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 D. THOREAU 1837~1861 & Henry David Thoreau's handwriting in "Walden"] Photo Edited by CHRIS
"왜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서두르고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만 되는 법칙은 없다. 남과 보조를 맞추려고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Walden, Henry David Thoreau》
누군가 차가운 모습으로 겨울에 머물러있다고 해서 뜨겁게 여름을 삼킨 이들이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무심코 놓쳐버린 부분이 다른 이의 삶을 끌어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겠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행위는 육체적인 쇠퇴로도 확인되듯이 시간적으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공간적으로는 정지된 상태, 즉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터널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을지...
아픈 자들에게 침묵은 피를 토하는 외침이다. 나는 가슴 시린 욕설로 흠뻑 젖은 귓바퀴에 향기로운 위로의 시를 들려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동굴을 벗어나서 휘파람을 불 수 있었기에. 그것이 해질녘의 오발탄으로 추락하든 원망으로 빚어진 불상이라 외면 받든 답답한 속을 털어낼 수만 있다면야! 오랫동안 족쇄에 묶인 발목을 비틀었더니 상처가 깊게 파인 만큼 쇠사슬이 헐거워졌다. 악만 남고 더 이상은 아프지가 않길래 억압에도 적응하고 굴욕에도 무덤덤해지는가 싶어 우울했는데 어느새 코끝에 바람 냄새가 맴돈다. 지난한 삶이란 슬픔으로 기워져 있어서 고통이 클수록 메울 것이 많은지 모른다. 어색하지만 조금씩 숨 쉬는 기쁨을 알아가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 봄을 느낀다.
난 너의 여름이 부럽지 않아.
2006. 8. 27. SUNDAY
글쓰기에서 가장 손쉬우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표현의 방식은 바로 일기일 것이다. 수많은 그와 그녀들, 이름도 모를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작가들의 매일의 기록들은 감동적이다. 일상에서의 경험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는 어제를 훑고 지나간 기억을 현재에 응용할 수 있도록 중첩적인 시간의 앨범을 만들어낸다. 형식에서 탈피하여 어떤 제약도 담기지 않는 솔직한 구상은 모르는 독자를 위한 특정한 방식에 매달리지 않는다. 스스로가 독자(讀者)가 되며 스스로가 화자(話者)가 되는 방식은 가장 비판적이고 맹렬한 검증인을 데리고 오며, 생활의 거짓에 시달리지 않도록 자기 검열의 기능을 한다. 게다가 시대의 규약과 타자의 비판에 얽매야하는 소설이나 시나 에세이나 연설이나 희곡이나 시나리오처럼 일정한 언어적인 표현의 형식을 갖춰야 하는 작가라는 직업적인 태도까지 던져버리는 자유로움이 있다. 일기는 하루의 성찰이라는 면모와도 결부되어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외부의 나와 분리된 정적인 음향을 조용하게 듣도록 만든다. 일자를 쓰고 매일을 적다 보니 나의 글은 한마디로 일기였다. 어느 날은 삼류 시인이 되어서 시도 써 봤다가 망측한 상상을 하는 소설가도 되어 봤다가 시건방진 시나리오 작가의 품새도 추켜 보았다가 위대한 극작가가 된 것처럼 극을 적어 봤다가 시니컬한 괴도 비평가도 되어 봤다가 간간히 흥이 나면 그림도 한편에 색칠하고 작곡을 하고 싶으면 음표도 그려 넣어 보고 철학을 논하고 싶으면 철학가의 웅변도 새겨 넣을 수 있는 그런 다채롭고 멋스러운 변화는 내부에서 표류하는 방랑자적인 이상과도 맞아떨어졌다.
《소로우의 일기》는 《월든》과 겹치는 내용이 가득하다. 작품을 읽기 위해 머릿속 마무새를 고민해야 하는 정리된 이야기보다 인간적으로 알고 싶은 산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사람 냄새가 풍기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종이 한 귀퉁이에 깨알같이 적고 싶은 충동이 인다. 실제로 정례화된 기록을 거부했던 시절의 토막 일기는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낙서하듯이 하루를 적어 넣거나 종이를 잘라 가볍게 감상을 적어 놓고 책 한가운데에 껴놓기도 했다. 신발을 댓돌에 가지런히 놓지 않고 성질이 급한 사람처럼 거리의 흔적들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놓고 들어가는 사람의 산발된 목소리는 그 메아리가 어디에서 울리는지 알기 어렵다. 가끔 한 곳에 정리되지 않는 글이나 사라진 그림들을 보면서 찾을 수 없는 시절의 한 소절에 아쉬움이 든다.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발견할 수 없도록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는 머릿속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에게 일기를 쓰라는 제안을 받은 스무 살의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1837년 10월 22일에 간단히 적어 내린다.
그가 물었다.
"뭐 하니? 일기를 쓰냐?"
그렇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일기를 쓴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마 황제의 방처럼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장소에서는 혼자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는 거미조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마루를 쓸지 않아도, 재목을 나르지 않아도 좋다.
《소로우의 일기 1837~1861, Henry David Thoreau》
첫 일기라 매무새가 정돈되지 않고 중얼거림에 그치더라도 25년간의 일기는 충분히 두터운 서른아홉 권의 삶의 기록이 된다. 소로가 죽기 전까지 가장 공들여서 쓴 글은 바로 일기였다. 실제로 《월든》의 내용들은 소로의 일기에서 핵심 문장을 정리해 놓았다. 소로와 마찬가지로 나의 십 대, 이십 대의 글들을 보면 퉁명스럽고 치기 어리고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뻔뻔하고 힘차다. 화장하지 않아도 맨 얼굴이 싱그러운 젊음처럼, 적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시절부터 꾸준하게 적었다면 지금의 글은 그 자세나 태도에서 흔하지 않은 개성적인 자연스러움을 지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힘들고 괴로울 때 속을 토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한동안 글 쓰는 것에 매진했다가 바삐 살면서 내 마음을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십 수년이 흘러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앉고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바로 일기 쓰기였다. 예전의 기록들을 회상해서 오늘에 반추하며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잘라진 부분들을 접목하는 일과는 차분하게 과거를 정리하도록 만들었고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곧 맞이할 가을로 훌쩍 건너뛸 나의 봄을 위해 뜨거운 계절과 이별할 준비를 해야겠다.
"만약 당신이 작가라면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각오로 글을 써야 한다. 실제로 남은 시간은 길어봤자 얼마 되지 않는다. 너의 영혼에게 맡겨진 순간순간을 잘 활용하라. 영감의 잔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비워라. 영감의 잔을 비우는 그런 일에서는 어떤 지나침이 있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세월이 가고 나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봄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