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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HOMO LUDENS

<디지털 호모 루덴스> 디지털 유희, 거미의 철학적이고 우주적인 상상

by CHRIS
[DIGITAL AMUSEMENT: DIGITAL HOMO LUDENS] 2005. 2. 6. PHOTOSHOP EDITED by CHRIS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의 <러브 LOVE>보다 훨씬 풍성한 이야기. 보고 만지고 찍고 느끼는 세계. <디지털 유희(遊戱) DIGITAL AMUSEMENT>. 각국 사람들의 창작적 시도와 디지털 세계에 배회하는 인간을 결합하여 종합 선물세트를 꾸려보자. "호이징가(Johan Huizinga :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디지털 갑옷을 입는다." 이런 흥미로운 놀이라면 거부하지 않는다. 정보를 수집, 전달하는 방식에서 쌍방향의 의사를 나누는 문화궤도로 비행을 펼친 퓨처 네트워크, 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1회부터 꾸준히 보아왔는데 처음의 엉성하고 낯선 경험이 익숙해졌다.

‘디지털 비트 0과 1 : 인간’에서 출발한 의식의 항해가 공유를 통해 서로를 일깨우는 놀이로 정착한 것은 자본과 권력 위주의 산업이 진행되는 현실에서 영상, 문화, 정치, 사회, 일상, 게임, 자연, 역사, 사람 등 "공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디지털의 무한변용 위치와 속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반기고 싶다. 복합미디어에 고삐를 놓은 인간, 원초적 욕망인 소유와 물자를 놓아두는 공간의 광활한 팽창가능성은 놀이로 가볍게 시작해 무한 극점에서 풀어야 할, 가깝고도 먼 미래의 곤혹스러운 사유로 남을 것이다.


물길 스쳐가듯 관찰하게 되는 미디어 장치를 보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급속히 진행되는 변화의 속도를 혼자의 힘으로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는 정말 생각을 하게 될까? "YES." 노동을 담당하던 사이보그 중에서 자기 회로를 통제하고 코드를 조정하는 돌연변이가 생성되어 자신을 부리던 주인에게 반기를 들게 될 것이다. 혹은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연인처럼 너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는 동안엔 죽음보다는 사랑이 낫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지능화되는 디지털 매체와 손잡아야겠다.

그는 친구가 될 것이다. 가린 곳에는 하늘을 보여주고 평지에서는 고개를 넘어가게 조력해 주는 친구. 자연주의 삶을 꿈꾸는 자에게 도시를 보여주고 그물의 생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에겐 우주를 보여주는 친구. 수단이 목적보다 상위로 올라서지 않겠지만 목적의식이 삶에서 가치를 상실한다면 역류는 가능하다. 매체에서 해방될 수 없다면, 매체접근 루트를 전자화된 의식과 결부시켜 신(新) 회로를 창조해 보는 거다.

주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극도의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오히려 일반적인 감각과 동떨어져버린 지금이지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가끔 굉장히 창의적이라 불리는 자들에게서 옹색함을 느낀다. 예술과 문화에서 발견하는 첨단에 대한 모종의 터부는 디지털 과학이 창작 영역을 침범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변화와 속도를 능가하는 디지털 역사(歷史)가 인간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존재 찬탈의 불안에서 발로 된 건 아닐까? 아니면 생계형 인간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예술(ART)이 정신을 효과적으로 다룰 자극성을 갖췄기 때문인가? 그럼 이 상태로 진행된다면, 초기에 변용 가능한 디지털은 권력의 주위에서 하나의 보조적인 상품으로 남지 않을까?


"아이는 유리 같다"라고 했다. 태어난 얼굴에 어떤 손자국을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전쟁 살상무기로 이용하기 위해 파괴적이고 강력한 시뮬레이션 용도로 키운다면 아슈라의 모습이 될 것이다. 화투를 치고 대리 운전하는 조수가 아닌, 고독한 인간의 조언자이자 친구로 만드는 시도가 필요하다.


전시를 보며 느낀 바가 많다. ‘디지털은 환상을 실현하는 계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스쳤다. 유한 시공계에서의 탈출! 나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타인과 유희적인 소통을 실현하기 위해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건 아니다. 콘텐츠를 낳을 시간과 잉여기술이 부족하기에 상상의 가게를 차릴 창구로서 인터넷에 접속해 있다. 대체에너지를 보관하고 나 대신 욕망을 뿜어주는 네트워크 거미줄은 적은 수의 결합으로 분자폭발을 실행한다. 객관을 지향하던 지평에서는 사견(私見)조차 0과 1이란 일률적인 숫자로 새겨질 것이다. 다름을 통합한 수(數)가 유동적인 광속의 시간을 거치면서 몸체는 죽이고 저장된 의식만 통과시킨다니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대자본으로 형성된 백남준의 디지털 미학을 갈구하는 대중과 달리 소외된 별의 혁명 분자는 구멍가게의 생기 어린 반란을 꿈꾼다.

미래의 지구에서는 예술과 문화가 특정인에게 귀속될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경의를 표하던 북과 창이 왕과 귀족에게 귀속된 핏빛 예술품과 살인병기로 변해버린 것처럼 따분한 인간들에게 자극은 극점에 도달해야 만족함을 안겨주고 ‘고급’은 대중의 피를 원할 것이다. 체험을 나누는 방식이 변해야 이 공격적인 모순을 탈피할 텐데 이 열쇠는 누가 쥐고 있는가? 인간! 맞다. 더불어 그 중심엔 디지털이 있다고 본다. 매트릭스나 스타워즈 같이 대규모 공장의 찌꺼기가 아닌 정수로 남아 있는 내면을 의식의 PDA (Personal Digital Assistant)로 전송하며 생산자와 감상자로서 동시에 감격을 공유할 것이다. 듀얼 모드(Dual Mode)의 통합처럼.


