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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21. 2024

LUCíA, HUMBERTO SOLáS

움베르토 솔라스 <루시아 LUCIA>, 불구속된 우리의 현장기록

[Lucía, Humberto Solás 1968]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 우리의 이름은 모두 루시아다. 물리적인 성(性)은 서로 같지만 사회적인 성(姓)은 다르다. 루시아 송. 루시아 강. 루시아 박. 시절을 넘는 숫자들과 배수를 안고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는 혈연 속의 다른 정체성을 표출한다. 영화의 배경은 이국이지만 삶의 갑갑함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았으나 한국을 떠나야 했던 여인들의 다사다난한 현장을 보는 듯한 이분법적인 기록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姓)의 여인들을 비춰내며 시대의 물살을 타고서 각자 환경과 사건, 사람들에 반응해 가는 인물을 조명한다.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ás)의 <루시아 Lucía>를 '한국식'으로 만든다면 프레임이 혈색으로 진득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영화에서의 루시아는 각기 개별화된 인물들로 혈연적인 공통점은 없다. 오히려 사회나 가정이란 공간에서의 충돌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한 가지가 더해져야만 할 것 같다. 바로 피의 눈물(血淚) 말이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한 '예스'나 완전한 '노'가 아닌 모호한 선택을 경험하게 만든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고 낙인찍힌 테두리는 흡사 안경이나 유동적인 시력으로 조준되는 가시물의 형태처럼 외관이 어설픈 것에 비해서 구속력이 강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가정에서 바라는 틀(Frame)과 내 안에서 표류하는 상(像) 사이에서 거울 안팎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사회적인 제재가 심할수록 변화의 강도와 폭을 현상보다 커 보이게 만든다. 극세사같이 가는 머리카락에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집 안에서만 머물던 여자들의 호소가 페미니즘(Feminism) 운동으로 여기지는 것은 아닌지 고려해 볼 일이다. 마초이즘(machismo) 운동, 매니시즘(Mannishism) 운동, 그다지 못 들어봤는데 말이다. 사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평등한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의 모습은 옛날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생활의 어느 면에서 자유가 보장되고 내면적 속성이 어떻게 변한 것인지 불분명하기만 하다. 한동안 이러한 양자적인 현상의 의미를 남자들에게도 부여한 용어 매트로섹슈얼 식의 그 ‘무엇’이 등장했지만 그것은 지속적인 운동(Movement) 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열기(Fad)에 가까웠다. 폭넓게 점진적인 스타일의 변동 현상으로 보기에는 주류 속의 운동은 역학적인 위치를 상실한다.


여자들의 혁명이었던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영리한 창녀, 나나(Nana)의 벌거벗음과 유혹적 눈짓이 변혁이라 보기에는 자연적인 상태의 섹스로 대변되는 혁신은 대지주(大地主)의 세습된 영토 안에 가려졌고, 남편이 지어준 인형의 집(A Doll's House)에서 노리개로 전락한 노라(Nora)의 거친 발악은 집 밖으로 퍼지기에는 애당초 집을 짓도록 제공되었던 벽돌이 견고했다. 쉽게 타파할 수 없는 지각의 모순점은 이해하기 쉽고 풀기 좋은 주제인 '사랑'의 모습으로 대입하는 것이 전 인류의 매너리즘적 상태에서의 과도기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다. 움베르토 솔라스의 <루시아>도 다름 아니다. 솔라스 감독은 쿠바 독립전쟁(1868-1898)이나 쿠바혁명(1930s),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전위적인 쿠바 혁명 후(1960s)의 시대상황을 역사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각기 다른 여인들의 현재에서 시간적인 차이와 비동질적인 형상의 분열을 발생시킨다. 시대의 억압과 혁명, 사랑과 구속, 남자와 여자, 동족과 이민족, 계급과 평등, 폭력과 비 폭력, 문맹과 비 문맹, 남편과 부인의 눈으로 대립되는 세계는 위로받을 수 없이 광란으로 피 멍든 폭동의 페이지를 넘겨왔다. 혁명이 끝나고 안정이 다가온다. 독신(獨身)을 끝내고 타인과 동반을 시작하는 분위기는 어떠한가.


역사의 큰 장에서 진행되는 굴레는 인간들의 미약한 힘으로 거스르기 힘든 운명의 회전과 같다. 개인들이 가지는 경험의 차이는 각 인물들의 상황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비교분석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교차편집이 없이는 다단계의 장막을 열 수 없는 것이다. 유물론(Materialism)이나 마르크시즘(Marxism)을 현세대의 증언대에 세운다고 가정해 보자. 시대는 이미 개인주의라는 새로운 볼트를 끼우고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인간들의 외로움은 결혼이라는 생식적 종속 밖에서 동성애와 에이즈란 코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유동적이 될 것인지 옴니버스를 탄 주인공이 유동적이 될 것인지 관찰할 시간은 의식마저 몰래 바꾸어 놓을 것이다.


