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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A DELLA BRUTTEZZA

《추(醜)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by CHRIS
[STORIA DELLA BRUTTEZZA, UMBERTO ECO] PHOTOGRAPH by CHRIS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반면, 추하고 변형되고 불완전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에는 경멸을 표시한다. 그러나 일상의 험담에서 언급되는 대상에 관심과 횟수를 종합해 보면 아름다움만큼 추한 것들도 말하기 좋은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아름다운 것은 선(善)으로, 추한 것은 악(惡)으로 양분되어 온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추한 것들은 어느 정도 사회적인 통념과 보편성에 근거하지만 상당 부분 주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추하다고 보는 사물과 사람들, 풍경에 대한 시각적이고 언어적인 묘사들 속에서 그 자체의 기록들을 찾아내 《추(醜)의 역사 STORIA DELLA BRUTTEZZA》에 대해 기술하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전방위적이고 기호학적인 태도로 미(美)의 또다른 자아인 추(醜)를 관찰하고 서술한다. 보통 역사적인 서술에 있어서 문학적인 텍스트와 미술작품들을 병치하는 편집과 시각적인 구성은 학자적인 태도이기도 하면서 흔하게 접하기 어려운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예술 경험을 제시한다.


근대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어 왔던 획일적인 미술 교육과 주체적인 의식이 결여된 사회 현장에서 부재한 철학적 사상이나 학구적 편견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예술은 철저하게 문명화된 자본가들과 그들을 보조하는 선전책, 포장을 업으로 하는 광고인들이 보여주는 보기 좋은 그릇에 담긴 정형화된 틀만을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텍스트들에서 일률적인 방향의 예술과 성공지향적인 미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미를 비추는 거울인 추는 삶의 필수적인 단면이다. 미와 추를 동시에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을 틀을 깨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소비에서 벗어난 생산적인 미와 추의 개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며, 그에 대한 사상과 개념 또한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술이 한 개인에게 의미롭기 위해선 분리된 사물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추한 것들도 충분히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육감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몸체와 이별하고 자연에서 해체되는 순간, 순환기적인 숨이 끊어진 몸체에서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는 것처럼, 곪아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추한 해체의 현상들은 잔인하고 역겨워 보이지만 새로움이란 무릇 헌 것들이 소멸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산고 속에서 싹트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이고 유한한 경험적인 시간을 반영하는 추함은 미를 동반하는 쌍둥이의 모습이다. 그럼, 두 손에 미와 추를 움켜쥐고 움베르토 에코의 광활하고 방대한 문화예술사적인 이야기, 《추(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미술, 조각, 유물, 건축, 철학, 역사, 소설, 시, 비평, 연극, 영화, 뮤지컬, 오페라, 음악 등 온갖 예술적인 관심사가 총망라된 광대한 서구 문명을 훑어가는 에코만의 촘촘한 미학적인 기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해박하고 논리적인 지성을 흡수하는 희열에 사로잡힌다. 비판 없이 간략하게 에코의 말을 핵심적으로 집약하여 정리해 본다.



서문


추의 역사는 미의 역사와 일정 부분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취향이 어느 정도는 그 시대 예술가들의 취향과 일치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추의 역사와 미의 역사를 가릴 것 없이 원시인들의 이야기를 논하는 작업은 제약되어 있다. 과거 조상들의 작품은 그것이 미적 쾌락을 위한 것인지 혹은 성스러운 외경심이나 환희를 위한 것인지 말해줄 이론적인 텍스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특정 문화에서 말해지는 비례와 조화 또한, 비례란 주제에 대해 중세 철학자들이 고딕(Gothic)이라는 거대한 규모와 형식을 떠올릴 때에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황금률이 반영된 16세기의 판테온을 떠올릴 것이다. 미와 추의 개념은 역사 시기마다 다양한 문화마다 상대적이다. 볼테르(Voltaire)가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에서 두꺼비에게 미가 무엇인지 진정한 미에 대해 물어봤듯이, 악마와 두꺼비와 기니의 흑인들이 대답하는 미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헤겔(Hegel)의 《미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기혼 남자들이 다 자기 부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새신랑이면 누구나 자기 신부만큼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의 주관적인 취향이 그가 보는 미의 판단 기준이 확실함으로 신랑과 신부 양쪽에게 다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도 지적했듯이 유럽적이고 미국적인 아름다움이 아프리카, 중국인, 한국인에게 통일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많은 예술사적 미학의 개념에서 서구적 관념이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서양인들과 가까이 있으면 입냄새와 체향과 머릿기름과 주근깨와 주름과 털들을 바라보며 외모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차츰 생활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접하면서 먼 곳에서 가졌던 환상이 깨진다.


"돈은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모든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소유할 가치가 있는 확실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조금도 나의 인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데, 추의 효과, 추의 절망스러운 힘이 돈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절름발이지만 돈은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내가 가진 돈이 나의 모든 결점을 그 반대의 것으로 전환시켜 주지 않는가?"

《경제학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Konomisch-Philosophische Manuscripte, Karl Marx 1844》

과거부터 지금까지 미와 추의 속성은 미학적 기준이 아닌 정치적이고 사회적 기준에서 기인한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에서 돈의 소유가 추를 보상해 줄 수 있음을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부유하고 못생긴 남자와 아름답고 빈털터리 여자의 클리셰는 <미녀와 야수 Beauty and the Beast>와 같은 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 결점이 가득한 군주의 초상화에 영원성과 품위를 집어넣은 화가들은 군주들의 전능함을 일반인에게 표출하기 위하여 카리스마와 매력을 보태 넣었다. 젊은 시절에 미모가 있었던 듯한 서태후는 나이가 들면서 추해지는데, 그녀의 권력욕은 비틀린 성적 리비도와 결합하여 하루에 한 명 이상의 젊고 아름다운 시종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정기를 흡수한 뒤 바로 죽여버렸다. 권력과 돈이 상통하는 현대의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즐비하다. 추에 대한 거부감은 돈으로 보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정상적인 것과 흉측한 것, 용인할 수 있는 것과 소름 끼치는 것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문학작품에서도 표기되는 권위적인 인간들의 변태적인 속성은 간혹 정당한 욕망의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곤 하는데, 움베르토 에코는 미와 추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주관적인 속성에 대해 언급한다.


"미에 관한 한 인간은 자신을 완벽함의 표준으로 놓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숭배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사물들 속에서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추는 퇴화의 한 표지이자 하나의 징후이다. 고갈, 침체, 노쇠, 피로를 암시하는 모든 것, 그리고 경련이나 마비처럼 자유가 결여된 일체의 것들, 특히 소멸, 부패의 냄새, 색깔, 형태들, 이 모든 것은 추라는 가치판단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혐오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같은 유형에게 다가오는 황혼을 혐오하는 것이다."

