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영혼과 불과 이슬의 소녀.
하늘의 지평선에서 만난 좋은 별들은 영혼과 불과 이슬의 당신을 만든다.
《빨강머리 앤의 서문에서》
빨강머리 앤, 보는 순간 홀딱 빠져버린 몇 안 되는 계집애다. 철부지 소녀라는 말도 잘 어울린다. 작은 아이의 반짝이는 눈은 예뻐서 감탄한다. 외롭다는 한숨을 두 팔로 안아주고만 싶다. 홀로 퉁명하게 울어대던 마른 손을 잡고 노란 짚더미가 쌓인 매튜 아저씨의 마차 위에 누워서 풀피리를 불며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종달새가 되고 싶다. 정말 아름다운 아이다. 대학 시절, <빨강머리 앤>을 아침마다 재방송을 해준다고 했을 때 이 소녀 때문에 수업 시간도 조절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손꼽아 기다리며 보았다. 너무 재미있어 깔깔대고 발 구르고 말 따라 하곤 했다. 언제 봐도 즐거운 상쾌함. 순수함이 뿜어 나오는 활력의 달리기. 그녀에게서 달리는 재미를 배웠다. 그러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의 《Anne of Green Gables》을 읽었다. 물론 원작으로 보았을 때도 감동은 여전했다. 놀라운 다락방의 먼지냄새가 다정했다. 풍부한 언어로 꿈을 가볍게 포장하면서 하늘로 띄웠다. 풍선처럼 떠다니는 아이의 희망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 가끔은 철없게 구는 행동까지. 모두가 보아도 들어도 행복했다. 그래선가 이 빨강머리 앤은 밝음과 희망의 얼굴을 가진 기억의 첫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꿀꿀한 기억이 아니라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가며 보게 되는 비밀스러운 아이의 소란스러운 감탄. 사과라는 말도 고백이라는 말도 뜨거운 찻잔 속에 또로록 부으며 말할 수 있는 대담한 용기는 기분을 썩 좋게 만들어 버렸다. 허영과 짜증, 고통도 서로 꼭 안아주면 쉽게 치유됨을 보았다. 한밤의 콘서트 같은 벚꽃 박수가 조그만 입에서 졸졸 흘러나온다. 아직까지도 그 음악을 듣는다. 곰방대 연기처럼 말없이 사라진 아저씨의 추억과 시력이 가서 소리로만 사람들의 인기척을 알아채는 아줌마는 슬퍼도 빨강머리 앤이 부르는 시냇물의 노래와 튤립의 향기와 검은 동굴이 부르는 옛이야기는 꼭 간직하련다. 이 노래를 흥얼대며.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2004. 10. 22. FRIDAY
새소리처럼 청량하고 개울물처럼 재잘거리는 소년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봄이 연상된다. 우울하고 헛된 마음조차 풍부하고 상상력이 가득한 목소리를 만난다면 차갑고 단조로운 일상이 활짝 피어나지 않을까 싶다. 예전엔 입춘을 맞아 문 앞에 커다랗게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을 붙여 놓았는데, 그런 풍습도 지나간 지 오래다. 그래도 거스를 수 없이 겨울은 지나가고 봄은 다가온다. 나지막하게 올해의 복과 번영을 빌어봐야겠다. 입춘을 맞아 큰 행운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