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 하늘을 보면 내가 사는 지구가 밀폐된 장소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산소는 비강을 거쳐 폐를 돌고 혈관을 헤엄치며 뇌와 심장과 말초신경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지만 그 산소조차 갇힌 곳을 편안한 잠자리로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마약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지구는 안전한 곳일까? 돈과 권력과 부패와 위증과 사기와 거짓이 판치는 이곳은 살만한 곳인가? 공기에 섞인 불결한 균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 채 죽여버리지 않을까? 공(球)의 20퍼센트도 안 되는 육지에서 발을 굴리고 그 땅을 지키려 평생을 바치고 생계를 이으려 시간을 태우고 일을 하고 씨를 뿌려대는 작은 땅. 넓다고 생각되다가도 작은 지구는 내 숨을 죈다. 어떻게 하면 좁은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있을까? 무엇이 나의 탈출구일까? 하늘? 꿈? 미래? 사랑?
“Show me all of the blue print. Show me all of the blue print. Show me all of ……” “The way of the future. The way of the future. The way of the future. The way of…” “I’m an aviator. I’m an aviator. I’m an aviator. I’m an aviator. I’m an aviator……”
강박. 손에 피가 나도록 비누로 빡빡 씻고 휴지로 물품을 집으며 남이 손을 댄 음식에는 진저리 치는 사람을 보았다. 나도 강박에 걸린 것인가? 그를 따라 몇 구절을 반복하자마자 기억에 걸려 넘어졌다.
“어제 옆집 아저씨가 죽었다. 검역이 필요하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검역이 필요하다.” “내일 아버지가 죽었다. 검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냥 우울하기엔 난 젊다.
“미래의 길이 제시된 청사진을 볼 수 있다면, 비행가가 되고 싶다.”
난 외쳤다. 하지만 곧,
“아. 날개가 꺾였지.”
그런 자각이 돌고 돌았지만 반복해서 말을 꺼내야 했다.
“Show me all of the blue print…” “The way of the future…” “I’m an aviator…” “난, 정. 말. 검. 역. 이. 필. 요. 해.”
Q-u-a-r-a-n-t-i-n-e. 검. 역.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힌 단어다.
<에비에이터 The Aviator>, 영화제목처럼 항공기를 조종하고 항공사를 운영하고 영화를 돌리고 세상을 비행한 사내의 반평생 고백은 어두운 방안, 따스한 불빛을 등졌던 엄마가 아이의 몸을 닦아가며 가르친 ‘검역’이란 단어로 출발하여 최고의 부자로, 거물 영화제작자로, 자유로운 비행가로 살았던 인물 속에 릴(Reel)로 둘둘 휘감겨있었다. 19세에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하늘 세상과 꿈의 세상과 자신의 세상을 비행하는 데다 쓸 수 있다니! 손에 휘두를 수 있는 건 얼마나 많은가. 아름다운 여자들. 넘치는 富. 의지 넘치는 영상. Oh, Perfect! 하지만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그는 엄마 젖을 충분히, 힘차게 빨지 못한 구유기의 피해자였다. 뚜껑을 빨리 따서 상해버린 우유. 익지 못한 사랑. 다윈의 원시적인 충동에도 뒷걸음치는 병적인 집착. 모유가 꽉 찬 유방과도 같은, 뚜껑을 따지 않은 신선한 병 우유는, 일찍 떠나버린 그녈 위한 애모였다. 모든 걸 혼자서 잘 해왔다가도 한순간 암흑기로 돌변했는데 그 누구 하나 옆에 없음을 알게 된 자는 자신의 동굴에 칩거하며 마셨던 우유로 오줌을 싸고 나서 흔적을 쉽게 버릴 수 없기에 병에 되담는다. 그대가 진공관에 들어가는 건 발가벗고서도 보호를 받았던 웅크린 태도를 깊게 느끼기 위함인 것인가.
탄소가공물질로 만들어진 비행기의 감촉은 매끄러운 여자의 등과 같다. 굴곡이 있으며 날개를 가진다. 샴푸통과 골프채가 비행기를 만드는 재료지만 날아가도록 만드는 본질은 뱃속을 떠돌던 아기의 고함, 비행기는 여체를 본받은 게 아니었을까? 하워드의 꿈이던 비행기와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표현했던 영화, 영화 속에 거론되던 <지옥의 천사들 Hell’s Angels>, <스카페이스 Scarface>, <무법자 The Outlaw> 중에서 본 것은 <스카페이스> 밖에 없지만, 휴즈가 남의 그림자를 잘 밟는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Russell De Palma)의 아버지 뻘일 줄이야!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Charles Scorsese)의 연륜에 기댄 수많은 카메오의 등장보다도 길게 늘어진 갱스터의 칼자국이 강렬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영화제작자와 항공기 조종사(AVIATOR)로서의 하워드 휴즈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가능성 있는 회사를 인수 합병함으로써 부를 늘려 나갔던 자본가로서의 안목은 많은 영상을 담는 노력에 비해 약소화 된 면도 있고, 메카시즘과 정치적 선동을 은근하게 표현하는 감독의 사견은 약하긴 해도 <갱스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에서 혼란했던 시대설정은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섭섭하나마 쾌히 정리된 느낌이었다.
집에 오던 차 안에서 불빛에 아른거리던 밤하늘을 보았다. 그러다 고개 돌려 스쳐가는 차를 보았다.
이조 X3 5XX2, 서울 8X 더 634X, 경기 16 머 79XX…
집에 반쯤 도착할 때까지 차 번호판을 가지고 계속 덧셈을 하고 퍼즐을 했다. 재배치. 곱셈까지. 한동안 고쳐지지 않았던, 지우려고 무던히 애썼던, 숫자를 보고 장난치는 놀이를 다시 하고 있었다. 산수도 못하는 것이 왜 수학을 하는지, 투박 주며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도 또 다른 강박이 되었다. 삶이 바빠서 내버려 두니 습관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강박은 아주 여러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정착해 버린 집착들. 한번 쏠리면 벗어나지 못하게 무섭게 집중해 버리는 괴이한 독선. TWA(Trance World Airlines)로 경계선이 없고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의 하늘을 나눈다 해도 어떤 형태든 용기에 담아내지 않고 내가 가진 기억을 알지 못한 타인들과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다시 떠올랐다. 꿈은 몸에다 화상을 남기고 사랑은 가슴에다 화상을 남기며 세상은 뇌에다 화상을 남긴다. 그리고 그 불거진 화상을 치유하는 것은 묻어둔 사랑을 꺼내는 자, 즉 스스로 밖에 없다.
2005. 2. 21. Monday
버스를 탈 때 무료하면 길 옆의 차 번호판 숫자를 보고선 연상되는 날을 떠올리거나 그것도 싫을 땐 계속 숫자들로 머릿속에서 장난을 쳤다. 숫자에 얽매여있을 땐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 관찰적 시선조차 버거워지면 강박이란 단어가 목을 죄는 느낌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돌아가고 내부가 엉켜있는 상황에는 영혼이 이탈하여 껍질만 남은 모습이 보였다.
신경증인가.
요즘은 지하철도 뜸하게 타고 버스도 잘 안 타니까 공공장소에서 부딪히는 방만한 시선분할은 사라졌다. 한 무더기로 늘어진 기록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설계를 하고 싶은 욕구가 튀어나온다. 한 번은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아가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