《우상의 황혼, 프리드리히 니체 Die Götzen-Dämmerung, Friedrich Nietzsche》

"미와 추의 동의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무엇을 미로 여기고 무엇을 추로 여기는 지 알 수 있다. <아름다운>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은 예쁜, 귀여운, 기분 좋은, 매력적인, 상냥한, 사랑스러운, 유쾌한, 황홀한, 조화로운, 신기한, 섬세한, 우아한, 훌륭한, 웅장한, 굉장한, 숭고한, 예외적인, 멋진, 경이로운, 환상적인, 마법 같은, 감탄스러운, 정교한, 호화로운, 화려한, 최고의 등이다. 반면에 <추한>과 비슷한 느낌의 말은 불쾌한, 끔찍한, 소름 끼치는, 역겨운, 비위 거슬리는, 그로테스크한, 혐오스러운, 징그러운, 밉살스러운, 꼴불견의, 추잡한, 더러운, 음란한, 거부감 드는, 무서운, 비열한, 괴물 같은, 오싹한, 기분 나쁜, 무시무시한, 겁나는, 으스스한, 악몽 같은, 지긋지긋한, 욕지기나는, 악취 나는, 가공할, 야비한, 볼품없는, 싫은, 피곤한, 화나는, 일그러진, 기형의 등이다. 믿을 수 없는 것, 환상적인 것, 마법 같은 것, 숭고한 것 등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할당된 영역에서도 공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것은 없다."

《추(醜)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STORIA DELLA BRUTTEZZA, UMBERTO ECO》


에코는 <그 자체로의 추>, <형식적 추>,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예술적 묘사>를 구분하면서, 특정 문화에서 추가 어떤 것인지를 추론하는 작업은 세 번째 유형의 증거를 토대로 할 때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맥베스의 1막에서 마녀들의 한 말을 상기하면서 온갖 다양성과 복합적 형상을 띤 추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 추의 형상들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반응들과 인간이 그것들에 반응할 때의 행위의 뉘앙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한다.


"고운 것은 더러운 것이요. 더러운 것은 곱다."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Macbeth: The Tragedy of Macbeth, William Shakespeare》




CHAPTER I. 고대 세계의 추


1. 미가 지배했던 세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 세계에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미는 신고전주의 시기, 그리스 세계를 이상화하면서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미술관에서 보는 아프로디테나 아폴론의 조각상들은 흰색 대리석에 힘입어 이상화된 미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인들이 말하는 아름답다는 의미가 과연 즐거움을 주고 감탄을 자아내고 눈길을 끌고 그것의 형상 혹은 영적인 미, 영혼의 자질 덕택에 감각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을 일컫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영혼의 자질이란 때로 육체의 미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 세계와 공포


그리스 세계는 수많은 추와 사악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 문화에는 나름의 지하영역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비밀 의식들이 행해졌고,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와 같은 영웅들은 일찍이 헤시오도스가 공포를 설명했던 하데스의 무시무시하고 절망적인 안갯속을 탐험했다. 그리스 신화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잔혹성의 종합일람표와 같다.



CHAPTER II. 수난, 죽음, 순교


1. 우주에 대한 <범미주의적 관점>


그리스 문화의 신화들은 괴기한 것들과 과오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플라톤은 감각할 수 있는 실재는 완벽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미술가들은 신들에게서 지고한 미(美)라는 모델을 보았고, 이런 완벽함이야말로 올림포스 산의 거주자들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추구했던 목표였다. 역설적으로 이 관계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도래와 함께 역전되었다. 신학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전체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 총체적인 미 덕택에 심지어는 추와 악까지도 어떤 면에서는 상쇄된다.



2. 그리스도의 수난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선한 목자라는 상당히 이상화된 이미지만으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십자가 책형은 적절한 도상학적 주제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십자가라는 추상적 상징을 통해서 암시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비로소 현실적인 남자로, 매 맞고 피 흘리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한편 십자가 책형과 수난의 여러 단계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가 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찬양하는 것이므로 극적으로 사실주의적이 되었다.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도래와 더불어 그리스도 박해자들에 대한 묘사 속에서 추한 것들이 논쟁적인 형태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신에 대한 찬양에 추와 수난이 도입되면서 다른 유형의 추들에 힘을 실어주었고, 이런 추들은 도덕적 신앙적 목적을 위해 극단적으로 이용되었다.



3. 순교자, 은둔자, 회개자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거룩함이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수난이나 극악한 고통은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중세미술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흉하게 묘사된 경우가 있지만 고문을 받는 순교자가 추한 모습으로 그려진 경우는 드물다. 미술가들은 그리스도를 묘사하면서 그가 치른 희생이 비할 데 없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던 반면,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룩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운둔자에 대한 묘사는 고귀함을 만들 수 없는 분야였다. 전통적으로, 정의상으로 은둔자는 사막에서 오래 지낸 까닭에 추하기 마련이었다.



4. 죽음의 승리


젊음과 건강함의 모델에 둘러싸인 오늘, 이 시대의 우리는 죽음을 잊으려 애쓰고, 죽음을 감추면서 묘지로 돌려보내려 힘쓴다. 에둘러서 죽음을 말할 뿐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회피하거나 죽음을 그저 구경거리의 한 요소로 축소시켜 몰아내려 하며, 그 구경거리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며 재미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잊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죽음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우리 시대보다 훨씬 짧았고, 역병이나 기근에 희생되었으며, 거의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죽음은 무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중세 시대의 죽음은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친숙한 어떤 것, 인생이라는 극장에서 일종의 고정된 캐릭터처럼 등장하곤 했다. 로마에서는 승리한 개선식을 여는 동안 한 몸종이 유명한 장군 옆에 앉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의 경고로서 당신이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고, 이 모델은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의 개선문학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허영과 시간, 명성을 정복하고 마는 죽음의 승리가 항상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죽음의 승리는 또 하나의 경고 형태인 최후의 심판에 대한 환상을 동반함으로써, 연극 작품과 사육제 무대 장식에 영향을 주었다. 근대 문학은 보들레르의 시 《죽음의 춤》과 드릴로(Don Delillo)의 《지하 세계》에서 보듯이 죽음의 승리에 대한 수많은 변주곡을 낳았다.




CHAPTER III. 묵시록, 지옥, 악마


1. 공포의 우주


무서운 것, 악마적인 것의 형상을 한 추는 복음서 저자 요한의 묵시록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에 등장한다. 묵시록은 하나의 신성한 재현으로서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감추지 않고 세세하게 말해 준다. 묵시록이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천년 왕국, 즉 밀레니엄 공포라고 불리는 사회적 정치적 관심, 그리고 천년 왕국설 신봉 운동의 탄생이었다.



2. 지옥


오래전부터 많은 종교들은 죽은 자들의 혼령이 배회하는 지하 세계를 상상했었다. 중세 시대에 지옥에 대한 많은 묘사가 등장했으며 지하세계 여행담들도 수없이 많았다. 지옥의 개념은 심지어 무신론적인 기질을 지닌 실존주의자까지 괴롭힌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출구 없는 방 Huis Clos》은 현대판 지옥을 재현한 작품이다. 우리는 살면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추함과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타자의 무자비한 시선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타인이 자신의 실체를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고 항상 전등이 켜진 호텔방에서 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난 적 없는 세 사람이 영원히 같이 지내야 하는 사르트르의 지옥에서는 타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그들의 비난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열어, 열라고. 제발. 무슨 벌이든 다 받을게. 발을 죄는 벌이든, 족집게로 꼬집는 벌이든, 끓는 납에 넣든, 부젓가락으로 쑤시든, 교수형을 하든, 백번 태우고 잡아 찢든 좋으니 제대로 고통받고 싶어... 붉게 달군 포락은 전혀 필요 없군. 지옥이란 다름 아닌 타인들이야."



