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wars & the Episode Series, 1977-2005] PHOTOSHOP EDITED by CHRIS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의 이야기 구성 형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기묘한 팔(8) 자의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막에 불시착한 별처럼 중간에서 시작돼 막이 종결되고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중간에 이르러서 막을 내리는 에피소드(Episode) 시리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3과 뒤집힌 3의 결합은 8, 그렇다면 루카스는 운명을 믿고 있는가? 스타워즈는 제작되기 이전부터 우주에 대한 인간들의 상상력과 불가시(不可視)한 미래, 연기를 지핀 선명한 과거와 불길을 잊은 현재, 그 틈새로 지탱하고 있는 사다리 형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꽈배기처럼 비틀어 놓은 줄거리의 행방은 종식된 것처럼 보이는 분열과 상쟁의 시기가 영원한 별들의 전쟁으로 구연되면서 광대한 서막을 올린 것인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스타워즈는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피어났던 폭발적인 승리로는 좀체 만족하지 못하고 실제의 전쟁을 예견하는 만화경으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물론, 제다이의 원로수장인 요다(Yoda)가 "제다이(Jedi)에게 있어서 승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또한 의미롭지도 않다"고 말했지만 스타워즈 오리지널 삼부작 (STAR WARS TRILOGY)이 처음 등장한 1977년, 그 곁가지인 에피소드 시리즈가 마감된 2005년, 28년의 격차는 테크놀로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체계를 완성하면서 화면과 심리적인 격차를 줄여놓았다. 그러나 정극이 주는 기본적인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 긴밀성에서 이전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
"우리에게 완성된 영화란 없다. 버려진 영화만 있을 뿐이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는 시공의 우주 바둑판에서 그 말을 실현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언어가 현실이 되어버린 미완의 공백을 새로운 에피소드를 첨가하여 완성도를 높이려 하였다. 내부적인 효과나 내밀한 사상까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결말을 보았기 때문일까? 내 마음은 이름도 모를 저 수많은 별들 속에 박혀버렸다.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인간의 모습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하늘의 태양이 둘일 수 없다. 주인을 둘 섬길 수 없는 모래의 바다는 오아시스 곁에서 결이 없이 갈라진다. 하나가 지면 하나가 떠오르는 생명윤리의 질서는 암흑과 빛의 양면분할보다 확연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근거한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는 자본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 질서를 통해 재편되었다. 스타워즈에는 훌륭한 정치경제학 계보가 존재한다. 공화국 (Republic)과 의회 (Parliament), 총독 (Governor-General)의 자치권이 무너진 독재의 형상. 인류와 함께 한 수천 년의 시간 태엽을 되돌려보면 패러다임 (Paradigm) 주변에서의 힘의 이동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섬나라의 이끼가 포자분열을 하는 동안 전제적인 독재체제와 일당 군주로 형성된 황제의 권위는 꽃가루보다 쉽게 무너지고 다시 어둠의 봉기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거치며 평극과 비극의 궁전에 악의 세력이 허술하게 세워진다. 그리하여 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멍을 간직한 채 화합이 붕괴된 공화국은 권위에 불복종한 반란군을 낳고, 이를 입증하듯 지구 도처에서 벌어진 내전은 힘의 균형을 유지할 새 없이 끊임없이 총성을 울려왔다.
스타워즈는 지구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인간의 내외(內外)에 존재한 각색의 특징을 지닌 문명(Civilization) 이데올로기의 충돌 방식을 우주에 산재한 별의 폭증으로 시각 전환한 영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루카스가 품었던 개인적인 생각의 실현이기도 하고 집단의식의 표출이기도 할 것이다.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1993년부터 거론되어 온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유명한 문명 충돌의 자기장 법칙의 내핵에는 의식의 충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곳에 학구적인 오류가 뭉칫돌로 섞여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것을 뒷받침하듯이 우리들의 역사에서는 씻을 수 없는 문명 이외의 치열한 오욕의 굴레들이 존재했음에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인 분쟁의 조정기구로 불식되지 않는 불만한 기치는 끈질기게 잔존해 왔기 때문이다. 과학문명이 발달되면서 첨예화된 분쟁과 고통의 강도는 식을 줄 모른다. 현재의 정황을 봐도 역시 그렇다. 