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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SOY CUBA

<나는 쿠바, I AM CUBA> 《시간의 향기》 | 혁명의 재해석

by CHRIS
[I AM CUBA : SOY CUBA 1964] MOVIE POSTER


인간사에서 재평가가 없다면, 그것은 사회의 정체(停滯)를 대변하는 말이 될 것이다. 쿠바혁명사와 맞닿는 영화운동 계열은 러시아의 시적이고 느릿한 서사적인 표현태도가 아니라 브라질에서 꿈틀댄 시네마노보(Cinema Novo) 같다야 한다던 소이 쿠바(Soy Cuba)의 한 참여자. 창작자에게서조차 저평가되고 저개발 된 기억은 보기에도 침울했다. 그러나 그 안에 실린 영상, 적외선 필름으로 감광의 효과를 달리 한 열대의 풍경. 화학물질을 덧입힌 흑백의 눈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기를 억누른 2년의 시간은 헛되지 않아 보였다. 혁명의 기쁜 현재만이 아니라, 그 후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까지 바로 그려내었으니까.


혁명 뒤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물음은 혁명이 끓어오른 길의 방랑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나는 쿠바다: 소이 쿠바 Soy Cuba>는 구름이 몰려올 때만 촬영에 접어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하늘은 찍고 싶지 않다던 기다림. 그래서 <나는 쿠바다>는 나만을 부르지는 않는다. 혁명을 지지했던 동토의 의지를, 농번기마다 한바탕 불 지르던 고함과 변화무쌍한 그들의 고향 하늘과 닮은 가뭇한 색조로 한껏 색칠한다. 미하일 칼라토초프(Mikhail Kalatozov)의 세련된 감수성, 무제한의 스펙터클한 창조의 발산. 즉석에서 배우를 캐스팅하고 조련하는 눈썰미와, 폭포까지도 만들어내야 했던 불도저 같은 광기, 리드미컬한 쿠바 음악의 조합은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가며 수 천명의 현지인을 동원한 매머드신을 구사했음에도 관객과 평단의 외면 속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제작자들은 좌절과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쿠바다!"


아바나(La Habana)의 열기는 시베리아의 단단한 얼음층을 깨고 부활할 수 있을까?


대답은, YES.


2005. 9. 4. SUNDAY



혁명(Revolution)은 가슴 떨리는 단어이다. 새롭게 세계가 만들어지고 정지된 흐름을 자극하며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은 대상이 움직이고 살아있다는 소리이다. <혁명>은 주역(周易)에서 처음 등장한다.


天地革而四時成 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천지혁이사시성 탕무 혁명 순호천이응호인)

"하늘과 땅이 바뀌어 네 계절을 이루듯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혁명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혁명(革命)은 '낡은 가죽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의미이다. 명(命)은 천명(天命), 즉 하늘의 뜻을 가리키며 태초의 지구를 신이 열었다는 기독교 사상처럼 천지개벽과 같은 산고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 여기에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應乎人)'라는 맥락에서 파악되듯이 절대적인 신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와 요청이 반영된 하늘과 땅의 주체자인 인간(天地人)이 만들어낸 창조적 건설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 (레볼루션: Revolution)'은 기존 체제를 타파하고 신(新) 체제로 이행한다는 근대시기에 사용되었던 서구사회의 급진적이고 단선적인 의미만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별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낭만 없음의 세대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무지하다.



"혁명(Revolution)이란 개념은 원래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혁명도 물론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귀환과 반복의 측면이 없지 않다. 원래 레볼루치오(Revolutio)는 별의 운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이 역사에 적용되면서 한정된 수의 지배 형태들이 순환적으로 반복됨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하나의 원환(圓環)으로 엮인다. 전진이 아니라 반복이 역사의 진행을 규정한다. 게다가 인간은 자유로운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시간에 대해 자유롭기보다는 내던져진 입장에 처해 있다. 혁명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별들의 운행 법칙에 종속되어 있듯이 혁명에 종속되어 있다. 시간은 자연적 상수들에 의해 형성된다. 시간은 소여(所與), 즉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마치 별들이 지상의 인간과 무관하게 원환 궤도를 운행하면서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17세기 이후 정치적 혁명 개념 속에서도 그러한 이중의 의미가 함께 울리고 있었다. 혁명은 그 속에 참여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모든 당사자는 혁명의 법칙에 포획되어 있다."

《과거의 미래: 역사적 시간의 의미론, 라인하르트 코젤렉 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Reinhart Koselleck 1979》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과 기대의 지평은 시간의 개념 속에서 탄력성을 지닌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도 지적했듯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모든 사상적인 개념들은 역사적 인간이 살아온 축적된 경험 속에서 현재의 인식을 반영하며 미래의 기대를 동시에 포괄한다. 박정희부터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온 군사독재 시대, 사회주의 사상이 강조하던 공산적인 정치술은 배불뚝이의 자본을 폭격하듯이 폭력적인 과격함을 내포하면서 한국에 급격하게 도입되었다. 이후 혁명은 불합리한 체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는 급진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고민보다는 현재를 갈아엎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혁명이라는 단어의 역동성 때문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인가만 일어나도 모두 혁명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뒤집기만 하고 억압으로 회귀하며 대안 없는 혁명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이는 억압기제와 피억압기제 모두에게 적용된다. 386세대가 주도한 민주개혁 뒤 독재정권과 달라 보이는 일말의 민주체제의 획득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재체제에서 찬반의 입장에 섰던 행동자들이 다시 고정적인 권력의 주체가 되어 70-80년대의 감성적인 분열된 구식정치를 주도하는 현재의 한국 정치판을 바라보면, '혁명'의 인식은 부조리한 현실과 부조화를 이루며 현실감을 상실한 채로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실패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은 이제 힘을 잃을 만 한데, 이들과 대치되는 민주주의 세계의 혁명 또한 이미 욕망과 과욕으로 늘어지도록 낡아버렸기 때문에 낡은 것들이 모여 새로운 것들에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이 탐욕적인 세계에서 합리는 치매에 걸리고 정당한 의미를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다.