3. 악마의 변형


사탄의 형상들, 악마, 악귀들은 아주 초기부터 제시되었다. 다양한 유형의 정령들, 즉 중간적인 존재로서 때로는 인정 많고, 때로는 짓궂으며, 사악할 때는 괴물 같은 측면을 드러내는 존재들은 다양한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악들은 사악한 자, 적, 베엘제불(바알즈붑), 거짓말쟁이, 이 세상의 권력자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전통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악마가 추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악마는 은둔자의 전기들 속에서 동물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는데, 점점 더 추의 강도를 높이면서 서서히 교부 문학과 중세 문학을, 특히 경건주의 작품들을 공략해 들어간다. 일체의 괴기함을 두루 갖춘 악마는 채색 필사본과 프레스코화의 중심을 이루는 무시무시한 형상이기도 하지만, 은둔자들에 대한 유혹을 묘사한 바와 같이 악마는 모호한 분위기의 청년이나 관능적인 매춘부의 유혹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낭만주의와 퇴폐주의 운동 시기에는 그 테마가 거의 불경스러울 정도로까지 치달았다. 예술가들은 악마의 추함과 그에 저항하는 은둔자의 강인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유혹자의 이미지와 유혹당하는 자의 감상적인 태도를 다루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는 당대의 퇴폐풍조에 대한 일련의 교화적 알레고리를 구성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사회에서 횡행하던 악의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세속적 쾌락의 세계가 지옥으로 이어지는 것을 연결시켜 소름 끼치도록 불안한 형상을 묘사한다.




CHAPTER IV. 괴물들과 기이한 것들


1. 불가사의한 것들과 괴물들


그리스 로마 세계는 기이한 것들 또는 불가사의한 것들에 매우 민감했고 다가올 재앙의 전조로 보았다. 플라톤이 독특한 안드로지니를 상상했던 것도 이와 같은 예외적인 사건들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빈약하고 부정확한 정보밖에 얻을 수 없던 지역에 산다고 전해지는 수많은 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 측정 불가능한 것의 미학


히스페릭 미의식(Hisperic Aesthetic)을 동반한 양식은 라틴어에 켈트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의 어휘를 섞어 만든 문체를 사용한 익살스럽고 현학적인 문학을 뜻하며, 교부들에게는 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7세기와 8세기 사이, 스페인에서 영국에 이르는 지역과 골 지역의 상당 부분에 걸쳐 기호상의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히스페릭 미의식은 암흑시대를 헤쳐나가고 있던 유럽의 양식이 되었다. 암흑시대는 농업의 쇠퇴와 도시의 황폐화, 로마 시대의 거대한 수로 체계와 도로망의 붕괴로 특징지어진다. 히스페릭 문학은 전통적인 비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고,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신조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즐겼고, 작가들은 고전세계에서라면 순전히 불협화음으로 여겼을, 길게 이어지는 두운법을 선택했다. 이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척도가 아니라 거대함과 무한함이었다.



3, 괴물들의 교화


독실한 수사들만이 아니라 중세 사람들은 지극히 추한 괴물들을 동물에서 이국적인 동물들을 즐겁게 구경하는 것처럼, 괴물들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우스꽝스러운 기괴함, 흉한 형상인지 형상의 흉함인지 모를 야릇한 것들은 차례차례 음미하며 온종일을 보내는 데 큰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스도 세계는 나아가 괴물들에 대한 진정한 구원에 착수했다. 《피지올로구스 Physiologus》에서는 각종 동물, 나무, 돌들을 열거하여 묘사한 후, 저마다 어떻게 왜 윤리적 신학적 메시지를 담은 매개물이 되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어 사냥꾼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꼬리로 발자국을 지우는 사자는 인간의 죄를 지워주는 그리스도의 상징이 된다.



4. 신기한 것들 <미라빌리아>


《피지올로구스 Physiologus》는 대다수 동물 편람, 보석 편람, 약초 편람 및 대(大) 플리니우스가 놓은 토대에 따라 탄생한 수많은 백과사전들의 모델이었다. 여기서 고대와 중세 세계가 느꼈던 미지의 땅에 대한 매혹, 그리고 독자들이 그 모든 불가사의를 공상할 때 느꼈을 놀라운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5. 괴물들의 운명


사람들이 처음부터 줄곧 괴물들에게 친밀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괴물을 이용해 신을 정의하기에 이른다. 신의 본성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아무리 시적으로 경이롭다 한들 어떤 은유로도 신을 말할 수 없고 어떤 담론도 무력해지는 까닭에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이 아닌 것을 말하는 방법뿐이므로, 차라리 신과 전혀 다른 이미지, 즉 동물이나 괴물 같은 존재들의 이미지를 통해서 신을 가리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괴물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도 친근한 기능을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인상적인 추함 때문이었다. 괴물들은 마침내 연금술사들의 이단적 우주에서 놀랄 만큼 유혹적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현자의 돌이나 불로장생의 약을 제조할 때 필요한 다양한 과정을 상징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섬뜩한 캘리번을 보여주었으며 조너선 스위프트는 자신이 여행하다 만났던 존재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괴물에 대한 친밀감은 점차 퇴색해 가며, 괴물들은 포(Poe)에게 불안이라는 공포를, 보들레르에게는 거인의 육체를 생각하며 관능적인 황홀경을 꿈꿨다. 이후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하이드 씨, 킹콩을 거쳐 마침내 살아 있는 시체들과 외계 생명체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괴물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도 그들을 두려워할 뿐 신의 전령으로 보지 않는다.



CHAPTER V. 추한 것, 희극적인 것, 외설스러운 것


1. 프리아포스


"성적 행동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자연스럽고 필요하고 정당한 일을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지 않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며, 신중하고 점잖은 어법에서 제외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인다, 훔친다, 배반한다라는 말은 과감하게 입 밖에 낸다. 그런데 어째서 그 일은 입 속에서만 우물거릴 뿐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단 말인가?" 《수상록, 미셸 드 몽테뉴 Essais, Michel Eyquem de Montaigne》


서구사회만이 아니라 동양권 사회에서도 배설이나 성적인 대화는 거북스럽게 느낀다. 배설물은 역겹고 추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 Das Unbehagen in der Kultur》에서 "생식기의 장면은 늘 흥분을 일으킴에도 그 자체로의 생식기는 결코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듯이 당혹감은 수치스러움과 연결된다. 수치심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해왔다. 고대부터 남근 숭배는 외설과 특정한 추, 필연적인 해학의 특징들을 한데 통합시켜 왔다. 거대한 성기를 지닌 프리아포스 같은 이류의 신은 프리아피즘(Priapism), 지속발기증을 병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올바른 형태의 성기가 아니었기에 흉하고(Amorphos) 추한 것, 창피스러운(Aischron) 것으로 규정되었다.



