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man and the Sea , Ernest Hemingway. 1951]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The old man and the Sea, Ernest Hemingway》
《노인과 바다》에선 노인과 바다와 보이지 않는 물고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한 소년이 있다. 독백처럼 한숨을 쉬어보자.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남는 것은 외적인 물질(外物)인가 아니면 정신(精神)인가. 삶의 기나긴 항해, 준비된 시간, 고립된 적막, 너와의 힘겨운 투쟁. 좌절의 침묵, 뼈저린 후회, 절망의 환희. 노인 산티아고가 수없는 패배 후에 무심(無心)으로 물고기를 포획한 것은 삶을 위한 투쟁이고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번잡한 세속에서 일어나는 암투는 며칠간의 자기 인내와 물고기와의 견제 속에서 이뤄졌다. 자신이 얻은 걸 주위에 선포해 선망을 얻으려던 생각은 뜻하지 않은 저항에 의지가 조금씩 꺾여갔고, 그는 포기를 배우며 안온 속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노인을 떠안은 바다는 어떤 얼굴인가.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부드럽게 불러대는 여성적인 'La'인가. 경쟁 대상이나 적수로 여기는 피비린내 나는 목소리의 남성적인 'El'인가. 난 'La'가 좋다. 바다의 앞에는 'La'를 붙이고 싶다.
라 메르(LA MER)!
아름답고 광활한 바다.
부드러운 동질의 속성이라 섞이지 않을지라도,
좋은 일이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자조만이 바다를 뒤엎을지라도,
그대로 표류해 버리리라.
쥐가 나버린 발을 붙들고 거친 포말을 헤치며
황금 돌고래를 찾아 절망에서 빛나는 물거품을 뿜어보리라.
그래.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기가 고기로 태어나고
어부가 어부로 태어났듯이
우리의 싸움이 한바탕 꿈이기를.
부패할 살들은 살인귀의 입에서 부유해 버리고
앙상한 뼈만이 생을 가로지르는 풍광이기를.
담담한 하루에서 밋밋한 소리만 낼 지라도
환멸에 찬 고성방가가 조용한 바람에 쓸려간다면 행복이겠다.
헤밍웨이 글 중에서 《노인과 바다》는 생각거리가 가득했다. 헤밍웨이의 노련한 듯 카랑거리는 음성과 굵직한 자긍심 속에서 겉도는 듯한 이기적인 말발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구름 없는 한적한 바닷가에는 해풍이 서려있기에 다 날아갔다. 영화는 졸려서 잤나 보다. 꿈을 꾸라는 데 어찌 눈을 뜰 수 있을런가. 지루한 시간은 모두 꿈이 되어간다. 난 그대처럼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아니. 인생의 꿈을 움켜쥐는 사람 (A Snatcher at a dream of life)! 자유롭게 떠다니는 바닷물이 되고 싶다.
2004. 9. 29. Wednesday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완전한 존재로서 홀로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 만약 흙덩이 하나가 바다에 씻겨 나가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든다. 마치 곶이나 네 친구의 영지, 혹은 너 자신의 영지가 씻겨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 나를 감소시키는 일이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를 묻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고 있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묵상 17, 존 돈. MEDITATION XVII,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John Donne》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의 원제는 존 돈(John Donne 1573-1631) 신부의 산문집 《뜻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묵상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1624》 안에 수록된 <묵상 17 MEDITATION XVII>에서 차용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 쿠퍼가 나오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 영화는 작가 헤밍웨이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쟁 로맨스물로 명화극장에서 특선 명작영화로 편집되어 현충일이나 기념일이면 단골메뉴처럼 방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1936-39)이 터지자 전쟁특파원으로 참전했던 헤밍웨이는 자신의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존 돈 신부의 묵상 기도문에서 보듯이 원뜻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인가>이다. 인간의 죽음과 고통과 슬픔은 분열되고 파괴되는 세계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묵상을 하고 있다 보면 타자의 죽음과 정복에 익숙한 세계에 경종을 알리는 묵직한 종소리처럼 인간의 깊은 연대와 타자에 대한 관심, 죽음과 생과의 연결성을 되새길 수 있다.
