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좋다. 한껏 은은하게 살갗을 어루만지는 달빛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그 차가움도 황홀하다. 자꾸만 그 손길에 몸을 내맡기게 된다. 하늘이 닫히고 완전한 일식이 찾아오면 마음속도 어두워진다. 어두워진 장막 뒤로 또다시 시커먼 먹장구름이 끼면 그때는 속 안의 열기를 종잡을 수 없다.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알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는 폴 베를렌(Paul-Marie Verlaine)을 좋아했다. 그 남자의 연약하고 무절제한 감수성을 사랑한다고 했다. 친구의 손에서 건네진 베를렌과 랭보의 시들을 읽어 내리며 곧, 감정이 풍부한 여인네 같던 베를렌과 혈기 왕성한 소년 랭보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베를렌의 시는 아름다웠지만 열정이 넘치던 열여섯 살엔, 내 나이와 같던 랭보가 마음에 들었다. 생동감 있던 그가 좋았다. 그가 던져대는 세상을 향한 젊음의 우쭐거림을 들으며 좁은 교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껄렁한 시들과 함께 생소한 파리의 거리 위로 힘차게 내던져져 버렸다.
베를렌(Paul-Marie Verlaine)과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그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 <토탈 이클립스 Total Eclipse>. 천재적 연기파 소년 디카프리오가 천재 시인 랭보를 재현한다며 떠들썩하게 신문광고가 나가곤 했을 때 모든 시선은 랭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의문을 남긴 사람은 랭보가 아닌 베를렌이었다. 왜 베를렌은 예쁜 아내도 자식도 다 내팽개치고 품 안의 둥지를 떠날 랭보에게로 갔을까? 손아귀에서 벗어나 한 달음 뛰쳐나갈 것 같은 아름다운 청춘에 어째서 그토록 집착했을까? 방랑을 원하던 랭보를 보내주기 힘들 정도로 미치도록 사랑한 것일까. 자조적이고 혁명적이고 자유로웠던 랭보와 달리 충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사랑에서 삶을 갈구하는 사내 베를렌. 베를렌이 원했던 것은 뭔지, 그리고 그 안의 공백이 되어버린 아내와 아이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랭보에게서 생기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싶었던 베를렌의 절박한 호소에 한참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한낮의 더위에 질렸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달을 가려버린 비가 내리고 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걸까.
비로 만들어진 토탈 이클립스.
셀로판지를 대도 환형을 그릴
달 문양은 볼 수 없겠지만
어두움 뒤에 빛나는 존재는 언제나 있겠지.
마음을 폭풍우로 만들어버리고
시커먼 먹구름을 끼게 해도
그 달을 찾기 위해
암흑으로 달려버린 사람들이 있겠지.
랭보와 베를렌처럼.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꿈을 꾼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손길 아래 머무르는 꿈을.
어두움에 누워서 가려버린 달을 찾는다.
《자주 꾸는 꿈》 폴 베를렌
나는 자주 꾼다 이상하고 가슴 깊이 스며드는 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미지의 여인의 꿈을, 그녀를 볼 때마다 전혀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또 전혀 다른 사람도 아니면서, 날 사랑하고 날 이해해 준다.
그녀가 날 이해하기에, 그리고 그녀에게만 투명한 내 마음은, 아! 그녀에게만은 난해하지 않다, 그리고 내 창백한 이마의 땀을, 그녀만이 알고 있다 눈물로 시원히 없애는 법을.
그녀 머리칼은 갈색인가, 금발인가, 붉은가? – 나는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나는 기억해, 그 이름이 부드럽고 낭랑하다고, 인생이 추방했던 애인들의 이름처럼. 그녀의 눈길은 흡사 彫像들의 눈길,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듯한, 고요하고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로 말하면 죽은 그리운 목소리들의 말씨를 지니고 있다.
《Mon rêve familier》 Paul Verlaine
Je fais souvent ce rêve étrange et pénétrant
D'une femme inconnue, et que j'aime, et qui m'aime
Et qui n'est, chaque fois, ni tout à fait la même
Ni tout à fait une autre, et m'aime et me comprend.