수단의 내전, 우크라이나 키예프사태, 소강된 북핵문제까지 세계의 솥단지는 기포로 들끓고 있지만 일상은 주목하지 않는다. 목전에 닥친 위협이 아니고서는 광대한 문제에 대해 건드려봤자 털끝으로 부는 바람임을 모두 인지한 것인가? 외계에 대한 위협이 타오르거나 죽음의 별이 침공해 올 때 깊은 두려움이 생길 것이고 그때서야 분노가 발생할 것이다. 시간을 대비하지 않는 철학은 엠브리오(Embryo)의 무(無) 관절을 자른다 해서 무턱대고 눈썹을 밀지 않을 터인데 환호성만 지르는 과학적인 쾌거는 인간의 욕망을 얼마만큼 장대하게 연장시킬지 두려움이 앞선다. 시련과 고통의 서막은 황폐한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고요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허술한 우주선을 타고 잠시 내핵(Inner Core)으로 돌진한다. 영화 <스타워즈 Star Wars>는 외계와 내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힘(Force)에 대해 묻는다. 힘, 이것이 바로 스타워즈의 핵심이다. 도가사상에서 보는 힘은, 자신을 원(0 or Circle)으로 볼 때 외부와 내부의 대립이 소멸하는 기점을 말한다. 힘의 역동성은 무위(無爲)에서 가장 진실하게 진동하고 작용하는 원리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자와 남자의 결합처럼 음과 양의 조화이며 불과 얼음의 공존장인 것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지구 자신인 원 속의 내부와 원 밖의 우주라는 공간의 충돌이며 선과 악, 예지와 미지, 본능과 추론, 의식과 무의식, 운명과 개척의 대결이 일어나는 십자군 전쟁장이다. <스타워즈 I> 편에서 암흑세계와의 대립을 십자군의 결투라고 칭했던 것, 또한 제다이(Jedi)라는 기사(Knight) 키워드를 쓴 것도, 왕이나 황제, 정의기사단, 공주, 마법, 종교, 기지와 지혜, 사악함과 기만 속에 서양인들이 의문을 가져왔던 외계에 대한 두려움, 즉, 한때 동방이었고 사교였고 밀교였던, 이제는 미개척지인 편견의 우주를 풀고 싶은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는지 주목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편견을 버리라"는 장난감 병정의 말은 결국에는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융합을 선언한 도가사상에 연유를 두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한 가지 예로 오비완(Obi-Wan Kenobi), 그는 궤도에서 머무르는 뜻을 지닌 오비탈(Orbital)과 그릇을 뜻하는 중국의 완(碗 Wan)을 따른 복합적인 결합의 이름이다. 실체를 담는 그릇이 궤도를 이탈하면 다른 행성을 파괴하거나 영원히 우주를 유영해야 하는 여정에 이르게 된다. 솔직히 어떤 작품이건 해설자의 사상에 따라 별 것 없는 공식도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은 사양하고 싶다. 워낙 방대한 사상적인 기조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음양의 조화는 핏덩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국 모든 해답을 풀고 우주세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열쇠고리는 기계와 인간의 손이 탄생시킨 이란성쌍둥이 레아(Leia Organa) 공주와 루크 스카이워커 (Luke Skywalker), 그들의 자식들이 펼쳐갈 시대에 활짝 문 열려있다.
사물을 살피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한다. 완성된 원의 한 면을 비틀면 주전자가 되고 뚜껑을 열면 물컵이 되고 길쭉하게 늘려 장식을 주렁주렁 달면 사람의 모습이다. 내가 최고의 고수이고 악의 화신이며 선의 실현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쓰러뜨리면 최고의 힘을 얻게 되고, 4차원으로 가는 의식의 길목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길로 가게 되어있다고 하나, 그 궤도는 누가 만들어 논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자신, 타인, 미지의 존재? 나의 본능과 감정을 믿으면 무한한 힘이 언제나 자신의 예지와 함께 하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답답스러워해 왔던 부분은 스스로도 조절할 수 없는 타인의 내밀한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차이로 인해 이 세상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구름 도시에서 떠돌다가 눈의 세계에서 꽁꽁 얼어가는 위기에 봉착해 있는 우주사냥꾼의 비애랄까. 하늘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사막과 얼음의 장애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확실히 전쟁이란 사람을 위대한 반열로 올려놓지 못한다. 인류를 대량 살상하면 역사에 기록될 영웅이 되고 소수를 죽이면 철창에 갇히는 예외의 법칙이 있지만 모험과 재미가 현재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자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지 분노와 공포와 공격심으로 가득 차 재빠르고 매혹적인 마수에 빠져들 만큼 어리석은 용자는 아니더라도, 평온한 상태로 접어들기엔 지반이 부실함을 느끼고 있다. 돌 위에 돌을 올리려면 뾰쪽한 돌보단 면이 갈린 평평한 돌이나 첨예함도 안을 수 있는 홈이 파인 돌이 더 쉽다. 차이라는 것은 마음속에 가장 강력하게 자리한다. 배운 것을 기억하여 하나의 희망과 또 다른 희망을 낳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죄는 밉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 할 텐데, 다채로운 연주는 어느 계곡에서 실현될런가.
