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ld 더 차일드> 조용한 깨달음
장 피에르(Jean-Pierre)와 뤽 다르덴(Luc Dardenne) 형제는 구질구질한 거리의 인생을 서푼짜리 무게의 낚싯줄로 엮는다. 낚싯대가 허술해 담을 것이 없는 세상. 얕은 물의 고기는 누구에게 지탱할 작은 몸이 전부다. 허무한 꿈. 부산한 욕망. 헛된 놀음들. 가난한 사람들은 복권을 긁으며 대박을 노린다. 한강에서 낚시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붕어나 잉어보단 페트병이나 쓰레기 뭉치를 건지게 될 거면서. 실험실의 생쥐들은 해부를 거부할 수 없다. 몸뚱어리를 발가벗기고 털을 뽑히고 전기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 소외되고 구속된 몸체, 알 수 없는 탈진. 날카로운 눈의 과학자는 세상의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뭐가 어제보다 좋아진다는 것인가? 좀도둑의 주머니는 구걸자의 입처럼 끊임없이 소란하고 가벼운 기침을 토하며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하루의 풀칠거리를 찾아 바보 같은 발상을 거듭하는 놈들은 빈곤한 자를 삥 뜯고 서로에게 구라를 친다. 아줌마들의 장바구니에 든 돈뭉치나 꼬마들의 껌 값이 그들의 골골한 저녁을 책임질 것이다.
엉터리 같은 판단을 반복하는 놈들을 보면 혀 한번 차고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단어를 쓰게 되지만 그 또한 내 모습과 닮아 있어서 입술을 꾹 다물게 된다. 어리석은 자에게 중요한 것은 또 뭐가 있더라? 소소한 것에도 참한 것이 있거늘 부유하고 거창한 단어에 길들여진 게 이상하다. 백억, 이백억, 삼백억. 회장님, 사장님, 사모님. 부자, 최고, 일등. 최초, 최대, 최다. 거대하지 않지만 거대한 것들에 휩쓸려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들. 유한한 이 생에서 불행은 일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허용의 관념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을 잃으며 죽는 사람들에겐 결국 아무것도 일어난 게 없었던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생을 조금이나마 나눈 부모들이고 그들의 이익과 판단에 따라 생사가 달린 아이들은 이 품에서 저 품으로 울음도 없이 새근거린다. 그래도 끝에는 반성하는 사람이 있어 어린 부부의 철없는 행동이 우습고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2006. 2. 19. SUNDAY
인생은 언제나 쉬운 적이 없었다. 반대로 인생이 너무 쉬워 자살한 예술가도 있긴 하다. 살아가기 쉽거나 살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 쉽고 쉽지 않고의 차이는 삶을 살아가는 관점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불법 이민자와 무직자 여성, 도덕적 개념이 부족한 미성년자들, 좀도둑질로 살아가는 부랑자들, 하루를 근근이 이어가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기댈 곳 없는 실업자들. 결핍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은 살아갈 기본 조건들이 부족하다. 핸드헬드로 어지럽게 이상을 좇는 사람들을 급박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상실한 윤리적 관념과 불가능한 꿈들의 세계가 높은 장벽으로 다가온다. 벽에 막힌 듯한 좌절의 부딪힘 속에서 거칠게 흔들리는 시선은 끊임없이 울어대는 핸드폰 소리와 질주하는 차 소리에 막혀 숨 넘어갈 듯이 헐떡이는 존재와 같은 호흡을 토로하고 있다. 비판적 리얼리즘 뒤에는 시대의 반성과 미래에 대한 개선적인 사고가 드러나야 한다. 좌측과 우측으로 기울어져 삐딱하게 걸어가는 길이 우리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 손에 쥔 것은 가난하지만 당신과 내가 잉태한 공동의 유산을 끌어안고서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만이 그래도 희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