2. 소작농에 대한 풍자와 사육제 축제


예술 형식들 중에는 비극 또는 숭고, 불안감과 긴장감을 일으키는 잃어버린 조화, 미녀와 금발미녀처럼 평온함을 유발하는 사로잡힌 조화, 잃어버리고 실패한 조화 등을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상실과 감손(減损)으로서 정상적 행위 패턴에 대한 기계화로서의 희극적인 것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경멸스럽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놀리거나 우리를 억압하는 어떤 대상이나 사람과 관련해 카타르시스적인 행동에 탐닉할 때는 희극성과 외설스러움이 한꺼번에 나타나게 된다. 이때 그 억압자를 볼모로 웃음을 유발함으로써 희극적인 외설은 일종의 보상적 저항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세 시대 가난한 사람들이 온 식구가 한 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거나 난잡하게 살면서 혹은 들판에서 신체 기능들을 수행하고 했을 때, 추와 그로테스크에 대한 찬양의 외설은 소작농에 대한 풍자나 사육제 축제에서 등장한다. 이는 봉건 영주 및 교회 세계가 농민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경멸과 불신의 표현에 가까워서 소작농의 추함에서 사디즘적 쾌감을 느꼈으며 그들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3. 르네상스와 농노 해방


라블레(François Rabelais)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La vie de Gargantua et de Pantagruel》에서 탁월한 독창성을 발위해 해묵은 대중문화에서 가장 외설스러운 형태들을 끌어내 마음껏 사용한다. 그의 외설은 왕궁의 언어와 행위가 되어 나타났고 상스러움의 허식은 교양 있는 문학 속으로 옮아갔고 공식적으로 전시되었으며 학식 있는 자들의 세계와 성직자들의 관습에 대한 풍자가 되었다. 외설이 철학적 기능을 갖게 되면서 진정한 문화적 혁명이 된 것이다. 중세 기준에 따르면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 아들 팡타그뤼엘은 비례에 어긋난 기형적인 인간이었지만 그들의 기형은 영예로운 것이 되어 그 음란하고 엄청난 거대함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 대(大) 피터 브뢰겔(Pieter Brueghel de Oude)은 떠들썩한 축제와 투박함, 추함의 지닌 농민들의 세계를 위대한 미술적 주제로 만들었다. 외설은 17-18세기 음란문학을 통해 오락의 기회를 제공했고 사드(marquis de Sade)는 《소돔 120일 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과 같은 외설적 작품 속에서 가장 불쾌한 특징들을 모조리 찾아냈다. 19세기 전반은 예전까지 음란하고 추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일상생활이 모든 측면을 다루고자 했던 사실주의 미술과 문학 속에서 거리낌 없이 등장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데이비드 로렌스나 헨리 밀러가 소설에서 발표한 외설은 체면의 개념을 상대적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19세기말 문학의 상당 부문에서 독선적인 금기의 파괴를 꿈꾸며 육체성의 모든 측면에 대한 용인을 얻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운동은 20세기 문학 작품들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4. 캐리커처


희극적인 것을 보여 주는 형식 중 하나가 캐리커처이다. 근대의 캐리커처는 실제 인물이나 인식 가능한 사회적 범주에 대한 논쟁적 도구로 탄생하였고, 대상의 신체적 결점을 통해 도덕적 결점을 비웃고 비난하기 위해 대부분은 얼굴인 신체의 한 측면을 과장한다. 캐리커처는 대상을 품위 있게 만들지 않으며 하나의 특질을 기형적일 만큼 강조하면서 더욱 추하게 만든다. 캐리커처는 주제의 몇몇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그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의도를 갖는 경우도 있다. 또한 내면적 추를 폭로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을 땐 그 캐릭터에 호감을 갖도록 상대의 신체적 지적 특징이나 행동 패턴을 강조하는데 목적을 두기도 한다.


CHAPTER VI. 고대부터 바로크 시대까지 여성의 추


1. 반(反) 여성 전통


중세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내면의 사악함과 유혹의 해로운 힘을 드러내는 추를 가진 여성과 관련된 독설과 비난, 책망, 비투페라티오 (Vituperatio)는 성공을 누린 테마였다. 파트리차 베텔라(Patrizia Bettella)는 중세 시대부터 바로크 시대까지를 다룬 추한 여자 The Ugly Woman》에서 추한 여성의 세 가지 발전단계를 지적했다. 중세 시대에는 미와 순결의 상징인 젊은 여성에 바치는 규범적인 찬사와 대비되는 육체적, 도덕적 쇠락의 상징인 나이 든 여성에 관한 묘사가 많았는데, 르네상스의 여성의 추는 지배적인 미적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모델들에 대한 반어적 찬사를 내포한 풍자문학의 주제로 떠오른다. 바로크 시대에는 여성의 결함을 매력의 한 요소로 보는 긍정적인 재평가에 이르게 된다.



2.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시대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는 작풍(Mammer)란 말이 특정 작가의 양식을 일컫는 말로 쓰이다가 매너리즘으로 규정되면서 모방의 미가 아닌, 표현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단계가 되었다.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중심이 따로 없는 혼잡한 장면 속에서 고전적인 공간 구조를 해체해 버렸다. 미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표현적인 것, 기괴함과 과도함, 변칙에 대한 기호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예외적인 것, 경이로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취향이 성장했고, 이런 문화적 풍토 속에서 예술가들은 폭력, 죽음, 공포의 세계를 탐험했다.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시대에는 기존의 미학이 변칙이라고 여겼던 요소들을 두려움 없이 사용하여 추한 여인이란 테마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마니에리스모 시기의 시초부터 인간의 노화에 대한 멜랑콜리한 사유들은 증가했으며, 추함을 묘사한 시들에서는 슬픔 가득한 연민이 흘러나온다. 질병이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화가들이나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씁쓸한 연민이 사용되었다.




CHAPTER VII. 근대 세계의 악마들


1. 반항적인 사탄부터 가엾은 메피스토펠레스까지


그리스도교 전통은 과거에 천사였던 사탄이 가장 아름다웠을 거라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악마가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이 보였고, 마리노의 《무고한 자들의 학살 La Storage Degli Innocenti 1632》에서 사탄이 우울한 절망에 짓눌린 존재로 제시됨으로써 인간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사탄을 구제한 결정적 텍스트는 밀턴의 《실낙원 Paradise Lost 1667》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서 언급했듯이 "밀턴이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편에 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밀턴의 사탄은 타락한 미와 굴종하지 않는 자존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잘 차려입은 신사의 모습이었다가, 검은 개로 변장해서 나타났고, 이어서 불타는 눈과 무서운 엄니를 가진 하마로 변모하고, 마침내는 방황하는 학자이자 존경받는 지식인 차림을 하고 나타난다. 그는 파우스트를 유혹할 공을 들일 필요 없이 영혼들과 교류할 각오를 하고 있는 파우스트에게 다가갈 뿐이다. 20세기의 악마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조반니 파피니, 토마스 만에서 나타나듯이 무시무시하거나 매력 넘치는 존재가 아닌, 칙칙하고 지저분한 외모 속에 악독함을 지니고 있지만, 순전히 추하지 않기에 더욱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



2. 적의 악마화


사탄의 모습이 중화되는 동안 적(敵)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커져서 적이 사탄의 특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타자, 외국인으로서 적은 미의 규범에 맞지 않는 것이었고,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들(Barbaria, 말더듬이)로 취급했듯이,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악마적인 관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오랜 세월 끝도 없이 복제되었다. 흑사병과 나병처럼 불치의 병에 걸린 불행한 사람들은 사회의 적으로 여겨졌다. 러브 크래프트(H.P. Lovecraft)의 작품 속 <그것 The Thing>은 양서류 혹은 미끌미끌한 다형질적 생물로서 외계의 침입자, 벌레의 눈을 한 괴물, 겹눈의 우주 생물체, 원형적 의미의 야만인으로 모든 적에 대한 의인화로 표현되면서 궁극적으로 미워해야 할 대상을 형태가 결여된 존재로 묘사하고 악마의 현신으로 만들어내는 인간의 경향을 확인시킨다.




