작과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집을 선물 받은 이후로 작가들의 그림들을 명상하듯이 지켜보았다.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림을 잘라 이미지 맵으로 쓰거나 그 뒤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전시회장에서 모네의 그림을 보며 그림집에서 보았던 감상이 다가오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 그림의 기억을 뒤지다 보면 실제의 그림인지 스크린으로 본 그림인지 프린트된 그림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렇든 저렇든 동굴 속에 숨어있는 감정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림이면 된다.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머리까지 청량하게 만드는 색과 형태는 기억과 하나가 된다.


요 며칠 친구들이 연달아 찾아오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기분전환을 했다. 여유로운 듯 또한 나름의 고민이 가득한 그들을 보며 지금의 나는 바쁘게 사는 건지 싶었다. 밥 먹고 차 마실 시간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는 아이들을 보니 얼굴에 여유 없음으로 쓰여있나 보다. 언젠가부터 나는 겉보기로 굉장히 바쁜 사람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듯이 어디론가 가서 재충전하자고 제안을 받으면 약간 곤혹스럽다. 나에게 있어 재충전은 글이던 그림이던 사진이든 영상이든 작업을 위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하루종일 사부작대선가 워커홀릭도 아닌데 하루종일 일하는 사람으로 여기긴 한다. 일이 아직 나만의 작업이 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시작한 사람이 끝을 맺어야 하니 이래저래 생각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가끔 뜻하지 않게 외부적인 시선과 만나게 되면 생각과 행동이 잠시 멈추게 된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여유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 수 없을 때 유용하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말투도 부드럽게 변한다. 레저(Leisure) 활동을 하듯이 사람들이 즐기는 액티비티 스포츠 (Activity Sports) 형 여가는 원치 않는 노동으로 느껴진다. 타인들이 생각하는 노동과 여가의 개념이 의식의 망막에선 뒤집혀 보인다. 모두가 알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뛰어갈 때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한적한 생각이 떠오르고 상대의 눈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오른쪽 빰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빛바랜 머리를 어루만지는 밤하늘의 달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오디빛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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