"순환하는 궤도가 아니라 사건들의 직선적이고 전진적인 흐름이 혁명의 시간성을 규정한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 수 있는 존재로서 미래와 관계를 맺는다. 혁명을 만들어내는 것 (Produire)은 바로 인간이다. 그리하여 변혁 (Revolutionierung)이나 혁명가 (Revolutionär)와 같은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조작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런데 조작 가능성(machbarkeit)이라는 관념은 세계의 안정성, 더 나아가 시간 자체의 안정성을 파괴한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영원한 현재를 정립하면서 모든 면에서 안정성을 제공해 주던 신이 서서히 시간에서 물러나게 된다."

《시간의 향기, 한병철 Duft der Zeit, Han Byung-Chul》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서술하듯이 혁명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적인 신의 세계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신(神)이 삶의 주체가 되기엔 행동자의 시간은 가시성과 역동성을 상실한다. 생사(生死)의 굴레에서 행동하는 인간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실재를 반영하여 미래의 소망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 바로 혁명인 것이다.


우리는 윤회의 모습과도 같은 역사의 잘못된 반복을 벗어나 앞으로의 전진을 위해, 새로운 시대를 위해 구체제가 신봉하는 허약한 사상을 소멸시키고 우리들의 세대에서 과거의 불합리한 역사들과 편협한 의견들과 분열을 조장하는 인간들에게 역사적인 종언을 선언해야 한다. 이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의 《역사의 종언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과는 다른 결을 가진 주장이다. 냉전 이후 역사의 발전을 가져올 만한 투쟁이 더 이상 없다는 역설적인 절망에 대한 토로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의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이 터뜨릴 만한 비관론은 아니다. 심리적, 정신적, 원초적 욕구가 만족될 수 없는 세계에서 그 모든 것도 의미를 갖지 않는 무의미성의 현재를 탈피해야 우리가 하나의 존재로서 성립할 수 있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지속적인 진행에 대한 독립적인 결심과 창조적 세계를 위해 과거의 불온한 모습들과 결연히 단절한다는 의미이다.


영상적인 사조와 이론적인 기조가 담긴 철학적인 관념만이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시각에서 광대한 세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상적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 무조건 타자에 공감한다고 해도 자기의식이 없는 존재의 공유적 발언은 함께 하는 방식이 아니다. 각자의 자립 없이 개혁은 공허한 외침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현상학적인 세계의 모순을 보여준다. 혁명은 돌고 도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인간사와 발걸음을 같이 한다.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는 역사적 시간을 바라보는 통합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라고 해석되는 체념적인 윤회설과 반복적인 과오를 답습하는 형태의 모습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생명의 원리와 결부된 생태적인 외부구조에 대한 습관적인 해석과 무지한 인식의 반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삶은 현재의 냉철한 관점에서 지난 과거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를 분노로 사로잡는 순간에서 벗어나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것만이 과거의 인류와 선대와 부모 세대가 답습해 왔던 어긋난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며, 혁명에서 나아가 창조의 열쇠를 얻는 방법이다. 거울여왕의 비뚤어진 인식의 거울처럼 조각난 거울을 눈에 넣고 아파하는 자는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서 내부에서 끌어 나오는 자성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 시원함만이 나는 누구인가, 혁명은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가, 창조적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흩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HOLIDAY’S SECRET REVOLUTION] 2024. 8. 31. PHOTOGRAPH by CHRIS


8월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가볍게 맥주로 목을 축이며 독서를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에어컨의 찬 기운을 맞으니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목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모포로 감싸고 한병철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Kapitalismus und Todestrieb》를 읽었다. 한병철의 책은 아홉 권째 보고 있는데, 그의 글들을 보다 보니 여기저기서 중첩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익히 아는 말들에 반가우면서도 반복되는 구절에 약간은 지겨운 느낌도 든다. 그가 털어놓고 싶은 말들에 대해 멀찍한 거리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책은 《사물의 소멸》과 마찬가지로, 한병철의 개인사 일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독일인이고 나는 한국인이다. 많은 이들이 한국을 벗어나 자신의 사상이나 생활 습관에 적합한 나라의 국적을 선택하곤 하지만, 나는 기호적으로 육체적으로 특별히 귀의할 곳이나 딱히 거취를 정할 곳은 없다. 한국인이어도 한국인 같지 않은 느낌. 어디를 가든 누구와 접촉하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의식의 괴리를 느껴왔기 때문에 육체로 표식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의 규칙에 낙인찍힌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 안의 세계를 정리하다 보면 자잘한 감정의 잔해들이나 산발한 삶의 부스러기와 이별해야 한다. 나에게서 멀어지고 흩어지는 것들에 대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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