CHAPTER VIII. 마법, 사탄 숭배, 사디즘


1. 마녀들


그리스 문화에는 메데이아나 키르케 같은 마녀들이 있었고, 로마의 12 표법에는 흑마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흑마술은 남자 마법사와 여자 마녀 모두가 부린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었음에도 뿌리 깊은 여성 혐오증은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들을 여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악마적인 성격의 회합으로서의 마녀 집회(Sabbath)에서 마녀들은 주문을 외는 것만 아니라 염소의 혀상을 가진 악마와 성관계를 가지거나 빗자루에 올라탄 마녀의 이미지는 남근숭배와 연결되게 된다. 마녀는 대중적 하위문화의 한 형태를 대표하며 셰익스피어의 마녀들과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발푸르기스 전야제의 마녀들이 문학에서 나타난다. 박해가 막을 내린 뒤에도 마녀들의 이미지는 동화 속에서 명맥을 이어나갔으며 주목할 점은 마녀들은 '못생겼기 때문에' 고발을 당했으며 자기 내면의 추를 드러내는 모호한 특징을 나타낸다고 상상하게 했다.



2. 사탄 숭배, 사디즘, 그리고 잔인성의 취향


근대의 사탄 숭배 분파들은 크게 네 분류로 나뉘는데, 사탄을 도덕적 종교적 제약을 넘어선 쾌락 추구 및 이성의 상징이라고 여긴 합리적 무신론 집단, 종교적 제의와 믿음을 중시한 신비주의자들, 떠들썩한 마약을 수반하는 록 밴드와 같은 제의를 실행하는 극렬한 사탄주의자, 마지막으로 고대 마니교 및 영주주의 영향을 받은 루시퍼 추종자들로 구분된다. 악마의 숭배는 마술적 풍습에 대한 믿음에 경도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유사 사탄숭배에 빠졌던 질 드 레(Gilles de Rais)는 잔다크와 나란히 싸운 프랑스의 육군 원수였지만, 서른여섯 살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괴벽과 폭력성은 전쟁의 경험 때문에 피의 취향에 길들여진 병자의 모습으로, 잔인성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한다. 살아있는 신체의 절단에 관련해 비잔틴 황제였던 안드로니쿠스의 처형과 다미앙(Damiens)의 능지처참처럼 잔인성의 취향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도 적용되었다. 에드가 포는 고양이를 고문하고 죽이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드가 잔인성의 취향이 인간 본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듯이 조셉 콘래드는 세상의 잔인성에 대한 비난을, 조지오웰은 독재 체제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있음을 일깨워주었고, 카프카는 형이상학적인 폭력과 일체의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분쟁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잔인성의 취향은 전적으로 인간의 특질이다.




CHAPTER IX. 피사카 쿠리오사


1. 태음 발생과 해부된 주검들


고대와 중세를 통틀어 진정한 괴물이란 자신들과 똑같은 부모에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인간이 아닌 개체들로서 신의 우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징표로서 허락해서 원해서 탄생한 것이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비정상적인 출생의 산물이든 탐험가들과 여행가들이 마주치게 되는 특이한 동물이든 간에 경이로운 개체들을 일컫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진기한 자연학, 《피시카 쿠리오사 Physica Curiosa》는 카스파어 쇼트( Caspar Schott)가 출간한 1600 페이지의 기념비적인 작품의 제목으로, 자연적이면서 괴이한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앙브루아즈 파레나 미셀 드 몽테뉴, 레비누스 렘니우스 등의 작가들은 기형적인 광경들을 통해 지적 흥미를 자극했다. 14세기 몬디노 델루치(Mondino de'Liuzzi)와 시작된 해부학 실험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해부학 극장에서 절개된 인체에 미술이 관심을 기울이고 밀랍 작품 미술관에 전시된 충격적인 내부 장기 작품이 극사실주의의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2. 관상학


추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는 관상학은 얼굴의 특징이나 나머지 기관의 형태를 성격이나 도덕적 성향과 연관시키는 유사 과학의 문제이다. 헤겔은 《정신 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머리뼈의 구조가 최초의 소질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정신활동이야말로 거주하는 두뇌를 결정할 힘을 가진 유일한 능동적인 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골상학의 특징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한 개인이나 한 인종을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했다. 그러나 19세기 실증주의 시대, 체사레 롬브로소는 《범죄인론 L'Uomo delinquente》에서 범죄인들의 성격적 특징들이 신체적 이형(異形)과 연관된다는 것을 결부시켜 과학의 외피를 쓴 논쟁을 동원하여 신체적 결함을 도덕적 오점과 연결시켰다. 추와 사악함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유대인의 특징 분석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반셈주의는 종교상의 <반유대주의>의 결과로 시작되었는데, 루터의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 Von den Jüden und iren Lügen 1543》에서 보이듯이 극렬한 반유대주의는 1492년 스페인에서 무어인이 쫓겨나면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후에는 유럽에 인종적 반셈주의가 강해졌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는 과학적 인종 개념에 바탕을 둔 반셈주의가 나타나 바그너의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히틀러에게 전향되면서 노골적인 악의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묘사했던 이들은 정의에 대한 증오의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추한 유대인들의 얼굴 특징, 목소리 행동들은 반셈주의의 도덕적 추를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가 되었다.




CHAPTER X. 낭만주의와 추의 구원


1. 추의 철학


"시인은 형태의 추함을 이용한다. 그러면 화가는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 미술은 모방하는 기술로서 추함을 표현할 수 있으나 아름다움의 예술로서는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가시적 대상은 전자의 소재가 된다. 후자는 쾌감을 야기하는 가시적 대상에 국한된다. 이것은 형태의 추함에도 해당된다. 이런 추함은 우리의 시각, 그리고 질서와 균형을 좇는 미적 감각에 거슬리며 우리가 추함을 감지하는 대상의 실재와 관계없이 혐오감을 야기한다. 형태의 추함이 자극하는 감정은 불쾌감이고, 더구나 묘사에 의해서 쾌감으로 변화될 수 있는 종류의 불쾌감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의 추함 그 자체는 원래 아름다움의 예술로서 미술의 소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술이 문학처럼 다른 감정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서 형태의 추함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미술은 우스꽝스러움과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추한 형태를 사용해도 되는가? 나는 감히 이 물음에 대놓고 아니라고 답하지는 않겠다. 무해한 추함이 미술에서도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매력과 명성에 대한 열의가 결부될 경우에 그러하다. 유해한 추함이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의 혼합 감정인 우스꽝스러움과 끔찍함이 묘사에 의해 매력과 쾌감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미술과 문학이 완전히 똑같은 경우가 아님을 숙고해 보라고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에서 형태의 추함은 병립하는 부분들의 연속되는 부분들로의 전환을 통해서 불쾌한 효과를 거의 전부 잃는다."

《라오콘,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Laocoon, Gotthold Ephraim Lessing 1766》

추에 대해 미학적으로 성찰한 최초의 예는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의 라오콘 Laocoon 1766이다.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은 《그리스 미술 모방에 관한 고찰 Gedanken über die Nachab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bauerkunst 1755》에서 신고전주의적 시학을 뒷받침하면서 라오콘의 고통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한 방식으로 표현하는지에 대해 언급했지만, 레싱은 시적 연출과 조각적 연출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시간의 예술인 시는 하나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 과정에서 불쾌한 사건들을 못 견딜 만큼 뚜렷하게 만들지 않아도 환기시킬 수 있는 데 반해, 공간 예술인 조각은 오직 한순간만을 묘사할 뿐이며, 시간을 고정시키는 과정에서 물리적 고통의 보기 흉한 폭력이 묘사의 미와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불쾌할 만큼의 추한 얼굴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레싱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예술 속의 다양한 표현들을 분석하고 불쾌한 것에 대한 예술적 재현 작업의 어려움을 성찰하면서 복잡한 추의 현상학을 구축하였다.


