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 Hoffer photographs by George Knight] 'Truth Imagined' Book Inside Cover
존재를 표현할 때 자화상이나 포토그래피가 유용하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이나 그림이 각광받지 않은 시대에는 조각이나 부조가 한 사람을 나타내기에 적합했다. 현대 철학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사진들로 지성적인 존재감을 표출한다.
"나 이외는 다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에릭 호퍼>
모든 과오와 승리까지도 스스로에게 귀속되는 독립적인 사고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Eric Hoffer, Truth Imagined 2003》는 일평생 독학한 부두노동자로 사회철학자로 프롤레타리아 철학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거칠면서도 담담한 아포리즘(Aphorism)과 교감하는 시간이다. 짧고 단순한 그만의 진리 해석은 함순(Kunt Hamsun), 라게를뢰프(Selma Lagerlöf),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처럼 귀중하고 값진 작가들의 긴 말들을 참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거리에서 생각의 먼지가 씻긴 것인지 복잡다단한 삶으로 보이지 않는 에릭 호퍼의 묵직하고 잔잔한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거친 호밀빵 한 덩이를 씹으며 부둣가에서 찬바람을 맞는 느낌이다. 에릭 호퍼의 아포리즘을 정리하면서 매끄럽지 않은 영문 번역은 한국어로 다시 번역해 본다.
교육 Education
교육의 중심 과제는 배우려는 의지와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다. 교육은 배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인간 사회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자녀가 함께 학생이 되는 학습 사회이다.
The central task of education is to implant a will and facility for learning; it should produce not learned but learning people. The truly human society is a learning society, where grandparents, parents, and children are students together.
권력 Power
절대 권력은 인도적인 목적으로 행사될 때조차도 부패한다.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여기는 자비로운 전제군주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양과 같은 복종을 요구한다
Absolute power corrupts even when exercised for humane purposes. The benevolent despot who see himself as a shepherd of the people still demands from others the submissiveness of sheep.
좌절 Failure
우리는 주로 스스로 탁월함을 이루기 희망할 수 없는 문제들에서 평등을 요구한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갈망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것을 발견하려면, 그가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이 시험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좌절한 자본주의자들이다.
We clamor for equality chiefly in matters in which we ourselves cannot hope to attain excellence. To discover what a man truly craves but knows he cannot have we must find the field in which he advocates absolute equality. By this test Communists are frustrated Capitalists.
희망 Hope
절망과 비참함은 정적인 요소이다. 봉기의 역동성은 희망과 자부심에서 나온다. 실제적인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향한 희망이 사람들을 반란으로 이끈다.
Despair and misery are static factors. The dynamism of an uprising flows from hope and pride. Not actial suffering but the hope of better things incites people to revolt.
언어 Language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대답은 툴툴대는 소리나 몸짓으로도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인간다움은 사람이 첫 번째 질문을 했을 때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사회적 침체는 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려는 충동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Language was invented to ask question. Answers may by given by grunts and gestures, but questions must be spoken. Humanness came of age when man asked the first question. Social stagnation results not form a lack of answers but from the absence of the impulse to ask question.
행복 Happiness
이것이나 저것만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결점이 많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억누르는 것이다. 과도한 욕망은 이처럼 우리의 무가치함에 대한 인식을 억누르는 수단이다.
To believe that if we could but have this or that we would be happy is to suppress the realization that the cause of our unhappiness is in our inadequate and blemished selves. Excessive desire is thus a mean of suppressing our sense of worthlessness.
종교 Religion
종교는 신, 교회, 성스러운 목적 등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부수적인 것들이다. 종교적 집착의 근원은 자아에, 혹은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반대면이다. 인간만이 종교적인 동물이다. 몽테뉴가 지적했듯이,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병이며 다른 어떤 생물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Religion is not a matter of God, church, holy cause, etc. These are but accessories. The source of religious preoccupation is in the self, or rather the rejection of the self. Dedication is the obverse side of self-rejection. Man alone is a religious animal because, as Montaigne points out, 'it is a malady confined to man, and not seen in any other creature, to hate and despise ourselves.'
증오 Hatred
증오가 정당한 불만보다 자기 경멸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증오와 죄책감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보여진다.
That hatred springs more from self-contempt than form a legitmate grievance is seen in the intimate connection between hatred and a guilty conscience.
돈 Money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상투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악의 본성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Whoever originated the cliche that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knew hardly anything about the nature of evil and very little about human being.
"친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이다. 나의 경우 예술가가 나의 운명이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에릭 호퍼>
에릭 호퍼의 여정은 육체적 삶이 거칠어질수록 정신적 삶이 배움으로 가득 차는 여행자의 행로를 밟아간다. 정기교육이 아닌 독학으로 거친 삶에 순응하며 미지의 길을 여는 모습은 진실을 상상해 내고 미지의 세상을 눈앞에 보여주는 근면한 노동자의 체취를 풍기고 있었다. 떠돌이 노동자에서 방랑자로, 사상가로서 사회 적응 불능자들 사이에서 불능의 조건을 헤치고 시를 짓고, 글을 쓰고, 식물학에 빠져들고, 몽테뉴 이야기로 사람의 호감을 얻는 그는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때로는 뜻밖의 사랑에 환호하였다가 사랑하는 여인과 길이 맞지 않으면 다시 방랑자로 돌아갔고 만남과 이별 속에서 방황을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그려나갔다. 그는 삶의 자립과 유지에 돈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자유와 평등이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인지하고 돈이 지배적인 역할을 유지해야 인간의 진보성도 유지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돈의 속성과 예술가의 본질에 대한 사색이 함께 드러나는 종장은 중첩적인 인간의 삶, 생계와 자유에서 갈등하는 과거부터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문명의 몰락은 통화의 붕괴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을 들으면서 전자화되고 데이터화되는 미래 사회는 화폐도 사라질 텐데, 이미지적인 돈이 사라진다면 문명도 몰락할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아마 그땐 인류는 이 세상의 영원한 이방인이자 다른 별에서 방문한 예술가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호퍼의 인생에도 행복은 있었다. 헬렌과 함께 한 생활에서, 아니 《맹신자들 The True Beliver》의 출판이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참된 행복의 순간을 맛보았다고 회상한다. 들뜬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기에 순간의 우월감이 꾸준한 확신으로 전환되어 노력하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는 평상심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는 용서하는 마음은 용서를 낳으며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불만이 후회하지 않도록 타인을 용서하라는 말 앞에서 나는 타인을 향한 용서조차 인지하지 않게 편히 떠나가리라 생각하며, 찬찬히 그 여운을 새겨두었다.
교육에 관한 호퍼의 아포리즘에서 보이듯이 그는 의미 있는 생활은 배우는 생활이며, 자신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D.H. 로렌스도 글 쓰는 동안에는 노이로제 같은 질병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했듯이 호퍼는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 자신을 끌어내며 더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나에겐 글쓰기는 기억의 치유 과정이자 생각을 정화하는 순환기적 디톡스이다. 나이, 세대차, 젊음, 청년운동과 산업화 등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편안한 어조로 제기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한 경험이 주는 방랑철학의 짧은 아포리즘이 그냥 먼지로 흩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