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LLIVER'S TRAVELS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방랑의 투사, 나는 걸리버?

by CHRIS
[GULLIVER, THE WANDERING WARRIOR] 2005. PHOTOSHOP. PHOTOGRAPH by CHRIS


네가 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작은 거니?
걸리버, 안심해. 나를 찾으면 묶지 않을게.
난 말이야 걸리버, 바로 너 일지 모르니까.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성을 확보하기.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많은 이의 공감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상상을 건드리는 사람이라면 필히 갖춰야 할 태도이다. 독특함은 비정상에서 발로 되진 않는다. 평범함 속에 널린 변화의 장치를 알아차릴 때 독특함은 불거지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 관찰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어렵고 귀찮은 일이 되겠다. 화면 앞에서 걸리버를 찍다가 아이를 위해선 놀라운 동화를, 어른을 위해선 조소 넘치는 글을 지었던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미덕을 환상적으로 바꾼 걸리버 여행기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 In Four Parts. By Lemuel Gulliver, First a Surgeon, and then a Captain of Several Ships》도 역시.

아직까지도 걸리버의 자취가 밟히는 것을 보니 걸리버가 쏘다닌 곳은 한 두 나라가 아닌가 보다. 크게 네 나라를 탐방했지만 그를 맞이한 건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데에 사는 집약된 인간상이었다. 입담 좋은 조너선이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에 담아낸 건 자연관찰을 통해 발견한 대상의 상대적 성질인데 그는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의 잣대를 그대로 분사하기보단, 사회의 부패상과 정치혼란에 흔들리는 민중을 소인국 릴리퍼트 (Lilliput)와 거인국 브로브딩내그 (Brobdingnag), 하늘섬 라퓨타 (Laputa), 영리한 말(馬)과 노예의 세상인 후이넘 (Houyhnhnms)에 대입하여 위트 있게 조롱했다.

시간에 놓인 몸체는 여전히 나로 존재하지만 여행을 통해 나아간 세상에선 나는 다른 이가 된다. 장소가 가진 특색에 따라, 환경에 적응한 민중색에 따라, 테두리에 갇혀있던 시선의 높낮이에 따라, 비커에 담긴 시약이 되어가는 나. 질료와의 결합조건과 반응정도에 따라 권력의 격차가 나눠지고 존재의 가치가 결정, 취급 및 평가된다니 촉매제는 과연 누구인가? 방문한 나인가? 거주한 너인가? 어찌 이 가볍고 무거운 이야기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불안한 상황에만 적용되는 어법이겠는가. 인간의 의식 속에 신선한 광풍을 몰아넣은 걸리버의 큼직한 발걸음은 현재까지도 똑같이 유효하다.

독설(毒舌). 불편함을 자극하는 글을 짓겠다고 말한 조너선 스위프트가 좋다. 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야기를 쉽게 잊는다. 그리고 한 가지 단맛이 불쾌할 때가 많다. 세상을 가린 안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검은 세상뿐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싸구려를 덧댄 사탕을 넘기라는 손길이 거북하다. 단맛에 반응하게 교육시키면 간식도 없는데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겠지. 멍청한 탐욕의 시종이 되기 싫다. 차라리 이상한 여행을 끝마치고 구석에 쿡 처박히겠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머릿속에 제국을 짓기 시작했다. 소인국, 거인국, 무법의 섬, 비열한 야후를! 사람들과 대화할수록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 순수를 날려버린 지루한 미덕(美德)에 놀란다. 타락한다는 건 정말 별 게 아닌데도 세상에 대해 인식자를 대기 거부한 사람들은 서서히 다가오는 악귀처럼 무감하게 타인을 눌러댄다. 그런 종자들에 질려버린 걸리버는 작가의 소리만이 아닌 신(神)의 분신이자 아웃사이더의 대변인일까? 껍질을 벗는다면 그의 실체는 무엇일까? 여행을 끝마치고 마구간에 누워버린 걸리버는 예수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아둔한 종족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방랑의 투사가 아니었을까. 날 유혹하는 거친 심장을 지녔던! 저녁에는 서쪽을 향해 누워있던 걸리버가 아침엔 동터오는 동쪽을 향해 누워있길래 문득 안쓰러웠다. 우리는 태양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묶인 그를 위해서 내가 그 주변을 한 바퀴 돈 것일 수도 있다. 걸리버, 그의 손에서 푹 잤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엄지공주가 되는 건가? 꽃의 아이. 정신 차려야지.


