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ulietta degli spiriti, Federico Fellini 1965] MOVIE POSTER
COLOR, 색의 운용이 형식미를 추구하는 영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보고 싶다면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혼의 줄리에타 Giulietta degli spiriti1965>를 틀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좌절은 의식 흐름에서 몇 노트의 속도를 지니고 있을까.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물병자리의 차분한 영혼을 지닌 새가슴 속으로 진입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쓸모없는 존재라고. 넌 버림받았어!"
영혼의 부적을 흔드니 이리스가 사후세계에서 말을 걸었다. 두 개의 바퀴를 굴리는 소년을 눈길 따라 천막 속을 응시한다. 일데가르나!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조화로운 것만 보는 당신에게 난파선 밧줄을 건네는 노쇠한 노인이 있고 낡은 줄을 끌어올리니 벌거벗은 노예들이 어두운 꿈을 엄습하였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잠에서 깨면 세상은 여전하다. 친구들은 일광욕을 하고 있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섬과 물과 길을 벗어나고자 한다. 운명의 숨결은 당신의 머리칼을 움직여 왔다. 버들가지의 유혹은 비바람 속에서 긴 머리채를 내리고 올라타라고 흔들거린다.
“가브리엘라는 누구죠?”
남편은 대답이 없다. 잠꼬대 두 번, 다정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다. 남편은 전화를 끊고서 여유롭게 무언가를 찾는 척한다.
“가브리엘라는 누구죠?”
초록은 생명이고 빨강은 열정이다. 진실은 가까울수록 멀다. 물리적 형체 너머 사과를 주목해야 한다. 작고 붉고 한쪽이 일그러진 형상에서 하나의 영혼을 보아야 한다. 열정을 사용하고 나면 한쪽 어깨가 아파오고 가슴이 저려온다.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하는 코브라의 본성을 따라 갈라진 구름에서 늑대의 이빨을 본다.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사물을 그대로 응시하는 힘은 불꽃을 터뜨린 연기에서 피어오른다. 어젯밤부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사랑받는 여자였는데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나를 만지면서 기쁨을 느끼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내면을 보기보다는 거울을 봤어야 했다. 검은 망사스타킹을 사고 요부가 되어 자유롭게 몸을 굴리며 예술을 실현해야 했는데 준비 없이 내부의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
갈증을 해소하는 망각의 음료를 마시고 새로운 어제를 보러 떠난다. 빨갛고 투명한 상그리아 한잔을! 할아버지와 사랑을 나누었던 댄서를 만난다. 꽃은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한다는데 고개를 어디로 숙여야 하나. 마음은 부르트고 생각은 날아가버려. 투우용 소들은 자신의 환상에 돌진하다가 흥분한 관중의 손가락에 찔려 죽고 만다. 그렇게 불행한 먼지의 늪은 허망한 것이다. 시의 운율처럼 위험하지 않았던 노래는 남자의 가슴에 평생 자신의 꿈을 맡기고 살았던 여자의 등껍질을 조롱한다. 운명의 이상한 장난, 마법의 망원경으로 그 남자의 행적을 좇는다. 창가에서 낯선 남자가 담배 피우는 냄새를 맡고 달콤한 상상에 빠져 그와 사랑하는 꿈을 꾸었다. 그대를 엿보는 누군가를 고용하기까지.
우리의 행복은 말 뿐이어서 터지면 비눗방울처럼 작게 뻥 소리를 낸다. 순수와 진실은 메말라 간다. 숨김없는 눈빛에 일생을 가두었던 작은 새는 집이었고 남편이었고 울타리였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던 그를 떠나면서 용서를 구한다.
“나를 죽인 이들을 풀어주세요.”
스핑크스가 웅크린 사원을 벗어난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까? 화려한 생활, 지쳐버린 미인들. 독재자의 성곽을 벗어나 나의 육체와 신성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다면, 난 이미 떠난 새라네. 밤마다 우리는 함께 하였지만, 내가 들은 건 누군가가 우는 소리며 바람소리였다. 아침, 대문을 나서 담장을 돈다.
