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나비의 날개를 달기 위한 기다림
점쟁이는 카드 네 장을 골라보라고 했다. 두 장은 과거였고 다음 두 장은 현재였다. 그리고 다시 카드 네 장을 골라 보라고 했다. 그녀는 가까운 미래를 진단한다. 거꾸로 매달린 인형을 보고 변화를 뜻한다고 했고, 팔과 다리에 얽힌 실을 보고 그것은 꼭 고통이나 죽음은 아니라고 했다.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에서 뜻밖에 수다쟁이와 만나 즐거움을 가질 것을 예견했으며, 앙상하게 마르고 벌거벗은 그림을 보고 곧 입을 다물었다. 혹여 죽을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져서 손금을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점쟁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카드만 읽을 수 있지 손금을 읽을 재간은 없다고 발뺌했다. 그랬던 점쟁이는 여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남편이 있는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저 여자, 암이야. 난 다 봤다고!”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자에게서 귀담아들을 것은 과연 무엇인가? 조합된 언어로 설명되는 일상과 카드가 상징하는 일반적인 그림을 엮어서 일종의 형상이 되어버린 내일에 강렬하게 의지하는 사람들. 진짜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과학적으로 명확한 진단이 나오기 전에 점괘로나마 위안을 받으려다 더욱 불안해진 여자를 보고,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상대적으로 즐겁게 살아갈 시간이 줄어든 것에 급박하고 초조해하는 어떤 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불현듯이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했다. 짧게는 3분, 길면 6-7분, 늘어지면 15분으로 분절된 각 장에서 편린 된 조각들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유기적으로 편집되고 저마다의 의미가 붙여진다. 그것을 어떤 이의 삶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는 것이 나을지 고민스럽다.
집으로 가려고 잡아 탄 택시 안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노래는 시끄러운 기억이다. 손을 바쁘게 젓자 대신 듣게 된 라디오에서는 위스키 샴푸 광고, 거물 인사의 부음, 축하선물, 농민 폭동을 알리는 브레이크 뉴스, 도심에서의 가스폭발 사고, 그에 따른 대처방법, 기상예고, 박물관 휴관 공고까지 이름도 모를 그 많은 사람들과 얽힌 사건 사고들이 쉼 없이 토해진다. 나의 기분과 관계없이 한 번도 시간의 U-턴을 거치지 않고 지구를 휘저어 온 삶의 소재들. 철봉에 매달린 채 건강을 다져봤다가, 사랑하지만 한 번도 마음을 속 시원히 털어놓은 적 없던 연인을 보며 사랑이란 관계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되고 평소에 주목하지 못한 풍경들에 가슴 한편이 문득 무거워지는 것은 이 삶을 재고하게 만든, 더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결정을 기다리는 유예의 시간 때문일까?
완전하게 자신을 가둬 둔 각본 안에서 운명을 시험하는 것이 젊은 날에만 가능한 전형적인 눈빛 연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클레오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가슴이 아파왔다.
문 열린 집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도
의미를 부여할 형상이 없다면 빈 집이겠지.
갈 곳 없고 빈 몸뚱이로
슬픔에 갈기갈기 찢겨 유리관 속에 죽어있겠지.
투명한 유리병 속의 보석.
관찰이 오래가려면 살아서는 안 될 거야.
무인도에서 하릴없이 주름살만 늘어가고
그토록 기다린 당신이 와도
외롭고 흉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차갑게 묻혀버리면
이 생에서 내가 할 일 무엇이 있을까.
주위의 사람에게 다 그만두자고 분노하는 클레오의 비명은 수전노처럼 누렇게 돈 냄새나는 얼굴들과 권력에 대한 우매한 집착, 우월한 위치에서 탐욕스러운 아귀를 벌리며 타인의 숨통을 조이는 태도들이 길든 짧든 어느 누구나의 방문을 두드릴 죽음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용인지, 사랑 타령이든 신세타령이든, 우습도록 싫다고 가슴을 압박해 왔다.
