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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ACHITECT : A SON's JOURNEY

[FILM-DOCU] 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 Louis Kahn

by CHRIS
[MY ACHITECT : A SON's JOURNEY 2003] MOVIE CUT COLLAGE WORK by CHRIS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간 것이다. 과도기일 뿐이다. 그는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이곳에는 현재가 존재하고 있고 과거도 존재하고 있고 미래도 늘 존재하고 있다. 시작은 그러했다."


나다니엘 칸(Nathaniel Kahn)은 그의 뿌리를 찾아 세계를 떠돈다. 아버지가 만든 건축물을 본다. 생전엔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굴해 내고 조각난 어린 시절을 맞추며 영원한 방랑자이자 건축가로서의 칸의 생을 되짚는다. 마음만 먹으면 억만장자도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빈털터리가 된 채 여권에서 자신의 주소를 지우고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의문사한다. 시신을 거둬가지 못하게 죽음도 방치한 남자.


“어째서 그러한 죽음을 선택했나요?”


아들은 심란하다. 뜸하게 집을 찾아왔던 아버지, 그가 온다는 전화 연락을 하면 코스요리와 마티니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엄마. 밤늦게 아들의 침대에 앉아서 코끼리와 원숭이가 노는 인도에 대해 묘사하던 비밀이 많은 모험가이자, 가족에게조차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았던 별난 예술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11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조우한 배다른 형제. 어떻게 세 가정은 프리즘의 뒷면에서 서로를 모르고 평온하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주변인들의 증언, 유대인의 가계, 빛과 어둠.


겹겹으로 둘러싸인 질감의 세계를 거닐던 루이스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 같지는 않다. 내가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어떤 여정이 될 것이며 무슨 의미를 안겨줄 것인가? 허허벌판에서 얼굴을 비추는 건축물을 짓고, 모세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영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 작품으로 인생을 발굴하던 루이스 칸의 비현실적 조감도는 아들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깊은 애정을 담은 여정의 끝엔 세계적인 건축가로 알려진 신화의 존재가 아닌, 인간 루이스 칸(Louis Kahn)이 자리한다.


2005. 9. 4. SUNDAY


뿌리에 대한 탐구는 나에겐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수렵사회부터 힘과 살육으로 구성된 부계사회는 같은 성(性)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에 대한 혈연의식과 아버지의 성(姓)을 물려주는 대를 잇는 작업들을 통해 소유욕이 강건한 물질문명의 유물체계를 건설했다.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사회가 집중하는 과거의 인간들이 남긴 업적에서 지구 안 공간 확장의 역사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살육하고 쟁취하는 피투성이로 이뤄진 시간을 기념하는 행위가 과연 우주라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질 미래의 고립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의미롭고 필요한 것인가 묻게 된다. 선조와 부모에게서 위대함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에게는 담담함만이 흐른다. 근원에 대한 물음은 혈연을 거슬러 자랑스러운 과거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발밑으로 직진하여 바로 땅끝 아래로 떨어진다.


일곱 살에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뿌리 Roots: The Saga of an American Family》를 읽었다. 모호한 뭉텅이로 얽힌 과오의 역사, 자유에 대한 쿤타 킨테의 의지만 읽었던 손바닥만 하던 아주 낡았던 책. 1978년 3월 25일에 출간된 책이었으니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세로줄로 읽어내리는 옛날 방식의 책은 한자가 중간중간 섞여있던 누군가의 소장품이었다. 어머니의 책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지적이었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목적 없이 날아오는 매서운 손을 대할 때면 울분과 엄격함의 단어가 혼재되었다. 아버지 또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상함의 껍질 뒤로 동굴 속에 가라앉은 아집과 웅크린 귀먹음을 알지 못했다.


누구나 갖는 부모님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이나 존경심은 없는 것 같다. 삶을 모를 땐 사랑했었고, 살아가는 순간에는 의문을 가졌고, 삶이 막힐 땐 이해하지 못했고, 살아가면서 분노했고,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각자 가계와 혈연에 대한 추억이 존재할 것이다. 족보까지도 던져버린 자에게 남는 것은 무심한 회한인가.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 그 누구도 나의 삶에 물을 수 없게 완벽하게 보여야 했다. 살아가는 자에게 삶을 물을 권리는 오직 삶을 지속시키는 자신에게만 있어야 했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체와 몸의 정중앙에 연결된 끈을 끊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립을 향한 분리의 흔적이 있듯이 홀로 서기 위한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는 피를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누구는 그 피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언젠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될까.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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