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뉴튼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급발진 교통사고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내노라는 사진작가들이 거장에게 바친다고 렌즈를 들이댔다. 잡지 면수를 늘리기 위해 이들에게 카메라를 맡긴 걸까. 은행가서 번호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엉성하게 장난친 그림들을 싣고서 한마디씩 이론을 던지고 있었다.
"노골적이고 섹시한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독립적인 여성상을 심어주고서 흑백 죽음으로 승화된 당신에게."
솔직히 그의 사진은 쉽지 않다. 정제되고 깔끔한 맛은 있지만 노골적으로 성이든, 돈이든, 사회 현실이든 무언의 힘에 억눌렸던 자신을 뱉어내는 듯 해서 보기가 힘들다. 한 개인이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억압되어 있었다는 내부 고발로 들린다. 그가 그려낸 여인들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긍심있는 여성들이나 책임감 있고 적극적인 여성들의 모습이었기 보다는, 사랑이란 이름 아래 성(性)이라는 굴레로 금전적 관계로 집착으로 사회적 현실로 한동안 갇혀 생활하면서 외로웠던 그의 모습이며 독백으로 들린다.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카메라였기에 그가 그려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카메라 각도의 기울기로 인해서인지 선택된 배경 때문인지 올려다 보거나 내려다 보거나 억누르고 쳐다보거나 감시당하는 굴욕감이 비쳐진다. 시선은 무표정하게 항상 같은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도 말이다. 즐겁지 않은 냉소를 띤 얼굴의 여성들은 비정상적인 권력을 표시하곤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신선하고 놀랍게 보였겠지만 이런 형태적 모습은 과연 독립적일까? 카메라를 들고 있던 그의 모습이나 모델들과의 작업과정을 봐도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한 사람이 살았던 곳.
그가 사랑했었던 사람.
그리고, 갇혀있었던 장소.
좋은 추억인지 악몽인지 알 수 없는 낱낱의 삶.
알 수 없으면 사람들은 드러난 현상으로만 본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선 마음을 풀기 위한 곳을 찾아야 하고 그 영상을 담을 땐 자신이 기억했던 한 순간을 찍는 것. 그것을 통해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도 있고 기억을 되살리려는 사람도 있다. 검붉은 암실에 들어가 용액을 뿌려대며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에 서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순간이 지워질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이들면서 그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까? 오늘은 물음만 한 가득이다. 그를 잘 모르기에 그가 후회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최근작까지 그다지 편하진 않았다.
2004. 9. 4. SATURDAY
컨셉 회의 도중에 특정 촬영 기법이나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 구체적인 작가의 예시를 들면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니까 시대를 한참 건너뛴 기호로 인해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책이건 그림이건 영화건 사진이건 음악이건 별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은 타인과 취향이 달라서인가 보다.
기억에는 덮개가 있을까? 덮어두고 싶은 기억들은 덮을 수 있을까? 콤콤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노나 슬픔, 괴로움이 없다면 어느 정도 치유된 것이라고 한다. 간혹 감정이 울렁이는파도처럼 밀려올라오기도 하지만 가슴 아래에서만 흔들리고 눈 밖으로 넘실거리지 않는 것을 볼 때면 괜찮아졌나 싶다. 그러다가 갑자기 훅 하고 올라오는 마음을 마주할 때면 날카로운 자각이 발동하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삶은 왜곡과 변형이 일어난다. 외면하고 싶은 과거를 직면하는 순간에는 삶에 대해 온통 궁금한 질문이 가득했다.
질문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고 했다. 어차피 인생의 답은 질문을 던진 본인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은 우문현답과 같은 삶의 진행과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