검은 커튼 뒤에서 검은 옷으로, 검은 모자와 검은 숄을, 검은 백을, 검은 구두를, 검정 선글라스로 어둡게 성장을 하고 외출을 하는 여인. 그녀가 보는 세상은 어제와 무엇이 다른가! 비둘기가 날아오르면서 걷히는 대도시의 풍경을 따라가 본다. 그래, 그곳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지럽게 등장하였다. 진지하게 주목함으로써 주목을 당한 대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개구리를 차곡차곡 입에 넣었다가 맹물과 함께 개구리를 한꺼번에 토해내는 남자, 팔뚝이 쇠꼬챙이로 뚫린 차력사, 아이를 안은 엄마, 커피를 주문하는 고객, 그 사이를 비껴가는 점원들,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며 정답게 아내의 이마에 키스하는 남편, 추억의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에 대해 늦는다고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 시(詩)의 쇠퇴를 힘들어하고 피카소의 비틀린 그림에서 올빼미와 여인의 모습을 보는 한 무리의 논객들, 초현실주의 탄생 이론을 논하는 학생들과 알제리 정국에 대해 논하는 정객들, 노래가 길고 시끄럽다고 투정하는 연인들.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에 숨 막힐 듯이 놀라 거리로 황망하게 빠져나왔다가 무심하게 눈 마주치거나 호기심을 담아 응시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흘러가는 시곗바늘과 소파 위에 앉은 친구들을 생각하게 되는 건 모두가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의 환시나, 반대로 가까워져 버린 세상에 대한 자각의 플래시백일 수도 있으니까.
누드에 대해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행복하지 않아도 늘 웃곤 했던 시절이 있었지. 클레오와 도로테의 회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붙여지는 거리를 꿈꾸며 수녀, 노점상, 해군, 역장, 여행객이 오고 가는 역을 지나 도착한 극장. 그곳에서 도로테의 친구가 선물처럼 틀어주던 무성단편영화는 감독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의 극 중 암시가 흑백의 명암처럼 가장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망원거울에서 진행되는 액자식 영화, 좌측과 우측, 여자와 남자, 슬픔과 기쁨, 검은 선글라스를 낀 세상과 맨 눈으로 본 세상, 생과 죽음, 응시하는 각도의 차이. 두려움이 편두통으로 밀려오는 곳에서 불안의 요소가 수면 위로 부상했을 때 모호함, 그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는 무엇인가를 기다린 총체라고 말해질까?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기다림의 대상이란 꼭 사람이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지루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이제 무서워하던 새와 폭풍우, 엘리베이터, 바늘,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죽음 앞에 자신의 가장 값진 진주를 물고기 심장에서 꺼내 전시하는 일이 남아있다. 때 이른 축하를 멀리하고 일찍 태어난 아이의 인큐베이터를 백설공주의 방으로 만들어서 포대기로 둘둘 말아두고 어떻게 될지 방치했던 옛날보다 썩 좋아졌다고 농담하거나, 혹여 동화를 바란다면 잘생긴 왕자의 입맞춤으로 이른 개화를 기대해 봐도 괜찮겠다.
죽음에서 깨어나기 위해 고치를 두르는 애벌레는 두 시간의 산책을 만들어 간다. 그곳엔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는 것들, 말해지는 것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떠한 사람을 만나건 무슨 시련이 있건 양자의 감정에 놓여있든 간에 내일로 연결되면 자유로운 나비의 날개를 달게 될 테니, 죽음을 상기하며 앞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반드시 비관적인 태도라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정쩡한 클레오의 5시와 7시는 구성이 13장이든 14장이든 등장인물이 많든 적든 러닝타임이 1시간 반이든 2시간이든 간에 내일 오전 11시까지 기다려야만 모든 해답이 풀리는 동시에 막이 끝나게 된다. 그녀가 살지 아닐지 이야기의 후속 편을 기대한다면 상상력이 가득한 당신이 지어보든가.
2005. 6. 12. SUNDAY
시끄러운 영원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인과 조용한 남자와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이야기를 지어볼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현재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급속하게 심장에서 퍼져나갈 것이고, 지금 불치병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아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이 살아가는 매듭 속에서 불쑥 솟아오를 것이다. 운명이 삶의 줄에 걸릴지 아니면 어둠으로 들어갈지 확정되지 않은 순간들을 배회하며 만나게 되는 클레오의 시간은 아름다운 그녀의 노랫소리와 함께 꿈처럼 흘러간다. 분할된 거울에 비친 반으로 쪼개진 얼굴을 뒤로하고 사방으로 뚫린 열차를 타고 거리를 배회하는 것.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 속에서 물이 끓는 소리와 소란한 수다와 비명과도 같은 움직임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삶이던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파란 하늘과 남자들의 호기 어린 부름과 부글대는 자동차 소음과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 모든 것이 예민해진 사물들의 풍경에서 복잡한 심사는 가라앉지 않는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흔들고 하루를 흔든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과 두 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그 후. 클레오의 5시부터 7시까지는 불확실성에 기댄 다층적인 여행의 시간이다. 클레오의 긴장과 초조함은 시간을 따라 느리게도 흘렀다가 빠르게도 급진한다. 거리를 걷거나 친구를 만나는 평범한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생의 마감에 쫓기는 깃발을 든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 일상이 더욱 아름다워지거나 소중해지는 것은 마지막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깊게 느끼게 되면 오늘 이 순간을 소홀하게 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