2005. 2. 1. TUESDAY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는 초등학교 때 만화 영화로도 보고 여러 가지 버전의 세계명작 동화선집에서 보았다. 어린 시절의 동화는 엄마 찾아 삼만리를 하던 미래 소년 코난이 되던 이상한 나라의 폴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서 환상과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 가득했다. 요즘은 TV를 안 봐서 아이들이 보는 만화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귀여운 <뽀로로>는 능글맞은 목소리가 부담스럽고 <인사이드 아웃>은 철없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인 거 같은데, 어린이 관람가이긴 하다.


경험주의를 믿고 있는 의사이자 과학자인 걸리버는 진취적인 성향의 근대적 인간이다. 그는 어디서든 환영받고 적응력이 뛰어난 모험가이다. 낯이 두꺼워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쉬울 것이다. 근대적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요시하며, 외부의 권위와 전통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방법과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호감을 표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잠재력과 기지를 발휘해 역경을 헤쳐나갈 뿐 아니라 역사와 환경의 분석을 거쳐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민주적인 태도를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한다. 또한 세속적인 가치를 중시하기에 종교적인 권위보단 세속적인 윤리와 도덕을 따른다. 흔히,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산업혁명과 밀접한 사고관을 가지는 이런 근대적 인간이 바로 현대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걸리버는 누군가의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가 영웅적인 승리를 통해 자기 의지로 신분 상승을 획득하고 맥가이버처럼 창의적인 사고로 당면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몸이 크던 작던 여왕과 각국의 윗선에 최고의 환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곳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채 계속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역설적으로 보면 사회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방황한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던질 수밖에 없도록 군집을 형성하는 인간의 오염된 사상과 의식의 행태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녹아있다고 봐야 한다.


근대적 인간 걸리버와 현대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상관성이 있을까? 먼저, 현대적 인간은 어떤 인간을 뜻하는지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현대적 인간은 세계는 하나라는 글로벌 시민의 정체성과 다양한 문화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 정보화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인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성별, 종교, 인종, 성적 차이 등의 요인을 인식하여 포용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환경의 보호와 지속적인 발전을 중요하게 여기며 유연한 사고와 적응력으로 새로운 상황과 미래에 도전적인 정신을 가지고 창의적인 의식을 가진다. 또한 사회적 윤리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타인과 공감을 증대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기 위해 소통을 중시한다. 그럼, 정말 그러한가? 근대적 인간도 그렇고 현대적 인간도 정말 훌륭하다. 반에 반만 지켜도 최고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집약적인 다양한 문명의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왜 더 코쿤화되어 가는 것이며, 정치는 독재적이고 사회는 분열되고 종교는 변질되고 문화는 저급해지며 정신은 황폐화되어 가는 것인가? 세상이 아이러니할수록 이론과 다른 세상의 실상이 이해가 가는 것은 인간들에 질려 침묵에 빠져버린 걸리버를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한바탕 세상을 탐험하고 방랑을 끝낸 걸리버는 지긋지긋한 인간에 대한 혐오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고 마구간에서 말들과 대화를 하며 여생을 보낸다. 판타지는 현실에선 작동하기 힘들다.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수록 이상하게 엇나가고 싶은 심사는 방랑의 투사에게 내재된 반항의 근육이다. 마법의 성을 빠져나온 걸리버 여행기의 말로(末路)는 삶을 짓는 사람에게 자각 없는 상상은 곧 끔찍한 악몽의 현실이 됨을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쓰면 왜 다 비극이 되는 거 같지?

......

좋은 약은 쓴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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