열차에 세 명의 루시아를 집어넣고 그녀들은 어떤 인생을 꿈꾸었는지 결말을 점검해 보자. 천성이 백설공주파인 여자들이 꿈꾸는 멜로드라마는 배신과 살해로 전복된 비극이 될 수 있다. 대중매체에서 엄마시절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이 올해의 본격적인 시즌상품이 되었다고 고하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가는 철없는 복고풍은 막이 없는 신파에 나동그라질 수 있다. 또한 첫눈에 반한 사랑으로 영원을 약속하자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순진한 헌신은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잦은 싸움과 헤어짐, 구애의 표정이 담긴 가벼운 에피소드식의 코미디에 질겁할 수 있다. 형식이 어떠하든 스타일이 무엇이건 간에, 공간을 강탈하는 게릴라의 습격은 처음에는 충격이지만 계속적으로 반란적인 의식이 사회로 흡수되면 투쟁조차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인식의 맹점에 허덕이게 된다. 비극적인 현장에서 솔라스만이 보이는 장점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중간자적인 사고와 어정쩡한 행위자체를 모두 다 비관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균형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파도를 뒤엎으며 화해를 구하는 남녀를 가만히 지켜보자니 이질적인 싸움은 처음의 피 터지는 깨우침과 같은 거친 발성도 아니었고, 구속의 중간에 낀 아이나 과부의 슬픈 사연도 아니었다. 남녀의 악수는 바닷가의 얼음이 녹듯 뛰노는 장면으로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썩거리게 만들면서 이들의 장단이 이후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증을 남겨놓는다.


나는 알 수 없는 ‘이후’라던지 보이지 않는 '희망'과 같은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단어에 매혹되고 만다. 그래서 완전한 구속보다는 도망칠 여지가 있는 불구속이 더 숨통이 트인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일을 선택한 요즘조차 정신적인 탈출에 연연하는 이유도 내일에 대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의 방황, 어떠한 현장기록을 간직하게 될지 그 후속이 궁금하다.


2005. 6. 18. SATURDAY




인간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계급타파의 담보로 걸어야 할 것만 같은 혁명(革命, Revolución)은 타자의 참여를 독려하는 호전적인 구호와 사회적 구조의 무지를 해체하자는 도취적인 단서가 있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사회적인 이상을 보면서도 비정하고 각박한 현실에 치어 살던 대학시절에는 마지막 운동권 세대의 잔류에 휩쓸렸던 사람들의 유토피아에 동조하지 못했다. 인간의 육체적인 동력을 요구하고 정신적인 개조를 위한 시간은 과연 무엇을 위한 혁명이고, 혁명의 궤도에 올라서면 반동적인 체제는 기존의 관습적인 형태보다 더 강력하게 구속적인 상태로 복원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체된 순간에서 벗어나 리듬감 있는 운동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은 미래에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 것인지, 행동적인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명확하게 답변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래서 모든 체제에 질문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주류에 앉아 있으면서도 비주류적인 시선을 가지고, 그렇다고 합리성이 결여된 비주류에는 동조하지 않는 사상적 입지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사회적인 관념을 구성하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남녀평등을 내세우는 학문과 생활체계에서부터 평등함이 존재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성(姓)부터가 여자(女)가 낳은(生) 인간인데, 왜 남자의 성(姓)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봐도, 현실적으로 명백한 답을 하는 선생님은 없었으며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복종을 거부하는 의문이란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되곤 했다. 남성적 가계이든 모성적 가계이든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는 단계적인 방식에서 완전한 생물학적 독립과 개체적인 건강을 원한다면 성(姓)으로 규정된 가정적 단위의 사회적 약속규범에서 철저히 해방될 수 있도록 동족과의 결합보다는 전혀 피가 섞인 적 없는 이민족과의 결합이 역설적으로 안전하다. 그 말은 한국처럼 부계단일의 성(姓)을 물려받으며 같은 종족끼리 피가 섞인 단일민족은 아무리 촌수를 정해가며 동방예의적인 사고로 유사 혈족에 끌리는 생물적 본능에 거리를 둔다 해도 엄밀히 따지면 확실한 동족지향의 근친사회라는 것이다. 지리적인 폐쇄성이 섬나라의 고립된 특성에 반영된 일본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물 안에서만 생식을 해야 하는 한계로 인해 변화보단 변질에 더 우호적이며 변형된 인간성과 사회적 구조적 체계가 한국보다 극단성이 더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십자군 운동과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서양사에 가져온 순수혈통의 변질가능성을 내포한 순혈주의로의 사회적인 포기는 이민족에 대한 배척감을 본능적으로 탈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혈우병이라는 변종질환까지 낳아가며 근친혼을 지향한 서양의 상류계급사회의 체제보존 욕망을 자극했다고 봐야 한다. 100년 가까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미국에서 부활한 백인우월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민족과의 섞임에 대한 일종의 저주관념과 소유욕에 근거한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순수가 아닌 오염이나 타락과 같은 하강의 인식 오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불합리한 시절의 일방향적인 개념은 시대를 구성하는 지배적인 교육을 통해 한 가지 시대적 사고관을 가진 남자만이 아니라 의식에 종속된 여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 나아가 인간이 형성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관은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성(性)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집합체인 역사적인 정치사회와 규율적인 규범문화가 구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합리적인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구속적인 상황은 고전을 읽을 때에는 문장이 아름다웠다가 그 유명함조차 무색하게 저작자의 편협되게 쏠린 사상에서 답답해했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도 사건에 흥미로운 해석이나 균형감보다는 과거의 유물인 왕자나 공주 판타지가 뇌리에 남아있음을 발견하곤 찝찝해했다. 현재에는 표면적으로는 계급이나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부적인 의식에 잔재한 기본적인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나 가정문화의 단위에서 형성된 사회적인 고정관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바쁜 와중에 더 이상은 남녀의 구분을 신경 쓸 겨를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까지 왔다.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부여하는 이중 삼중의 중책도 관리하기 어렵다. 세상에서 제공하는 고정관념과 편안함에서 벗어나는 순간 생리적인 에너지는 분출한다. 활력이란 분명, 살아있을 때 유효하다. 장기간 불구속상태의 불안정한 현실에서 사실적인 현실기록을 작성하는데 집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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