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부르주아, 봉제인형(縫製人形)
손수건에 수 놓인 벌거벗은 몸뚱이
속눈썹이 삐쩍 마른
두 눈 가만히 기도하는 여자
진주목걸이 애타게 찾고 있네
웅장했던 저택의 담장 모서리
둥근 거울 휘황하게 둘러있건만
속상하게 문 닫혀 볼 수가 없다
지그재그 현란하게 춤추는 거울은 놀린다
씨실과 날실 엉켰던 내 아이 갸느람이 움직이며
올 빠진 명주천 숲 헤치면
바늘에 꼬인 꼬까신발 꿸 지도 모르겠네
그를 찾는 나이테 깊어만 가고
나는 기다림에 지쳐
한쪽 다리 놓고 떠나간다
어지럽게 그린 물방울 붉은 강 되어
선사에서 받은 옥구슬을 띄운다
염주 속에 숨은 원앙새 한 쌍
애타게 부둥켜안고 봉제 인형 소리
우리는 갇혀 있는 인형인 거야
꿰맨 함성 부르튼 인형인 거야
소리 없이 뜯어진 인형인 거야
(2005. 4.12. TUE. 국제갤러리, Louise Bourgeois Exhibition)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외로움이 가득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빨간 색실이 통과하는 천 조각의 자국들은 고독에 지친 사람의 절규이자 자해의 목소리다. 개인적인 경험을 끌어내는 이번 전시에서 봉제의 흔적이 남긴 바늘땀은 관람자로서의 현 위치를 잃어버리게 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입장으로 변한 거친 손길을 따라 전시물에 대한 가벼운 동조를 실행하였다. 독창적이었다는 감탄보다 현대적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갖고 있는 방만한 구성 속에서, 평생을 갈구해 왔던 사랑을 드로잉 하고 커다란 성에 가두었던 억눌린 자유를 분출하며 관찰자로서는 세세하게 알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상처를 기억하려는 의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적막과도 가까운 고립,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순간들, 모자이크 된 절망들이 패치워크 기법으로 골고루 섞여있었다. 자주 접했던 표현방식이라서 특이한 감상은 없었다. 우리는 시대와 국경, 인종을 막론하고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것일까? 아픔과 슬픔까지? 직설적으로 변형되고 굴절된 이미지는 감각적인 메타포가 절실해진 사회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일기와도 같았던 소박한 전시를 보며 전시의 내용들이 입을 닫아버린 자폐 성향의 뇌파를 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고통은 숨겨두다간 숨이 막혀 질식해 버릴 것이다. 자주 표현해야 한다. 엽서 속의 부르주아가 희미하다.
2005. 7. 31. SUNDAY
한 사람의 삶은 외부의 입장에선 바라볼 땐 이해하기 어렵다. 말을 닫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이야기들은 내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사람들의 청력이 모호해지는 시점이 오면 갑자기 투철하게 고백적인 어투이거나 그날들에 몰두하지 않기 위한 정신적인 방황이 시작된다. 자서전적인 고백에 천착하는 "자기 고백적인 예술(Confession Art)"의 장르를 연 루이즈 부르주아 전시는 우연히 보았다. 인사동에서 후배를 만났고 그때 길을 걷다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루이즈 부르주아> 전시에 들어갔다. 친구나 지인을 만나면 문화생활을 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인의 삶이 가득한 장소를 들어가면 동굴 탐험을 하듯이 새로웠다. 우연찮게 만나는 누군가의 속내는 복잡한 심상을 끌어내면서도 그 기묘한 동질감에 시선이 머무르곤 했다. 혼자 전시를 볼 땐 허기짐을 고수했다. 육체가 배부를 돈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 절실했다. 손발을 놓아버린 현재를 이겨내기 위한 가슴의 씻김을 겪고 나면 다시 손에 도구를 들 때까지 견디자고 다짐하곤 했다. 전시를 본 뒤 사진집이나 작품집을 사기도 했지만, 대부분 엽서를 사곤 했다. 혹여 기회가 생기면 그림과 더불어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이젠 편지를 잘 안 쓰는데 간혹 사람들이 뭘 갖고 싶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말하곤 한다.
"편지. 긴 게 부담되면 엽서에 써도 좋고. 그것도 귀찮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차나 한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