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커덩 아이의 손가락 기우뚱한 날에 앉았네 인두 위에 올렸다 화들짝 놀라 아린 손 부여잡고 달리는구나
노쇠해진 화살 바람 부는 얼음 활만 남은 장난감
어둠의 썰매 노는 들판에서 달릴 곳이 없네 엄마 잃은 들판에선 달릴 곳이 없네
어슬렁거리던 손짓 깃에 매달려 슬피 부르나 얼어붙은 그리움
떠나버린 아이들
눈만 잡아매고는
무덤 속에 불을 피우네 천국 성(城)에 불을 피우네
<시민 케인 Citizen Kane>. 대학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인생 다 산 기분이었다. 화면엔 썰매도 불타버리고 케인도 떠났는데 마네킹처럼 굳어진 충격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누아르적인 분위기와 화려한 카메라 테크닉도 일품이었지만 종합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본, 연출, 미술, 조명, 음악, 의상, 편집, 그 모두가 어우러진 미장센은 놀라웠다. 정교하게 엮은 세트에서 허무함은 왜 그리 짙었던지 흑백의 선에서 칼라의 모든 것을 느꼈다. 성(城)을 만들고 얼룩진 상처로 저택을 칠한 창조자.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천국을 건설했던 오손 웰스(Orson Welles)의 제일 그럴싸한 발음. 성찰과 같은 공허한 투영.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 옐로카드(Yellow Card)가 된 흑백의 불빛에서 빨갛게 타오른 허상에 아린 눈을 감았다. 곧이어 썰매 위에 올려진 로즈버드(Rosebud)는 불길 속에서 달아오른 환영을 흔들면서 이야기 첫 장으로 인도했다.
인생의 전환. 뜻밖의 사건이 다가오던 날, 얼음을 지치던 아이가 놓아둔 건 불사조를 닮은 썰매였다. 시간을 공들이지도 땀을 흘리지도 않고 얻어 쓰는 뒷돈의 매력은 아까움 없이 방탕하게 푸는 것인가? 돈을 썰어내는 은행의 뒷골목에서 노닥거리던 생활을 접고 진실을 수호하는 기관으로 전근 간 후계자. 신문 지면에다 헐벗은 민중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타락한 사회와 정치권을 신랄하게 꼬집는 사설을 싣는다. 전단으로 뿌려대는 공격. 무차별로 살포되는 명성. 비주류 옹호가 주류로 접어들면 명예란 게 쌓인다. 맹물에 잡티와 오물이 끼게 되면 시스템에 길들여진 권력은 언제나 자식 같은 대리자를 기억한다.
제한된 생명을 가진 인간들이 아이를 낳고 직설을 표현할 수 없는 작가들이 글을 쓰고 환각을 흡입한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이상을 배설한 화가들이 그림 그리듯이 단절된 세계에서 대리인은 노예로 전락한다. 대권의 총아로 올라서기 위한 가문의 결합. 그리고 쉽게 무너지는 사랑. 불식 간에 찾아오는 삶의 권태. 허드서커 대리인(The Hudsucker Proxy)의 작태는 주식을 사고파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주고받으며 신분을 업그레이드한다. 호응은 서서히 끓어올랐다가 한순간 급 물살을 타기에 천국에서의 하룻밤은 지상의 한 겁(劫)이 된다.