삶의 목표인 물고기와, 삶의 터전인 바다와, 삶의 주체인 노인 자신이 처절한 삶의 투쟁을 벌이는 《노인과 바다》를 보면서 의문으로 그을린 생각이 바다 위에서 넘실거렸다. '왜 저리 큰 물고기와 싸워야 할까' '나이가 들어도 큰소리치고 호기로워야 젊은 모습인 것인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앤서니 퀸이 노인 산티아고로 분해서 나오던 영화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90>는 바다에서의 사투가 노인의 직업이자 삶의 긍지였기에 그의 투쟁적인 정신이 바다에서 표현되는 것은 자잘한 의문 속에서 당연하게 보였다. 아마 사람들에게 산티아고가 힘이 장사이던 시절의 젊음과 솜씨 좋은 날들의 호기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그의 투쟁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커다란 고기를 잡기 위해 작은 고기들을 먹으며 연명하는 한 남자를 보면서 청새치(Marlin)와 싸우는 것이 바다에서 먹고살기 위해서인지, 타인에게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낚아야 할 것이 자신의 업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파괴적인 살해를 위한 격렬하고 다정한 싸움, 그리고 다독일 수 없는 투쟁의 결과가 불러일으킨 반항적인 물고기 친구의 죽음과 그의 피가 불러들인 거대한 상어들과의 피 터지는 싸움. 뼈다귀만 남은 해체된 전리품은 한바탕 꿈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보여준다. 투쟁했던 대상의 온전한 육신을 보지 않는 이상은 노획한 전승물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거대한 실체를 가진 상어의 몸체로 오인될 만하다.
남성적인 용기와 진취적인 삶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가 헤밍웨이의 삶과 그의 사상이 반영된 글들을 바라보면 헤밍웨이가 표현하고 살았던 전후 세대 전진적인 삶의 형태는 아버지 세대들이 살아온 사냥개들의 시대와 닮아 보인다. 무엇을 위해 종을 울려야 하는지, <무기여 잘 있거라> 선언할 수 없게 연발하여 터지는 전쟁의 경고음은 희망차고 의미로운 것에 대해 고려하기보다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동물로 둔갑시켜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우리(Cage) 안으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도록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세계를 보여준다. 외마디 기합을 넣듯이 가부장적인 인간을 조련하여 현재 맡은 책임이 과연 무엇이고 내가 하는 행위의 본질은 어디에 있으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없게 등에다가 단단한 책임의 멍에를 지운다.
삶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 헤밍웨이의 글에서 가지던 거부감은 지금의 나를 만든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에게 생을 준 것에 고마워하면서도 자기만의 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아집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 정신병적인 착란과도 같은 탐욕의 입을 벌리며 생기를 빼앗아가는 변질된 얼굴들을 보면서 극렬한 구토가 발작해서 일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타인의 피로 이루어진 호전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에 자신의 꿈을 표현하고 생을 싣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헤밍웨이는 한마디로 정열 덩어리 그 자체였다. 주어진 젊음이 영원한 것인 양, 불도저처럼 도전하는 것들에 들이받고 하고 싶은 것에 매진하며 사랑을 느끼면 사랑하는 대로 감정에 솔직하려고 했던 상남자였다. 물론 그런 남자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친구는 될 수 있겠다. 멀찍이서 쳐다보고 작품세계를 응원하는 친구는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감정이나 생활이 부딪히게 된다면 삶의 결이 다르기 때문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육체적인 늙음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엔도르핀이 도는 흥분이 치달을 수 있는 결말은 죽음 밖에 더 있겠는가. 팽팽한 의식의 변질은 육체의 노화속도보다는 훨씬 천천히 진행된다. 갇힌 사회로 몰입되면 한방에 정신의 회로가 얽히면서 치매도 오고 망각도 오고 정신병도 엄습한다.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가 굽고 피부가 변색되고 시력이 약화되고 기능들이 고장 난다. 중년의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나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거친 사냥을 하고, 카리브해에서 파도와 싸우며 대어 낚시에 열중했다. 그는 경비행기 사고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내부에 내재한 강렬한 호전심이 그의 육체와 정신에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헤밍웨이는 윌리엄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등 그의 정신적인 문학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것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고 늙어가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우울증과 비행기 사고로 인한 후유증, 약물과 알코올로 고통을 참는 습관, 편집적인 증세와 비만, 고혈압, 디스크 손상, 화상, 자잘한 사고들로 인하여 그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은 버팅길 수 없게 된다. 62살의 헤밍웨이는 권총자살로 생의 투쟁을 종결하였다.