18세기에 들어 미에 대한 논쟁의 중심은 미를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탐구에서 미가 생산하는 효과에 관한 고찰로 바뀌었다. 숭고를 다룬 초기 작품들은 예술적 효과보다는 무형의 것, 고통스러운 것, 무시무시한 것이 지배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심을 두었다. 숭고의 미학이 고딕 소설이 등장하기 직전에 나왔으며, 폐허에 대한 새로운 감성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1790》에서 미를 숭고와 대비시키면서 수학적 숭고를 이야기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광경은 우리의 이성으로 하여금 감각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고 상상력이 직관을 통해서도 포괄할 수 없는 무한을 가정하도록 이끈다. 이어서 칸트는 폭풍우 치는 광경을 예로 들며 무한한 힘의 인상으로 인해 동요를 일으키고 감각적 속성이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도덕적 위대함의 감정으로 상쇄되는 역학적 숭고를 말한다. 실러는 《숭고에 대하여 Über das Erhabene》에서 숭고란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가 모든 한계에서 독립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무엇이라고 보았다. 헤겔은 《미학 강의 Ästhetik, oder Die Philosophie der Kunst》에서 숭고란 묘사에 적당한 어떤 대상을 현상의 영역 안에서 찾지 않으려 하면서 무한을 표현하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미는 더 이상 미학의 지배적인 관념이 아니게 되었다.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예술의 본질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미적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고 속성상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대상에서도 그 가치를 깨닫게 만들었다. 니체는 숭고는 <예술을 통해서 공포를 정복한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은 흥미로운 것과 독특한 것은 우리를 계속하여 흥분 상태에 머물게 하고 현실의 막대한 풍부함을 그 무질서의 절정에서 재현하기 위해 변칙적인 것, 추한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바이세(Christian Herman Weisse)는 《미학체계 System der Ästhetik 1839》에서 추는 미에 필수적인 한 부분이자 예술적 상상력이 고려해야 할 실재라고 보았다. 헤겔 이후 카를 로젠크란츠(Karl Rosenkranz)는 《추의 미학 Ästhetik des Hässlichen 1853》에서 무서운 사람, 멍청한 사람, 범죄자, 섬뜩한 사람, 구역질 나는 사람, 악마 같은 사람, 마녀 같은 사람, 꼴사나운 사람, 불쾌한 사람에 대한 묘사까지를 포괄하는 한편, 추를 아름답게 환상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캐리커처의 찬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현상학을 구축했다. 추에 대한 가장 열렬한 낭만주의의 찬미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희곡 《크롬웰 Cromwell 1827》 서문에서 나타났는데, 위고가 새로운 미학의 전형으로 보았던 추는 진리와 시학을 담고서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흉하고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서의 그로테스크이자 자연이 예술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것이었다. 그로테스크는 위고에서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었고, 위고는 미를 완전히 한 바퀴 돌리고, 따라서 그것이 추와 일치하도록 만든다.



2. 추한 자와 저주받은 자


실러(Friedrich Schiller)는 비극론 Über die tragische Kunst 1792》에서 슬픈 것, 끔찍한 것, 심지어 무서운 것들까지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라는 것, 그리고 고통과 공포의 장면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되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퇴폐주의 작품에 이르러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지아우르를 비롯해 외젠 쉬, 발자크, 에밀리 브론테, 빅토르 위고, 스티븐슨을 거쳐 다양한 악당들이 등장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불쾌함을 유발하는 추는 모든 미적 쾌감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이 한계는 낭만주의와 함께 극복되었다.



3. 추한 자와 불행한 자


낭만주의 최초의 불행하고 추한 자는 메리 셸리(Mary Shelly)의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1818》이다. 그 뒤를 이어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콰지모도와 《웃는 남자》의 그윈플레인 등이 있다. 그 밖에 불행하고 추한 자들로는 레이디 맥베스부터 이아고까지 리골레토 같은 베르디의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이 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이니지오 우고 타르게티(Iginio Ugo Tarchetti)의 포스카 같은 추한 여인들이다.



4. 불행한 자와 병든 자


폐결핵이나 열병처럼 신체에 영묘한 분위기를 줄 때 아름다워지는 퇴폐주의 미학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에서 죽어가는 비올레타의 신파에서 20세기 결핵 서사시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Der Zauberberg》까지 지속되어 예술가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포자기해서 기력이 쇠한 미녀의 모습이나 병의 더딘 진행을 이상적으로 묘사했고 노화와 가난이라는 병으로 인해 허약해진 사회적 약자들을 그렸다. 카프카가 묘사한 한 소년의 옆구리에 핀 꽃처럼 끔찍한 이미지는 역겨운 상처에 대한 공포적 은유이며 혐오스러운 미를 구현한 예를 제시한다.




CHAPTER XI 두려운 낯설음

추의 역사에서 상황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추의 형식은 피해 갈 수 없다. 프로이트는 섬뜩한 것에 관한 에세이 두려운 낯설음 Das Unheimliche》에서 감춰져 있는 것이 표면에 드러나버린 것으로서의 '두려운 낯설음'을 설명한다. <이상한> 단어의 그리스어에서 Uneasy, Gloomy, Uncanny, Ghastly Haunted와 Inquiétant, Sinistre, Lugubre, Mal à son aise, Sospechoso, Siniestro를 찾아내면서 편안하지 않은, 불안감이나 공포를 유발하는, 무시무시한,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안개의, 밤의, 돌로 된 형상의 단단함 같은 의미를 떠올린다. 프로이트는 편안하고 평온한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가 잊혀있다가 자꾸만 떠오르는 억압된 것의 복귀이자 개인의 유년기를 괴롭혔던 유령이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원시적 환상의 복귀 같은 회기를 구성한다고 지적했다.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과 억압되어 있던 것의 복귀를 동일시하는 것은 일상적 삶과 관련 있지만, 삶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많은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들이 문학에서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간이나 거리를 더는 찾을 수 없을 때 똑같은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거나 꼭두각시 인형이 살아날 때 불길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보일 때 유령이 나타날 때 어떤 개인을 보면서 사악한 눈을 가졌다고 의심할 때 낯설음은 일어난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것, 두려운 낯설음의 극치는 바로 우리와 똑같은 분신의 환영인 도플갱어이다. 프로이트는 파라오가 자신의 이미지 모델을 만들어 생존의 형상을 스스로 확인했던 고대에는 이 분신이 불멸의 보증서였던 반면, 원시인들과 유아들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과거의 유물이 된 시기에서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경고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들의 생환(生還)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망령으로서 무시무시한 이형의 성격을 띤다.