종이 그림이 내 생명보다 더 값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질박한 그릇 속에는 어느 것도 담겨있지 않다. 텅텅 빈 외관이 아름답다. 그래서 남자는 열망은 있으되 머리는 텅 비고 미모는 있지만 조르지 않는 꼭두각시 대리인을 필요로 한다. 자식과 부인이 떠나고 친구와 결별하고 패배만이 가득한 사내는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할 여인을 통해 구겨진 얼굴을 가린다. 가녀린 마이크에 꿈을 싣는 여자. 하지만 울리지 않는 종(鐘)에 눈살 찌푸린 사람들은 침을 뱉고 떠난다. 질투할 대상 없는 변성된 살리에르는 완화제가 없기에 그림 맞추던 손이 없어지거나 술이 깨면, 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손목을 긋는다. 마지막 발악이 의미 없음을 남자도 알았다. 호응 한번 못 받고 서둘러 연극을 끝낸 극장주와 배우는 명성으로 지은 제국으로 들어간다. 은둔의 자리에서 배우조차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떠나버릴 때까지. 비어버린 천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상한 권력만이 흔들거린다. 케인은 시민으로서 역할을 마감하고 불씨를 띄운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바로 나다." <찰스 포스터 케인>
"There's only one person who's going to decide what I'm going to do and that's me." <Charles Foster Kane>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은 조명, 촬영, 특수효과, 인물과 무대 공간배치가 고무줄 각본을 통해 계산된 모든 장면들과 조화를 이룬다. 물 흐르는 편집은 모티브를 통해 결말로 진입했다가 프롤로그로 다시 당겨지는 탄성을 만들어 낸다. 인물에게 드리워진 그늘 하나조차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예고편으로 작동하며 조화로운 미장센은 공간에 놓인 대상을 다양하게 연결하는 관계방식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주체가 되기 어려운 대리자적인 성격의 인간의 삶을 대중 매체를 운용하는 한 인물 속에 투영한다. 매체와 인간. 움직임과 정지. 화자(話者) 분할. 시민 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케인을 풀고 묶던 하나의 장치적인 트릭으로써, ‘회상’을 집어넣고 있다. 또한 심상에 잠입하는 영상의 기계적인 장치와 관찰을 요하는 매체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권력의 무탈함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다면적인 위치에서의 상실감을 드러낸다.
태어났던 곳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연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족을 탐색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심층엔 항상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탐구가 존재한다. 본질이 갖춰있어야 테크닉도 살아날 수 있으며, 앵글 각도를 달리 하더라도 중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암흑에서 거주하는 삶을 취재하는 사람 또한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으로 인생을 정히 판단할 순 없다. <시민 케인>, 영화 하나만으로 삶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있겠다. 연상되는 아류작을 끌어올 수 있겠지만, 사생아 역시 자식이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은 밤에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2005. 2. 5. WEDNESDAY
트럼프(Donald Trump)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시민 케인>이라고 한다. "시민 트럼프?" 뭔가 퍼즐게임에서 실패한 듯 시민스럽지 않다. 버럭 '도널드' 덕(Donald Duck)과 강력 '트럼프' 카드(Trump Card)의 조합이어야 말이 맞는데. 미국 대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판에는 뇌가 사라진 대중을 위해 황색 저널리즘(黃色言論)이 판을 친다. 암살 미수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트럼프는 귀를 붕대로 칭칭 감고 상처받은 반 고흐로 포장됐다. 좌절한 고흐의 외모에 승리의 여신이 빙의한 듯한 전투적 잔다르크 태도는 배꼽 잡는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간혹 정치판 사진이나 기사를 보다 보면 코믹만화를 볼 필요가 없겠다 싶다.
죽을 뻔한 트럼프는 자신을 비하하는 블랙 유머도 좋아한다. 지성적인 언어로 비꼴수록 그의 독특한 존재감을 상기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자기를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자존적인 발언 자체는 '핵' 미친 세계를 한방에 관통하는 일등 경제인의 화법이다. 트럼프가 대권을 쥐면 북한의 상황에 대해 아예 묻지 않고 해결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바이든 정부보다는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바이든이 젤렌스키보고 푸틴 대통령이라던지, 윤석렬 대통령보고 미스터 문이라고 하는 것은 심각하다. 아침에 간간히 뜨는 뉴스는 말도 안 되는 세계를 보는 것이 유쾌한 것인지 실소인지 모르게 한바탕 웃게 만든다.
개인의 인지능력 저하와 변질은 기본 생활운용의 적대적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인지능력 저하와 변질은 평화적 세계에 위협적 요소이다. 우리의 일상과 상관없는 듯 하지만, 모두가 주목하는 정치, 문화, 사회, 경제와 언론의 관계는 지성적인 언어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극적인 대립형태를 취해야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젠 거대 자본이 감시역할을 대신하는 공간에서 평화적인 정화(淨化) 기능이나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미덕은 많이 사라졌다. 몸뚱이가 절단 나지 않으려면 강력한 위협을 할 정도의 권위는 없는 것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