2005. 7. 3. SUNDAY
움직이는 빛(Lumière)의 그림은 그 이름과 같았던 뤼미에르 형제(Auguste & Louis Lumière)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는 정지된 사진에 숨결을 불어넣고 활동성을 부여한 이 별난 발명가들의 손에서 얇은 플라스틱 필름막에 순간을 방사하여 릴(Reel) 필름(Film)으로 재탄생되었다. 1895년 2월 13일 뤼미에르 형제가 특허권을 얻은 시네마토그래프 (Cinématographe)는 영화 촬영과 상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계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영화 상영 시스템의 기초가 된 시네마토그래프는 카메라, 필름 현상기, 영사기의 기능을 하나로 결합한 혁신적인 장치로,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Le Grand Café)에서 세계 최초의 상업 영화인 <열차의 도착 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을 상영하였다. 당시 영화에 대한 개념이 생소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50초 분량의 다가오는 열차의 속도감 있는 기적소리는 영화산업의 출발점을 알리게 된다. 이후 영화는 시, 극, 글, 그림, 사진, 문학, 철학, 소설, 오페라, 춤, 노래, 음악, 무대장치, 실내미술 등 예술적이고 인문적이면서 서사적인 장르를 총망라하면서 종합 대중예술을 대표하는 선봉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빛과 그림자의 행동 연극이었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찰나를 담아낸 필름 속에서 급발진하듯이 다가오는 영상의 기차를 타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시간을 잇고 공간을 가로채는 움직이는 사진은 입맛대로 사건을 조작하고 이야기를 구성하고 단상을 자른다는 편집의 묘미와 더불어 어느덧 우리가 글과 말로 설명하던 시간의 구절들을 화면과 음성으로 세밀하게 기록하였고 짧은 시간 내에 다량의 데이터를 쌓으며 129년을 흘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난 한 세기를 넘게 거치며 영화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극적인 사실감을 획득하였다. 특정한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영화는 현실을 동일하게 투사하는 전문 보도(報道: Broadcasting)의 영역으로 전이되면서 점차 사실이나 정보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개별화된 의식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영화적 기법들을 활용한 다양한 앱 개발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스토리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서 기존에 요구되던 전문적인 기술의 습득이나 작가적인 실체를 구하지 않아도 핸드폰에 탑재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의 라이브 방식을 취함으로써, 에로틱하고 은밀하고 한 단계 가린 듯한 간접적인 방식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동시에, 옆에서 듣는 듯한 직접적인 대사와 다채로운 기술 기법의 발달로 인해 미장센은 가볍게 날려버리고 토씨 하나 명확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사(敍事)의 베일은 거두어지고 은유는 사라지거나 복합적인 상징은 파괴되었다.
안으로 파고들어 갈수록 끝이 없는 인생 이야기는 간단하고 표피적이지 않으면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세대에게는 읽히지 않는다. 반대급부적으로, 하나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복잡한 심리구조와 내면세계에 빠져들면서 상호 응용적인 평가와 삶의 설명에 길들여진 사람에겐 시간을 들여 볼 만한 맛깔스러운 작품들은 많지 않게 되었다. 개인적인 기호와 부합하는 감독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상에서 하나둘씩 사라졌고, 작가들이 바라보는 줄거리는 일상을 운운하며 잡담으로 흘러간다.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은 심도를 논하기에 시선 너머의 지평을 상실해 있다. 의미로운 이야기가 사라진 세계에서 마음을 투영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그림이 얇아지고 있다는 것은 넘겨 볼거리가 적어진다는 소리일 것이다.
각자 살아왔던 시간과 삶의 습관들이 생각의 격차를 벌려놓았을 것이다. 인생은 타인과 결코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먼 거리조차 어둠에 가까워져 갈수록 한 지점으로 토끼몰이를 하듯이 좁혀지게 만든다. 주류가 휘모는 텃세를 비껴 담장을 떠난 새에겐 미래를 달랠 필요가 없는 회귀의 본능만이 가득할 것이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몸속을 떠도는 생동하는 혈류가 알려주는 육감 이외엔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다. 간혹 그려왔던 나의 초상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보일 듯 말 듯 빛과 어둠 사이에 살포시 끼어있는 모노톤의 음영이 납작하게 숨을 쉬고 있다. 긴 호흡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 담아내고 싶은 그림을 구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