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PICAL MALADY

<열대병>, 그 환상을 호흡하다.

by CHRIS
[TROPICAL MALADY, Apichatpong Weerasethakul 2004] MOVIE POSTER


광기의 여름은 심각한 돌림병처럼 열병을 몰고 온다. 나는 무더위를 사냥할 도구를 갖추지 못하고 헐떡였다. 숲의 사냥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총을 빼앗겼고 밤의 눈은 열사에 사로잡힌 용광로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부는 야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사회에 길들여진 인격은 얼음을 깨는 시늉을 한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흐른다. CRASH가 호주머니를 흔든다. 우리는 야수들의 전쟁을 기억했다. 정글 로맨스. 말라리아 로맨스. 악한 멜로디. 연못 속의 돌은 금도 은도 되지 않은 돌, 그 자체였다. 오토바이, 전화, 키스… 손으로 전해지는 말초신경 스킨십. 사랑을 느끼면 뒷모습을 보이는 남근목. 폭력이 넘치는 거리. 소독약을 뿌리며 달리는 군용차. 가축들은 길 잃은 영혼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삶은 한 순간의 꿈이어라. 버스 밖으로 안부를 묻는 네 다정한 모습, 오두막에서 탄탄한 다리를 베고 누웠던 여유, 극장에서 손장난 하던 우리들, 에어로빅의 구령이 뛰노는 놀이터에서 꼬치를 나눠먹고 동굴탐험을, 골목에서의 키스하며 멋쩍게 이별하고 빈 침대에서 웃는 사진을 보며 추억을 정리한다. 마음먹은 대로 변하는 호랑이 귀신은 기억이 바라는 모습으로 탈바꿈을 한다. 정글을 어슬렁거리며 영혼을 유혹한다. 실종된 사람들과 동물들은 괴물의 가슴에 갇혔다. 퇴비를 뿌리며 경작되는 논밭과 달리, 무시무시한 정글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 짐승의 발자국과 그가 먹었던 흔적을 발라놓았다. 고독함이 동물의 형체 속에 굳는다. 영혼은 긴 생명력을 갖는다. 사라진 사람을 생각하며 손전등의 불빛을 깜빡인다. 사나운 발톱은 나무 위에 그리움의 자국을 남긴다. 호랑이의 그림자는 어떤 슬픔.


난 먹이가 되었고 그의 위장을 떠돌며 친구가 되었다. 먹고 먹히는 정글의 세계에서 외톨이 영혼은 동물의 울음소리를 따라 한다. 우린 너무 쓸쓸해서 잠시 모습을 바꾸었다. 동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를 깊게 맡으려고 야수가 되어간다. 동물들의 말을 배우지 않고선 나의 세계는 적적해서 말라죽을 거야. 달빛을 교란시키며 주술을 부른다. 나를 무장시켜 그를 쏜다. 그는 나인데! 죽은 영혼은 반딧불이 되어 나무를 빛나게 한다. 이제 동물들은 자유를 되찾는다. 타인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생존은 껍질을 죽이고서 나 자신을 보게 한다. 영혼과 육신과 기억은 동물도 아닌 사람도 아닌 그림자를 지웠다. 우리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의 노래를. 소리가 들리는가. 정글은 숨을 쉰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립 로르카 디코르시아 (Philip Lorca Dicorcia)를 떠올렸다. 그가 찍은 태국의 밤공기는 조금 더 건조하고 도시적이며 성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었지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Apichatpong Weerasethakul)과 같은 곳을 찍었다는 것 때문에 쉽게 연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피찻퐁의 시선은 깊고 어둡다. 무방비의 신화를 열면서 습한 정글의 시선을 들이댄다. 청년들의 일상은 숲으로 들어가며 생소한 내용의 태국구전을 전했다. 낯설지가 않았다.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영혼의 결합, 같은 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은유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겠지. 왜 우리들은 동물로, 사람으로, 남성으로, 여성으로 그 모습이 갈렸을까? 가볍고 경쾌한 관찰이 지나가면 무의식에 감춰진 두려움이 맺힌다. 잔잔하게 흐르는 삶에 대한 시각.


2005. 8. 14. SUNDAY



태국음식 똠얌꿍은 프랑스의 부야베스 그리고 중국의 샥스핀과 함께 세계 3대 수프라고 불린다. 언젠가 똠얌꿍이 세계 최고의 미식타이틀을 얻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마케팅에 따라 맛의 순위는 바뀔 수도 있는 것일 테니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처음 맛본 똠얌꿍은 생각보다 밋밋했다. 짜고 달고 시고 맵고 꿈꿈해서 맛있다고 하기보다 불맛이 뜨겁게 섞인 오묘한 향과 분위기를 느끼며 "아, 이것이 열대지방 맛이구나"를 되뇌었다. 일전에 그리스로 가는 여정에서 태국에서 네 시간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 태국의 첫인상은 피부를 뜨겁게 쓸던 후덥지근한 촉감이었다. 공항의 유리문 안으로 불어오던 후끈한 열기에 차가운 겨울이었던 한국과 정말 반대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온도로 체감했다.


올해는 최장의 열대야라고 함에도 예전보다 덥지 않게 느껴진다. <열대병 TROPICAL MALADY>은 제목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였다. "MALADY", 멜로디로도 들리는 '질병'을 가리키는 어감은 그 심각한 질환조차 문학적인 태도로 발음하게 한다. 병균이 가득할 것 같은 'Disease'나 연약한 패배 같은 'illness'와는 다른 표현적인 접근이랄까. 태국영화를 볼 때면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동물이 되는 세계에서 붉고 푸른 성적인 색감이 끈적하게 살갗을 스친다. 머릿속도 기억의 열대병에 걸렸는지 영화를 봐 놓고도 기억이 안 난다. 영화를 지켜보던 맹수의 상처 입은 눈과 형광빛 야간조명에 물결처럼 반사된 여름날의 그을린 얼굴은 기억난다. 아마도 그건, 화면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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