네트워크의 기계적인 발전의 차원은 이미 시공의 한계를 넘어섰다. 디지털 칩 속에 거대한 우주가 담겨있을지 발명자도 알았을까. 거대한 세계의 통합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세상을 흡수하는 틈(Crack)은 급진적으로 변모할 것이고 그것이 주류가 될지 모른다. 균일하고 평등한 점층의 통합이 아니라 커다란 풍선공처럼 지배적인 의식 공간이 확장되는 것이랄까? 생각하는 자만이 살아남게 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복제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앤디 워홀이 있지만 수프캔과 실크스크린은 상업적인 복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위대함이 없어도 시대를 건드려 동조를 얻어낸 그의 작품을 보며 비판을 조롱하는 조울적인 영민함을 보았다. 타인을 정복하고 조종하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를 펼치지 않는다면 자살하지 않고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 흐를 것이다. 윤회를 돌리는 짐을 덜기 위해서 삶과 연결되었으나 이를 탈피하기 위해 입체적인 상상이 절대적이다.

가상공간은 아직 분리되어 있다. 누군가 그랬다. 머리가 비워지면 따라가게 된다고. 잭(Jack)을 연결하는 동시에 힘겨루기 싸움에서 실패한다면, 타인의 집에서 영영 살아야 한다. 알 수 없는 대상을 좇는 건 관심이 없다. 출입구가 사라진 전시장에서 의식의 집에서조차 내가 사라진다면 존재감은 어디에 있을까. 미래를 지배하는 자는 고도화된 지능을 갖고서 녹색망(WEB)에서 탈출구를 상상하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을 세포처럼 다루며 가상 실현이 극대화될 때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몰입으로 몰아가는 입광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빛의 스펙트럼이 일선이지만 다방향으로 퍼지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도 비슷하게 퍼져가게 된다. 이는 디지털을 생활에 투입시켜 버린 자본가적 과학자가 운명의 동전을 미리 던져놓고 지켜보는 도박이다.

전시를 보며 솔직히 불안했다. 기계가 아닌 예술이라고 명명된 기술 작품을 만지며 조종되는 느낌이었다. 작가들은 디지털과 관객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거라고 선언했지만, 기계가 주는 중압감은 상당히 컸다. 공론화된 의식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결합을 통한 우주적인 통합으로 몰아간다 해도 틈을 바라보는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디지털의 첨밀한 선에서 타인이 놓쳐버린 공간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무기체는 무기체로 유기체는 유기체로 존재하지만 우주폭발의 빅뱅처럼 결합이 일반화되면 충격을 막을 수 없다. 내면의 악은 커다란 그림자로 세상을 덮칠 테니, 불행한 미래를 막을 건 디지털과 손잡은 당신의 상상력이 아닐까.


2005. 2. 6. SUNDAY




디지털 호모 루덴스 시대 :
공존을 위한 타자와의 사유적 거리
The Era of Digital Homo Ludens:
A Reflective Distance with the Other for Coexistence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는 한국을 뜨고 나선 관심에서 멀어졌다. 세상의 방정식에는 이미 디지털 호모 루덴스를 양성하기 위한 상업적인 복합미디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간혹 상상이 과하면 창조적인 예술가는커녕 미치광이 과학자가 된 기분에 사로잡힌다. 축제의 놀이는 공동체적인 화합에서 벗어나 공공의 유희를 상실하면 개인적 욕망의 노동과 정신적 탈진을 야기하는 쾌락으로 변질되어 간다.


이미 수십 년 전 호모 루덴스에 대한 우려는 디지털의 발달을 통해 급부상했다. 디지털 호모 루덴스가 현대 과학기술의 특혜적인 산물인양 미학자들과 비평가들과 철학자들, 과학자들 및 사회 이론가들과 정치적 지배자들까지 이 개념을 자신들의 이론에 사용하며 피지배층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 사용하였으나, 미래적 사고에 대한 관조를 가져갈수록 사유의 깊이를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역설적으로 디지털 호모 루덴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행위적 규칙인, 개별적으로 분리된 놀이 의식임이 드러나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가는 다양한 삶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재미를 넘어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머무름의 틀은 변치 않았다. 보여줌의 형식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빠름을 추구하고 정확성을 겨냥한다. 그러나 사물 속에 담긴 예술의 본질이나 우리의 마음이 추구하는 바는 다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사의 종말이 오거나 사물이 소멸되는 이유는 거리를 두고 타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놓여 있는 시간을 기다림을 가지고 바라보는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밀접하게 기계와 맞닿은 육체적인 편리함과 복종과 지배를 추구하는 최첨단을 지향하다 보면 유한한 살덩이는 부식되고 무한한 기계에 흡수되어 버린 크립톤(Krypton) 행성의 반란군처럼 기계인지 인간인지 외계인인지 분간하기 조차 어렵게 될 것이다.


타자가 타자로서 존재하고,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하나의 존재가 사물에 대한 거리를 두고서 그에 대한 면밀한 사유를 실행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적인 즐거움과 목표가 상실된 허무한 관념만이 내부에서 들끓도록 부상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에 너도 나도 외치는 '유희의 인간'이 자아를 상실한 미치광이처럼 기계에 휘둘리는 디지털 호모 루덴스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머리가 비워진 채로 알 수 없는 빛을 향해 돌진할 때 청명한 세상을 향한 차가운 격을 가진 마지막 인간으로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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