Car elle me comprend, et mon cœur, transparent
Pour elle seule, hélas! cesse d'être un problème
Pour elle seule, et les moiteurs de mon front blême,
Elle seule les sait rafraîchir, en pleurant.
Est-elle brune, blonde ou rousse? - Je l'ignore.
Son nom? Je me souviens qu'il est doux et sonore
Comme ceux des aimés que la Vie exila.
Son regard est pareil au regard des statues,
Et, pour sa voix, lointaine, et calme, et grave, elle a
L'inflexion des voix chères qui se sont tues
2004. 9. 6. MONDAY
[TOTAL ECLIPSE 1995] Movie Poster
호르몬이 가득했던 시절, 거칠고 열정적인 사랑은 정신에서 시작한 것인지 육체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영화나 문학, 음악과 그림, 철학과 사진에 빠져 들었을 때 그 안에서 표현을 담당하던 사람들의 사랑과 삶을 바라보면,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평범한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규칙적으로 심심하게 살기보다는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거침없이 충실하게 표현하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방법도 알지 못했지만, 삶의 가치와 내 안의 감정과 미래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불륜과 이혼과 오입질과 각종 중독들. 주변에 그런 부모들로 인해 방황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어렸던 우리는 그런 말을 하길 꺼려했다.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나이였고, 피해 당사자라기보다는 피해의 굴레에 살고 있는 주변인이었고, 미성숙한 보호자가 존재하는 철없는 미성년자였으므로 각자의 고민들은 마음 바구니가 터져나가도록 가득 담아둘 뿐이었다. 친구들과 또 다른 고민으로 의문의 시간을 보내던 자는 삶에 대해 궁금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유쾌한 초상의 이면에는 위험한 파도가 소란스럽게 울렁였고, 어두운 내부와 화사하게 밝아 보이는 바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비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매는 무심해지고 입은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언제인가 거울을 보았을 때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꿈을 나직이 외쳐도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은
결연히 현재의 시간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자주 꾸는 꿈속의 그 사람처럼
친숙하고 다정한 말씨를 지닌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차분한 밤, 까막 비가 내린다.
창문 밖 보이지 않는 달빛이 뿌옇다.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는 천문학에서 개기일식(皆既日蝕) 또는 개기월식(皆既月蝕)을 의미한다. 개기일식(Total Solar Eclipse)은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들어가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것이며, 개기월식(Total Lunar Eclipse)은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들어가 달이 완전히 지구 그림자에 빛이 차단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차용되는 <토탈 이클립스>는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지칭하거나 감정적으로 압도된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마음과 행위와 삶의 모습이 일치되는 평온한 느낌이 아니라 내부를 거칠게 휘젓거나 암흑처럼 깜깜한 색으로 도배되어 있다면 보이지 않는 미래는 불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서양 문화권만이 아니라 동양 문화권에서 흔히 알고 있는 일식에 관한 신화는 모든 것이 가려진 하늘의 어두움을 신비롭고 두려운 천상의 노여움으로 인식했던 고대인의 생각에 의존한다. 중국에서는 개가 해나 달을 삼킨다는 전설이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날 때 큰 소리를 내거나 북을 쳐서 개를 쫓아내는 설화가 전해진다. 북유럽에서도 괴물 늑대 형제인 스콜(Skoll)은 태양을 쫓아가며, 하티(Hati)는 달을 쫓아가며 해와 달을 삼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늑대들이 태양과 달을 삼킬 땐 일식과 월식이 발생한다고 여겼다. 마야에서도 개나 큰 고양이가 달을 삼키는 것으로 월식을 이해했다.
어느덧 순수한 열정을 따라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미지의 달림은 사라져 간다. 저 하늘의 현상들이 태양이나 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나란하게 일렬로 줄을 섰기 때문이라고 과학적인 논리로 말해진다면 정말 낭만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가만히 밤하늘을 볼 때면 한 때의 시절이 어둡게 상기되더라도 아프도록 해와 달을 삼킨 열정만은 그리워하게 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