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LAST DAYS, DEATH TO BIRTH

<라스트 데이즈> 죽음에서 탄생으로 가는 길은 길고 외로운 여정

by CHRIS
[Last Days in Cine Core] 2006. 5. 6. PHOTOGRAPH by CHRIS


서울이라는 한정된 땅에서 살면서도 생각을 여물게 하고 여유를 안겨주던 종로로 가기가 쉽지 않다. [종로에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종로는 어린 시절의 꿈과 사랑이 담겨있던 공간이다. 종로에는 마음을 달래주던 음악상가와 상상을 안겨주던 영화관과 소소한 삶을 보여주던 작은 미술관이 있었다. 친구들과 만날 땐 누구나 알던 종각에서 만나 새롭게 생긴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종이냄새가 가득한 커다란 책방 구석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풍기는 책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아플 땐 종로 약방거리로, 옷을 만들고 싶을 땐 광장시장으로, 옛 거리를 걷고 싶을 땐 인사동으로, 고즈넉하게 시간을 돌아볼 땐 종묘로, 그렇게 종로에서 그립고 오래된 사람이고 싶었다. 조용히 곁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종말에는 또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6년 5월, 폐관을 앞둔 시네코아에서 마지막을 기리던 영화책을 꺼내본다.




LAST DAYS, DEATH TO BIRTH
2006. 5. 7. SUNDAY


<라스트 데이즈 LAST DAYS>. 시네코아(CINE CORE)의 폐관과 더불어 선택된 영화의 제목이 제법 그럴 싸하다. 진정 폐관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스폰지(SPONGE)로 이름이 바뀌어도 영화관이었던 장소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영화들을 세 번씩 본 곳이자 시네코아에서 영화를 본다고 하면 변태적 소양이 즐비하지 않냐고 질문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는 사실도 빼놓기 어렵다. 조조영화를 자주 보았고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던, 이십 대 단골 사랑방 시네코아는 생활의 중심에서 가까운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인하여 멀어졌다. 제휴카드나 할인카드를 제대로 써먹지 못한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기에 앞서 착잡한 심정으로 함께 영화관을 들락거린 사람들을 떠올렸다. 자판기 커피를 먹으면서 창문 밖 종로거리를 감상하거나 잠시 의자에서 눈을 붙이던 시간도 흘러간다. 영화 <라스트 데이즈>는 구스 반 산트(Gus Green Van Sant Jr) 감독의 매력적이고 은둔적인 성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린 영화였다. '무슨 생각으로 찍었나', '약 먹다가 찍었나' 생각할 정도로 느릿하고 어지럽고 정신없었다. 커트 코베인의 음울한 음악을 기대했었지만 이 영화는 음악적으로 승부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전기영화도 아니다. 위안하자면 잘 마르고 인상이 강렬하지 않은 마이클 피트가 부른 [Death to Birth]가 유일한 통음거리였다.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 뒤에서 여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소멸이 두렵지 않다면 점차 희미해지기보단 강렬한 한방을 기대한다.




열반에 오른 커트 코베인을 위해
누군가를 향한 총 한발.
2004.10. 21. THURSDAY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 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Kurt Cobain Quotes from a song of My My, Hey Hey by Neil Young>