CHAPTER XII 철탑과 상아탑


1. 공업적 추


18세기 방적기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노동구조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19세기에는 공장과 공업의 발달로 인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성행과 노동 계급의 성장, 생활조건이 열악한 도시 밀집 지역의 탄생을 기록했다. 공업 도시의 충격과 도시 생활의 공포에 대한 묘사는 화가 폴 도레(Paul Gustave Doré)와 찰스 디킨스, 에드가 포, 에밀 졸라, 오스카 와일드, 잭 런던과 T.S. 엘리엇에게 진보의 너저분함을 소름 끼치게 재현하게 했다. 19세기는 철과 유리를 주재료로 하는 건축을 탄생시킨 산업혁명의 열광자들과 전통적 가치로는 새로운 미학적 감수성의 이름으로 기술적 혁신을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요동치는 시기였다. 귀스타브 에펠(Gustave Effel)이 철탑을 완성하기 전인 1887년, 알렉상드르 뒤마, 기드 모파상, 샤를 구노 등 문인,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수도의 심장부에 올라가는 쓸모없고 괴물 같은 에펠탑의 건립에 반대하여 프랑스 국민의 기호에 대한 저평가이자 프랑스 미술과 역사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탑에 적대감을 보이며 바벨탑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에 에펠은 탑은 인간이 세운 사상 최고의 구조물이 될 것이며 그 착상의 과감함으로 인해 거대한 것들 또한 매혹적인 힘과 미를 표현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에펠탑은 취향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2. 퇴폐주의와 추한 것들의 방탕


산업세계가 주는 중압감, 익명의 거대한 군중이 우글거리는 대도시, 조직화된 노동 계급의 성장에 직면해서 번성하는 저널리즘 형식이 대중의 이야기들을 일화 형식으로 출간하며 대중문화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자, 예술가들은 새로운 민주적 이상들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명분의 상아탑으로 철수하여 미 하나만을 유일한 실현 가치로 표방하는 미적 종교가 형태를 갖추었고, 폴 베를레느나 폴 발레리,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프루스트까지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에 대한 찬양, 악덕에 대한 변명, 고통의 세련된 쾌락, 신경증 상태에 대한 찬미 등으로 이어졌다. 괴팍한 인물, 매춘부, 스핑크스, 죽어가는 소녀들이나 혐오스러운 얼굴들을 보여주는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20세기 에피파니의 거장으로 제임스 조이스를 젊은 예술가의 초상》앞으로 등장시키며 추의 경험을 스타일에 의해 미학적으로 상쇄시키면서 내면적 순간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표상을 그려냈다.




CHAPTER XII 아방가르드와 추의 승리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에게 현재의 추는 다가올 대변혁의 전조이자 징후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 관한 에세이에서 말했듯이 내일이면 위대한 예술로 평가받을 것들이 오늘은 못마땅하게 보일 수 있으며, 새로운 것이 다가올 때 취향은 뒤처지게 된다. 그 자체로의 추, 형식적 추, 예술적 추의 구분이 없도록 그저 이미지를 추하게 변형한 피카소의 추한 여자처럼 말이다. 혹은 행보나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처럼 방탕함의 이상에서 단서를 달았듯이 말이다. 고의적인 도발을 감행한 미래주의 추와 달리, 독일 표현주의의 추는 사회적 병리에 대한 고발이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에밀 놀데, 코코슈카, 오토 딕스, 에곤 실레, 게오르게 그로스를 비롯한 화가들은 무자비할 만큼 집요하게 초췌하고 불쾌한 얼굴들을 묘사했다. 브라소와 피카소 같은 큐비즘 화가들은 형태의 해체를 추구하면서 비유럽권 예술이나 괴기스럽고 혐오스러운 아프리카 가면 등에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찾았다. 다다 운동에서 추의 무력은 그로테스크에 대한 호소를 통해 등장했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 Surrealist Manifesto>에서 불안한 상황과 기괴한 이미지에 대한 특별한 성향은 뚜렷이 드러난다. 예술가들은 잠재의식 속의 틈새를 활짝 열어 줄 꿈의 상황을 자동기술 같은 작용을 통해 복제할 것, 일체의 억압적인 구속에서 정신을 해방시켜서 이미지와 관념의 자유로운 연상을 따라 흘러가게 놓아둘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 <다다주의 Dadaism>와 <앵포르멜 Informel> 운동까지 재현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도달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물질, 곰팡이, 먼지, 진흙 등을 재평가하였다. 사회비판적인 열기로 가득 찬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혁명적이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 러시아 미래주의자들까지, 아방가르드의 추는 새로운 미의 모델로 받아들여졌고, 새로운 상업적 회로를 만들어냈다.



CHAPTER XIV 타자의 추 키치, 캠프


1. 타자의 추


추의 개념은 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문화에서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미래에도 도발적인 작품들은 거부감만이 아니라 혐오감을 유발한다. 오늘날 거장으로 여기는 예술작품에 바치는 경의와 악의에 찬 비방들을 살펴보자. 낭떠러지의 구렁텅이였던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부터 상스러운 소음으로 여겨진 [베토벤 교향곡 5번 Beethoven: Symphony No.5], 선율이 없는 <리골레토 Rigoletto>, 불한당 같은 브람스의 음악, 골동품과 같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한 남자의 잠들기 전 쓸데없는 뒤척거림이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불필요한 세부 묘사의 더미에 묻힌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 지루하고 음울하고 우스꽝스러운 《모비딕 Moby-Dick》, 미국에서 동물을 파는 건 불가능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Animal Farm》, 재능 없는 소년인 클로드 모네, 문학의 불발탄인 조이스의 《율리시즈 Ulysses》, 쓸모없는 사람들의 쓸모없는 이야기인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Buddenbrooks》 등등.



2. 키치


사회적 현상인 추는 상류 계층이 하류 계층의 취향에 대해 불쾌하다거나 우스꽝스럽다고 여겨온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키치(Kitsch)는 저속하지만 키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술관의 위대한 예술과 별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모방의 예술을 모방하는 데 반해, 키치는 모방의 효과를 모방한다. 예술제작에서 아방가르드는 작품에 이르는 과정을 강조하고 그 과정들을 담론의 주제로 선택하는 반면, 키치는 작품이 일으켜야 하는 반응을 강조하고 사용자의 감성적 반응을 그 자체 작용의 목표로 삼는다. 오늘날 트래시 텔레비전(Trash Television)을 확산시킨 대중문화보다는 상업적 목적을 위해 진정한 예술의 발견을 사소하게 만든 중급문화에 대해 비판을 쏟아낸 드와이트 맥도널드(Dwight MacDonald)의 생각처럼 볼디니(Giovanni Boldini)의 여성 초상화들은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 미술품을 만들어냈다. 욕망을 끌어내도록 의도된 오직 보여지기 위해 의도된 회화적 꽃의 꽃부리에서 피어오른 예술에서 옷은 그저 관조를 위해 의도된 세이렌들이고 고급매춘부와 선전되어도 향유를 위한 미학적 자극은 상급의 질서일 뿐이다. 키치는 효과의 자극제로서 자신의 기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경험들의 외면적 양상을 과시하는 작품, 그리고 기꺼이 스스로를 예술로 판매하는 작품이다.