조립식 기계로 놀아본 것도 세기를 달리했고 악마의 입에서 천년 간 녹아있다가 입만 살아서 놀고 있는 이천 오 년 어느 날 밤이다.
"누구나 때가 오고 날이 저물면 돌아갈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을 생각하면 욕심을 가져도 무슨 소용인가 싶은데 모두들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무한한 시간이 지나도 위대함의 종착점이란 제로의 상태인 것이고 영원하고 살고 싶은, 남보다 더 잘나고 싶은 욕망도 종지에 이르면 관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핏줄에 흐르는 힘을 불식할 수 없다면, 저항이란 무의미하고 미로에 빠진 의도는 헛된 꿈이 될까?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만큼은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생명을 위한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나와 다르나 같은 세상에서 몸담고 사는 이상 물 속이든 하늘이든 땅이든 우주든 모든 생명체가 공존 관계에 있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진실이 살아있다는 희망찬 우연함을 믿으면서 파괴로 종결된 푸른 별에서 사는 것은 추운 경험이다. 전복된 슬픔들. 분리와 테러와 악몽이 애정과 소유와 사랑과 다를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 조금 더 커지면 파멸이고 조금 더 줄어들면 안정이다. 안정이라는 애착감도 깨뜨리고 나를 놓아줬으면 좋겠다. 고칠 수 없는 것들도, 되돌릴 수 없는 사실도 인생이 흐르는 길에 놓여있다. 기계와 인간이 결합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평화로운 터전에서 살아갈 아이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솟아오르는 성단을 보면서 상상해 봐야겠다.
2005. 5. 21. SATURDAY
잠이 오지 않을 때 별을 보면서 무한히 생각했던 일들은 전에 보다 가깝게 실현되고 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편협한 정치색을 띤 인간들의 싸움질은 변치 않고 극성을 띤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확전 되었고 남북한의 결합은 고사하고 각자도생을 원하는 남북 지도자들과 자신의 터전이지만 먼 곳에 있는 결정자에게 권리를 준 비주체적인 사고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는 격렬히 표류하고 있고 민주와 보수로 갈린 세계는 경찰대장을 뽑느라 정신이 팔려서 환경문제든 전쟁이든 삶이든 어디가 구멍 났는지 관심이 없으며 유대인과 아랍계의 내전은 이스라엘과 하마스로 굵직하게 전이되었다. 가난과 분배,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남아메리카는 여전히 혈육을 도살하는 내전이 진행 중이다. 각지에서 전쟁과 분쟁은 어디에서 촉발할지 모르도록 전운이 가득하게 악화일로로 변형되고 있다. 문명의 충돌과 폭발 뒤에 새로움의 생성을 바라는 자연적인 원리를 기대하기엔 기계문명이 개입된 이후, 난립한 개발의 현장으로 인해 지구라는 환경의 보호막은 깨졌다. 정자와 난자의 충돌로 끊임없이 생산되는 인류는 정말 많긴 하다. 죽지도 않고 영원을 꿈꾸는 방법은 신을 닮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더불어 멈추지 않고 고안되고 있다. 어차피 수면으로 가라앉을 것이라면 잠시만이라도 평화롭게 살기는 힘든 것인가.
근래 스타워즈에 대한 감상이 발동한 것은 작업 도중 거래처 실장이 입은 스타워즈 캐릭터가 프린팅 된 티셔츠를 보면서였다. 빈티지하게 인쇄된 스타워즈. 검정의 무채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는 나로선 프린트된 옷은 성숙함보단 빛바랜 젊음의 상징으로 보이곤 한다. 통굽 슬리퍼와 와이드 청바지, 프린팅 티셔츠. 평소의 나로선 입지 않을 매치에 계속 눈길이 갔다. 한번 쏠리면 그것만 눈에 어른거린다. 이게 요새 친구들이 말하는 핫한 젊음인가?
스타워즈 시리즈는 2005년 이후에도 제작되어 소개되었지만, 스타워즈의 창조자, 조지 루카스가 참여하지 않는 영화는 의미가 없으므로 보는 것을 중단했다. 영화를 볼 시간도 없었던 듯하다. 잠시 뒤돌아보면 시간이 훌쩍 가 있다. 시간의 속도를 바꾸고 싶다면 고통스럽고 괴롭고 벗어나고 싶은 순간을 절실히 온몸으로 느끼면 된다. 자신의 지점에서 탈피하려고 애쓸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 하루를 비우고 머리에 남은 잔영은 살아온 순간의 흔적들이다. 인간이 외계인이 되건, 외계인이 몸속에서 뚫고 나오건, 외계인의 침공을 받건, 외계인을 정복하건 간에 존재의 발산과 행로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아직은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살아있다. 반짝하고 빛나는 저 순간은 소멸의 흔적일 수도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먼 거리의 관찰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상상은 무한대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