조용하니 하릴없다. 너바나(Nirvana)의 [Come as You are]를 튼다. 오늘따라 날씨도 덥고 몸도 늘어진다. 길에서 너바나의 노래가 흘렀다. 갑자기 일 년 전 생각에 열이 뻗친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를 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 줄 알고 봤다가 내용의 저렴함에 화들짝 놀라면서 김영하의 단편 소설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어 놓은 영화 <주홍글씨>를 떠올렸다. 우리나라 남성 작가들의 성(性)에 대한 의식은 청소년기에 상한 SM을 갈아 마셨는지 구속적이면서 변태적이다. 어떻게 이런 글들이 상을 타거나 영화화가 될 수 있을까? 덕분에 한번 눈을 버린 글은 다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조잡한 문체와 얇은 상상력은 별 외로 《가자, 장미여관으로》도 아닌데 섹시한 여자 연예인을 스토킹하고 대중적 인기를 얻는 한 인간을 파파라치하며 도서관에서 삶을 뒤적여야 코트니 러브가 남편 죽은 이야기를 해주는지 의문이 든다. 두 직업군을 혼란시킨 뒤 합체를 유도하면 열반으로 가는 길을 얻는 것인가 아이러니한 발상이다. 살인과 강간, 유기, 육질로만 도배하면 시시껄렁한 감성이 생기를 되찾는 부활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안한 틈에 삶이 끼어봐야 허무하고 세상사가 황량하다는 말은 사라지리라. 기형도의 포도밭에서 물러진 포도를 씹으면 벙어리 소녀가 피리를 불고 바람 부는 언덕에서 뒹굴면 물에 버렸던 슬펐던 한 사람이 떠오르는가. 좁은 닭장의 삶을 그리겠다고 아무 곳에나 폭력을 들이대고 피를 보는 건 그리 참한 발상이 아니다. 영화적 형식을 빌린 글쓰기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가장 최첨단의 방식으로 자리할 순 있겠지만 아무 데나 흑백몽타주를 들이대고 퍼즐조각을 맞춘다고 해서 한방에 숨 죽인 사람은 눈뜨지 않는다. 총을 합법적으로 소지할 경찰 끄나풀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총알소리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없고 죽은 여자성기에 동전을 넣는다고 해서 살인의 추억을 부르며 신용카드 쓴 놈의 단서를 알 순 없다. 쓸쓸함을 다루는 인터넷 세대는 그다지 납득할 수 없는 평이다. 존재의 허구는 어디에서 튀겼는가. 메마른 삶은 바짝 말라 표류하는데 재미없는 게임에서 이미 보이는 패를 다 던져 놓고선 무슨 장기알을 던지라는지 이해가 안 간다. 산더미 같은 지식을 표방한 글보단 속 끓게 하는 삼 사분 분량의 음악이 더 가치 있단 생각이 든다. 맹랑한 파편을 던지는 초라한 단편은 선물용이 아니다. 마리오 푸조의 험상궂은 총소리를 들어보며 따발총처럼 파고드는 빚진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게 낫겠다. 그럼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잠시 커트의 음성을 기억하며 그가 말한 이야기를 구술한다.



커트는 그랬다. 자기 모습 그대로, 어쩔 땐 친구처럼, 어쩔 땐 오래된 적처럼 살고 싶다고. 숨차게 달려왔지만 한 번쯤은 여유 있게 삶을 선택을 하며 긴 휴식을 누리고 싶다고. 그런데 너무 늦은 거야.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 뒷골목의 습기에 울음을 묻혀도 삶에 바래버린 허탈함이 다가와도 자괴감을 이기고 자기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뻥하고 터져버린 인기에 당황했다. 유행을 따르는 미친 함성들. 지금까지 존재가치가 별로 없었던 자신에게 왜 그들이 환호하는지 부담스러웠다. 그 시끄러운 소리가 먹통이 되면서 왜 여기에 서 있는가 기억도 사라진 거야.


그는 말했다.

난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맹세를 했지.

난 총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부모가 이혼해서 혼자 빈 방에 놓여있던 외로움도,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두들겨 패던 두려움도, 어린 자길 붙잡고 생을 호소하는 한 여자에 대한 측은함도, 갈라져버린 둘 사이를 오고 가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존재감도, 학교에 가면 예쁘다고 여장시키는 남자애들의 집적거리는 굴욕감도, 화딱질 나서 가출을 하고선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굶주렸던 속 쓰림도, 추위와 분노와 허기를 이기려 하얀 물약에 몸을 타기 시작한 검은 망각도, 충동질하는 욕구를 참지 못해 알지 못한 여자들과 동물적 섹스를 하던 혐오심도 모두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 정상적인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고 했다. 사랑을 연상시키는 이름에 반해 자신을 너무나 좋아한다던 커트니와 결혼을 했어. 그녀의 칭얼대는 바가지가 싫었지만 꾹 참고 예쁜 인형 한번 돼 주기로 했다. 옛날의 기억을 빌려 커트니의 옷도 입어가며 립스틱도 칠했다. 표류하기만 하는 마음을 다잡으려 정착의 고리에 몸을 묶었다. 아기도 낳았지. 그 아이가 위로가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 소리치는 대중들의 함성에서 귀는 멀어지는 아득함. 집에 돌아오면 순진한 눈망울을 들이댄 채 자기가 왜 살고 있느냐 묻는 그 동공. 보면 볼수록 속에서 전해오는 울림을 막을 수 없었어.


