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이든, 금발이든, 주근깨 가득한 소녀든... 소수가 다수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은 바로 진정한 위협이나 상상의 것들이 두려움을 깔고 있을 때이다. 소수란 것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싱글맨>
게이로서 '소수자'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와 "게이의 삶이나 사랑 모두 일반인과 같다"는 개인적인 철학을 음울하게 던지는 톰 포드(Tom Ford)의 <싱글맨 A Single Man>. 톰의 옷이나 화장품, 가방처럼 깔끔한 슈트로 보이는 정갈한 실루엣으로 조합된 일상의 배경들, 톰 포드를 베껴놓은 듯한 콜린 퍼스의 중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외모와 대학교수의 지성적인 습관들, 완벽한 미남 미녀들이 포진한 60년대의 풍경들, 대마초와 심장약을 한 무더기 먹은 듯한 몽환적인 응시... 하얀 백지에 검은 점을 흘리면 그만큼 거슬리는 것이 없듯이 완벽함을 지향하는 공간은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벗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부각하는 요소가 된다. 성적 소수자의 외톨이적인 시선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무형성의 자괴감과 다수의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불안 섞인 씁쓸한 자조를 피어낸다. 내뱉기도 어려운 사람들을 다루기엔 먼지 없이 완벽하게 포장된 공간이 기형적으로 갈증 요소를 증폭시킨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사회를 강타하고, 그 두려움은 개인의 심장까지도 가책 없이 질책한다. 아이들이 정원에서 뛰어놀고 부부끼리 사랑스럽게 속삭이는 단란한 모습을 몰래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겐 일상의 행복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것들 모두 손바닥으로 싹싹 문질러버리고 싶은 나비와 같은 꿈이다. 몸을 옥죄는 슈트를 벗고 한바탕 흘려놓고 싶은 누설의 욕망을 침대 위에 왈칵 쏟아버린 화면 속에서 용기 내어 말하는 발언자들에게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살다 보면 같이 있어도 또 나름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지 않은가.
2013. 5. 21. TUESDAY
"소수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공포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진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싱글맨>
비극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 질린 보통의 관객들을 목표로 한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소재, 시각을 흔드는 기술은 똑같은 모습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로 인식되고 있다. 톰 포드가 영화를 디렉팅 한다고 했을 때 구찌(Gucci)라는 검은 아우라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그가 자신의 어떤 감정을 그리고 싶었는지 듣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멋진 세트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영화, <싱글맨>. 이 세상에서 혼자서만 살 수 없음을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감하리라. '홀로'라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슬픈 것인지를.
의식이 앞서간다고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조롱을 듣게 된다. 태어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성(性)'이 의도하지 않게도 세상의 거스름이라고 알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식 또한 생식에 집중된 히스토리 학습의 효과일 것이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걸 용인하기엔 편협한 지구는 확실히 비좁다.
개인주의 성향의 서양적인 사고에서는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사람들에게 성(性) 정체성이 중요하다. 생식이라는 공간을 지닌 몸과 이를 관통하여 삶과 죽음의 순서를 형성하는 시간과 현실에서 나아가 과거에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할지 모르는 헤테로토피아를 한 번에 담고 있는 본질인 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애와 타자에게 몰입되는 사랑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몸을 감싸는 대상에 성적 정체성과 사회적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자로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등하는 에로스적인 성(性) 정체성보다는 그저 지속적으로 타나토스에 몰입되고 마는 삶(生)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마도 현재 모든 표현의 가치점이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한 가지에 집중하여 표현하기보다는 중성적인 지점을 모색하는 이유도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적인 위치가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에 근거한다.
프로듀서로서 같은 디자이너의 직업을 갖고 있긴 하지만,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동명소설 《싱글맨》을 그린 톰 포드의 감수성은 나와는 먼 거리가 있다. 말랑함은 사라지고 세월에 변질된 딱딱함과 날카로움이 가득한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문학적인 소양으로 내부의 관념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어야 흡입력 있는 삶의 진실이 흘러나올 것이다. 센티멘탈한 타인의 삶, <싱글맨>을 다시 떠올린 것은 며칠 전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 Le Corps Utopique | Hétérotopie》의 '유토피아적인 몸(LE CORPS UTOPIQUE)'의 섹션을 읽으면서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인간의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주연 배우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가장 오래된 유토피아 중의 하나는 공간을 집어삼키고 세계를 정복하는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몸에 대한 꿈이 아닌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긴 그의 눈앞에서 당신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젠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침묵시키고 달래주고 상자 안에 넣은 것처럼 가두고 닫아버리고 봉인한다. 그래서 사랑은 거울의 환영, 죽음의 위협과 사촌지간이다. 사랑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두 형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나 사랑 나누기를 좋아한다면, 사랑 안에서 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Hétérotopie, Michel Foucault》
미셸 푸코의 문학적이고 현란한 사색적인 어투는 분명 헤테로토피아로 넘어가기 어려운, 그렇다고 유토피아도 찾을 수 없는 몸과 뇌질적인 사고의 창을 투사한 시선의 분리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존재의 치유불가능한 상처를 가지는 성적 소수자들의 특이한 사회적 정체성과 사고에 걸맞지 않은 몸의 관념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에서 던져주는 옷을 쉽게 받아 입을 수 없는 한 인간이 있다. 그녀는 생(生)의 소수자로서 스스로를 만들고 스스로를 해체한다. 긴 머리카락을 펼치고 침대에 가로누워 펜촉에서 흘러나온 글이 조용히 노래하는 죽음의 피처럼 하얀 침대보에 까맣게 번져 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잊는 것이 두려워? 하지만 너는 나의 삶이 될 수도 없고 내가 될 수도 없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리인 유토피아의 반대편, 헤테로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