3. 캠프


어제의 추한 것이 오늘의 아름다운 것이 된 증거로 보이는 시대에서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캠프에 대한 단상 Notes on Camp》은 지성적인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인식의 한 형태로 등장한 캠프에 대해 고찰한다. 캠프(Camp)는 감수성의 한 형식으로서, 경박한 것을 진지한 것으로 전환시킨다기보다는 진지한 것을 경박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캠프는 어떤 것의 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교와 양식화의 정도로 측정되며,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양식을 존중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측면이 더욱 크다. 캠프가 되기 위해서는 오브제들이 과장되거나 주변부적 측면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세련됨을 주장할 때조차도 일정 정도의 천박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캠프의 주제나 목록은 이질적이며 매우 광범위하다. 티파니 램프부터 <백조의 호수>와 벨리니(Vincenzo Bellini) 오페라,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살로메>, 영화 <킹콩> 플래시 고든의 만화책, 카를로 크리벨리(Carlo Crivelli)의 회화들처럼 정숙함의 애처로운 결핍을 위대한 고전 예술이 지녔던 고상한 음란성에의 회귀로 여기고 이를 즐긴다. 캠프의 모든 오브제와 사람들은 자연을 거스르는 극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캠프는 괴팍한 것에 대한 사랑, 아르누보처럼 원래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에 대한 애정이다. 캠프의 마니에리스트들, 기지와 해학, 신랄함, 경이의 바로크 시학, 고딕 소설, 중국풍이나 인공적 폐허에 대한 열정을 통해 우리가 예술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이뤄낸 것의 진지함과 품위 때문이다. 고통과 잔인성을 뚜렷한 특징으로 하는 예술적 감수성의 형식은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격렬하고 해결할 수 없는 테마를 다루는 것이다.


"끔찍한 것은 아름답다."

"진부했던 것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멋진 것이 될 수 있다."

"캠프 취향은 평범한 미적 판단이 갖는 선악의 축을 무시한다. 캠프는 사물을 역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좋은 것을 나쁘다고 혹은 나쁜 것을 좋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캠프가 하는 것은 예술과 삶을 위해서 보완적인 기준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추한 과도함이 순수하고 계산되지 않은 것일 때만 캠프가 된다. 순수한 캠프는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극히 진지하다. 캠프는 의도적일 수 없으며 기교를 실행할 때의 솔직 담백함에 의존한다. 키치가 고급 예술에 대한 존경을 담은 거짓말이라면 의도적인 새로운 추는 캠프의 취향이 복권시키고자 했던 끔찍한 것을 우러르는 거짓말이다.



CHAPTER XV 오늘날의 추

불협화음은 고대인에게 불쾌한 증 4도의 음정, C-F#, 중세시대에는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Diabolus in Musica 음악 속의 악마)로 규정할 정도였다. 13세기 이후 디아볼루스(Diabolos)들은 긴장, 불안정성, 결단의 기대 등의 효과를 창조하였으며 추는 시간과 문화에 상대적이라는 것, 어제는 용인될 수 없었던 것이 내일은 용인될 수 있다는 것, 추하다고 인식되는 것이 적절한 맥락 속에서는 전체의 미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사유로 이끈다. 그리고 만약 디아볼루스가 항상 긴장의 창조를 위해 사용되어 왔다면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는 변하지 않는 심리적 반응이 남아있다는 반증이 된다.


"나의 좀비 영화에서 되살아난 시체들은 세계 내에서의 일종의 혁명,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그 세계에서 나의 인간 캐릭터들 중 다수는 실제로는 그들이 우리인데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서, 살아 있는 그 시체들을 적이라고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나의 영화가 푸짐한 공포 덩어리가 든 우둔한 모험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정치사회적 연대기에 가깝다는 것을 널리 이해시키기 위해 소름 끼치는 장엄함 속에서 피를 사용한다."

<조지 로메로 George Romero,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ET의 괴물들과 <스타워즈>의 외계인들은 어른들을 매혹시키며 머리가 곤죽이 되고 피가 벽에 뿜어지는 스플래터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긴장을 풀거나 공포소설을 읽으면서 기분 전환을 한다. 매스 미디어의 타락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대 예술 또한 추를 다루고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 예술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들의 도발적인 방식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조적인 모델들이 공존하는 것은 미와 추의 대립이 더 이상 어떤 미학적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미와 추는 중립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두 가지의 선택일 수 있다. 미와 추의 대립 해소에서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사이보그 철학이다. 일상 속의 인간은 소름 끼치는 광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테러와 항공기 폭발과 기아와 전쟁과 고문과 강간과 살해들이 가득한 모습들은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리적 감각으로 추해서 불쾌감, 두려움, 혐오감을 일으킨다. 예술의 추가 말하는 목소리는 이 세계에는 냉엄하고 슬프게도 악한 어떤 것이 있음을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다.




추에 대한 미학적인 고찰: 추의 전율
Aesthetic Reflections on the Grotesque : The Thrill of the Ugly

예술적인 관점에서 미적인 추를 지켜보면 두려움이 밀려오기보다는 에로틱한 전율이 느껴지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페라의 유령이 쓰고 있는 가면 뒤에 숨겨있을 것만 같다. 유령 에릭이 쓰고 있는 가면 속의 일그러진 모습은 은빛의 반사로 인해 눈을 정면으로 찌르고 은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두려움과 신비로움은 병립된다. 감춰진 것은 흥미로우며 비밀스럽다. 상처 나고 기형적인 얼굴은 가면을 통해 감춰짐으로써 표정이 나타내는 직접성을 제거한다.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갈등하는 복잡한 내면은 구겨진 자아와 같을 것이다. 매끈한 존재에게서 감흥이 전달되지 않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한다. 동물적이고 무방비한 기형의 서러운 눈과 의심이 많은 늙은 농부의 눈이 만나는 변경에서 낭비될 것 없는 미와 추의 절충되는 선은 어디에 있을까? 미와 추는 안드로진 (Androgyne : 안드로지니)의 모습이다. 남성과 여성의 양성적 젠더가 합쳐진 거울의 양면이며, 그 어느 하나 다른 모습이라고 하기엔 생과 죽음, 여자와 남자,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개념은 하나였다가 존재적 성질이 둘이 된 모습을 보인다. 미와 마찬가지로 추함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역한 냄새와 더러운 구토처럼 보편적인 추로 표기되는 절대성이 있다. 진물이 흐르고 염증이 가득한 살갗은 쉽게 만지기 어려운 질병적 감염의 상태로 방어막을 친다. 파랗게 질린 울퉁불퉁한 얼굴의 고름을 방어막의 역할을 하는 장갑을 끼지 않고 접촉하기란 쉽지 않다. 가끔 이전의 추를 묘사한 문장들이나 사람들이 경계했던 추의 본질들을 보면, 그것이 과연 추한 것이었는지, 아름다운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의문이 생기곤 한다. 추한 것을 바라보면서 에로틱한 기분이나 사랑스러운 감정이 솟아오른다면 이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못난이"


사랑스럽고 예쁜 대상에게 애정을 담아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정말 못나서 못났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심적으로는 못생긴 사람에게 진짜 못생겼다고 하면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니 예의 없는 태도일 것이다. 진정으로 악한 것들은 가슴에 분노와 절망과 상실감을 몰고 온다. 뇌리에도 뜨거운 검은 충격과 백지와 같은 망각을 선사한다.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고 구토를 유발하고 눈물을 끌어당기며 온몸에서 인간에 대한 회의와 역한 감정의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진정으로 추한 것은 인간이 가진 그 무엇이다. 검게 변해버린, 하얗게 올라오는, 붉게 터져버린, 파랗게 질려버린, 푸르게 번져버린, 누렇게 눌려버린, 검붉게 썩어버린 인간을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도 인간이 가진 그 무엇이다. 검게 변해버린 것에서 슬픔을 찾고, 하얗게 올라오는 것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붉게 터져버린 것에서 현재를 읽고, 파랗게 질려버린 것에서 고통을 느끼고, 푸르게 번져버린 것에서 향수를 맡고, 누렇게 눌려버린 것에서 상처를 보듬고, 검붉게 썩어버린 것에서 새로움을 기대하는 인간을 찾아 나서는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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