그는 알았다. 그 누구도 속일 수 없음을. 그래서 즐거운 것처럼 꾸며대는 광대놀이가 자신을 유명하게 만드는 겉포장이 되었을 때 적도 친구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열망했던 열반의 연꽃이 되길 바랐다. 스스로에게 하루하루 희미하게 지워지는 존재가 되기보단 속을 한방에 태우고서 원했던 피안의 세계로 가기 위해 한 발의 총성에 투명한 껍질을 부숴버린 거야. 예민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핀잔주기엔 적당하게 타협하는 세계는 굴욕적이지. 쉽게 공감하고 끄덕인다 해서 몇 프로의 인간을 이해하며 가슴을 열겠는가.


그는 항상 그렇게 물었다.


냉소와 조롱으로 한껏 세상을 판단한다 해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깰 순 없다.


나도 그래. 가장놀이는 그리 즐겁지 않아.
서서히 지워지는 기억은 별로야.
불꽃으로 화해서 공기 중에 묻히는 게 소원이다.




Underneath the Bridge
Something in the Way
2004. 8. 21. SATURDAY


NIRVANA | NEVERMIND


바다를 유영하는 아기. 1달러를 향해 웃는다.

너바나의 Nevermind를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물 속으로 잠겨버린 그를 생각한다.

또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잊어야 하는데.


난 나만 알아.

난 슬프지 않아.

확신 없어.

남의 시선. 뭔 상관이야.

내가 겪어야 하는 이유. 잊을래.


조울치는 커트 코베인의 내뱉음을 따라한다.

마지막에 걸린 저음.

뭔가가 있단다.

너무 무섭다...


Our society may be corrupt.

Never mind.

The worst things happen at sea.

Something in the way...





이십 년 전 언저리의 글들은 욕 절반에 비판을 심하게 해서 읽기 어려운 자조적인 한탄이 묻어 있었다. 젊은 치기였겠지만 기억도 희미해져서 미로 속에 빠트린 작가의 이름도 겨우 찾았다. 잠을 자는 것보다는 감각을 훈련한다고 잡다한 것부터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삼키고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맛을 음미하고 평가하는데 집중했다. 가벼운 배설이 주를 이루는 대중문화는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욕조차 쿨한 언어로 둔갑시키는 쥐약이다. 타인의 오해와 오역은 합리적인 지성과 논리적인 수사로 돌아봐야지 입만 더러워지는 욕은 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니 의미 없는 글들은 형체만이 아니라 존재감이 사라진다. 다양한 비평과 시선이 명성이나 자존감이나 돈벌이에서 어떤 도움이 될까. 스스로의 삶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면서 깊게 파고 들어갈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관심과 힘을 빼기로 했다.


우물 속에 갇힌 사고와 수면에 묻힌 시간의 개념을 끌어오기 위해 텍스트적인 정리를 선택한 것을 잊지 않도록 한다. 정제되지 않은 글은 감상의 하수구 역할을 한다. 말하면 당장은 속은 시원한데 얼마 안 지나 가볍게 말한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후회감이 밀려온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조용하게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깔끔하게 언어들이 정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렇게 내뱉었던 말이 부끄러워진다면 달라진 나는 과거의 불안하고 초라했던 시절을 감싸 안을 용기가 있는가. 욕설과 자괴감이 난무한 음악상자를 켠다. 길고 긴 여행 중 펼쳐진 삶의 한 소절을 들으며 침잠해진다.



From ripe to rotten, too real to live

Should I lie down or stand up

and walk around again?

It's a long lonely journey

from death to birth

Should I die again? Should I die around

Pounds of matter wheeling through space
I know I'll never know

until I come face to face
with my own cold dead face,

with my own wooden case

It's a long lonely journey

from death to birth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PULSION, EK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