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LK TO PARADISE GARDEN, William Eugene Smith, 1946]
유진 스미스는 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낸다. 그의사진을 보고 있으면 전쟁의 포화에서 불거진 함성조차 잦아든다. 작은 신음까지 잠잠해진 통증.
"나는 사실을 해설하고 기록하는 양심적인 저널리스트와 문자 그대로인 사실을 가지고 종종 시적인 변수를 필요로 하는 창조적인 예술가의 태도 사이에서 항상 고민한다."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의 사진은 속을 토해내는 에세이처럼 실재에 바탕을 둔 듯이 정직하게 보인다. 폭력의 격전이든, 평범한 생활이든 간에, 인물들의 행동은 시간의 틈새에 껴버린 무표정한 얼굴이다. 삶의 한 순간에 포착된 상실된 감각은 죽음을 가까이 취재하면서도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고 말없이 해설하기에 적절하다. 아버지의 자살을 다루면서 신문은 얼마나 왜곡된 보도를 했기에 이런 객관화의 충격을 준 것일까?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세계를 담고 있는 소담한 비밀의 창고이지만 다른 인간에게 상처를 주고 이득을 챙기려 악용될 때 문제가 된다.
사물을 보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태도를 현실에 적절하게 나누어 삽입하는 것은 관찰자의 자질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현상과 거리를 두는 스미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좋다. 이 한 장의 사진, <The walk to Paradise Garden>은 그의 사진 중에서 유독 몽환적이다. 바다에 떠도는 죽음. 갈증 나는 빈약한 생활, 병들고 폭력에 시달리는 인간들. 몸을 웅크리는 전쟁. 전우가 옆에서 죽어도 자신이 살기 위해선 총을 들어야 하는 상황. 늘그막에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지켜보는 사람들. 일터로 향하다가이기심을 불 지르다가 하얗게 질려버린 사진과 달리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보인다. 저 고개 너머엔 두 아이들을 기다리는 천국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2005. 2. 23. WEDNESDAY
성찰의 이미지가 주는 여운은 확실함을 넘어선 아우라가 있다. 시간이 흘러가도 모호한 설명의 범위는 현재에 맞닿아 있다. 우리의 발걸음은 내일의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현상을 바라봄이 사실적이라고 말해진다고 해서 결코 사실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표면 아래 깔린 심연의 독설들은 예상 밖의 기대와 우연의 결과를 펼쳐놓는다. 창조적인 예술가의 위치는 겉으로는 나긋하고 매력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우월한 지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적인 언어는 충격적인 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변수가 가득한 세계로 망혼의 시선을 이끈다.
인간의 삶과 감정은 순간에서 포착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연민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끊임없이 연구한다. 일상의 애환이란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어 공해에 오염되고 세파에 병들고 생활에 찌든 표정을 불러일으킨다.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현대의 도시는 기하학적인 성장 뒤에 폐허가 된 그늘이 길게 드리워지고, 약물과 폭력과 가난과 질투에 노출되어 있다. 사실과 상상 사이는 생각보다 그 격차가 크다. 저널리스트와 예술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