삶의 위대함은 타인들의 칭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맹렬한 인식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와 영혼을 다하여 삶에 대해 그릴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삶은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54년, 서면으로 대신한 헤밍웨이의 노벨상 수락 연설은 의미롭다. 고독 속에서 내재된 결핍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열매로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가깝고도 먼 죽음이 다가오기까지 한 순간의 격렬함과 흥분으로 미쳐버리기보다는 내일에 대한 꾸준한 믿음과 오늘의 성실한 행동으로 지난날 고독하고 조용하게 씨앗을 뿌렸던 삶의 꽃들이 아름답게 발아(發芽)하기를 소망한다.
Ernest Hemingway Banquet Speech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벨상 수락 전문. 1954
"연설을 잘하는 능력이 없고 웅변술에 능하지도 않으며 수사학에 능통하지도 않은 제게 이 상을 주신 알프레드 노벨의 유산을 관리하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위대한 작가들 중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들을 알고 있는 작가라면 이 상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작가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각자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대사님께, 작가로서 마음속에 담고 있는 모든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즉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때론 작가에게 행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의 글이 남을 것인지 잊힐 것인지는 작가가 소유한 연금술의 정도에 따라 분명해질 것입니다.
글쓰기는 최상의 상태에서도 고독한 일입니다. 작가들을 위한 조직들은 작가의 고독을 덜어줄 수 있지만, 작가의 글을 향상시킬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대중 속에서 자신의 고독을 떨치며 성장하지만, 종종 그의 작품은 퇴보합니다. 그는 혼자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가 충분히 훌륭한 작가라면 매일같이 영원을, 혹은 그 영원의 부재를 마주해야 합니다.
진정한 작가에게 각각의 책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하며,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작가는 항상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거나, 다른 이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때때로 큰 행운이 따른다면 성공할 수도 있겠네요.
문학작품을 쓰는 일이 이미 잘 쓰여진 것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위대한 작가들을 가졌기 때문에, 작가는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는 과거의 먼 곳까지 밀려 나가게 됩니다.
제가 너무 오래 말했군요. 작가는 자기가 말해야 할 것을 글로 써야지,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Having no facility for speech-making and no command of oratory nor any domination of rhetoric, I wish to thank the administrators of the generosity of Alfred Nobel for this Prize.
No writer who knows the great writers who did not receive the Prize can accept it other than with humility. There is no need to list these writers. Everyone here may make his own list according to his knowledge and his conscience.
It would be impossible for me to ask the Ambassador of my country to read a speech in which a writer said all of the things which are in his heart. Things may not be immediately discernible in what a man writes, and in this sometimes he is fortunate; but eventually they are quite clear and by these and the degree of alchemy that he possesses he will endure or be forgotten.
Writing, at its best, is a lonely life. Organizations for writers palliate the writer’s loneliness but I doubt if they improve his writing. He grows in public stature as he sheds his loneliness and often his work deteriorates. For he does his work alone and if he is a good enough writer he must face eternity, or the lack of it, each day.
For a true writer each book should be a new beginning where he tries again for something that is beyond attainment. He should always try for something that has never been done or that others have tried and failed. Then sometimes, with great luck, he will succeed.
How simple the writing of literature would be if it were only necessary to write in another way what has been well written. It is because we have had such great writers in the past that a writer is driven far out past where he can go, out to where no one can help him.
I have spoken too long for a writer. A writer should write what he has to say and not speak it. Again I thank you."
<Banquet speech, The Novel Foundation, 1954, Ernest Heming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