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예술, 알랭 코르뱅》 침묵의 역사
침묵하는 것이 어렵다면 말할 시기와 침묵 사이의 공백이 주는 무게감을 알게 된 것이다. 침묵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은 비밀을 말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술과 허공에 노니는 혀, 자잘한 석회질의 암석 속에서 공을 힘차게 던진다. 곧 의미로운 시간은 불발한다. 근대 프랑스 역사와 미시사를 살피는 알랭 코르뱅(Alain Corbin)의 《침묵의 예술 Histoire du silence: de la Renaissance à a nos jours》은 시간, 공간, 소리, 냄새를 거쳐 작가와 예술가,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조용하게 서술했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침묵의 역사를 돌아본다. 자연이 내는 소리는 번잡함조차 자연스러운 소란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인간이 만들어낸 소리들은 떠들썩한 소음으로 인식된다. 현대의 공간은 온통 인공적인 소리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옛날 사람들이 빠져들었던 그윽함과 흥취를 따라 묵상과 몽상을 거듭한다. 명료한 내면의 장소이자 침묵의 말인 그림, 사물들의 아늑함과 침묵의 경험을 전달하는 글 속에서 낯선 기슭에 들어선 방랑자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과거의 침묵을 환기하는 이유는 침묵의 탐색, 밀도, 준수, 전략, 풍요로움과 더불어 말의 힘에 있는 양상이 침묵하는 방법, 즉 나 자신이 되는 방법을 다시 배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알랭 코르뱅, 《침묵의 예술》
행동과 결정을 짓는 침묵의 알갱이가 진흙이 되어 몸을 감싼다. 침묵의 다양한 구조가 안개처럼 스며드는 거실과 침대, 납처럼 무거워진 침묵 속에서 숨 쉴 수 없는 침묵의 연기는 목을 채운다. '틀어박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즐기며 밤마다 글을 쓸 수 있는' 호텔방을 갖고 싶었던 프란츠 카프카의 욕망은 일을 하는 도중엔 묵을 호텔방을 갖고 있어도 일어나기 힘들다.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와 그의 욕망을 다시 욕망하며 침묵한다. 사물들과 마주칠 때 서로 응시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침묵의 교신은 영혼의 후광을 밝혀준다. 눈이 내리면 여러 소리가 들린다. 침묵이 맞닿는 면적은 사물들과 포옹하며 그 무게로 존재를 알린다. 무수한 꽃들의 단아하고 묵직한 인사는 비밀로 가득 채워진 저수지처럼 움푹 파여 있다.
"모든 계절은 앞선 계절의 침묵에서 비롯된다"는 말처럼 이제 곧 입춘이다. 밤의 고요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비아날로그적인 태도는 기계적인 기록의 습관을 얼마나 가볍게 날릴 수 있을까. 침묵의 지척에서 밤의 그늘과 호흡을 함께 한다. 무수한 고요들의 고요가 뿌려진다. 사막의 모래와도 같이 별로 가득 찬 우주를 바라보며 충만한 침묵에 눈을 감는다. 바다, 사막, 돌, 이끼, 밤하늘, 숲, 들판, 광야에서 영혼은 유유히 산책하며 광활한 공간을 사로잡는다. 청각적 폐허로 말미암은 고요한 움직임은 열정의 침묵이요, 자기 고요일 것이다. 침묵의 엄중함과 묵음으로 단련된 공간 속에서 변화된 말의 침묵을 받아들인다.
"이미지는 말하는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서설만이 아니라,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 따르면 "그림은 말없는 시"인 것이다. 역설적 침묵에 지배된 수태고지와 라파엘로의 <성모의 침묵>, 밀레의 <만종>만이 아니라 신체적 움직임으로 소리를 대신하는 무성 영화들의 움직임은 침묵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찾는 교양과 예절 수업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진실을 말하기 위험할 때 입을 다물줄 안다면 깊은 침묵과 절제된 몸짓, 의미심장한 표현, 얼굴의 표정들에서 쉽게 누설되지 않는 과묵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기력하고 냉혈하고 불신이 가득 찬 의심스럽고 빈정거리는 억제의 침묵과는 이별해야 한다.
침묵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지속할 사람들에게, 사랑을 품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랑이 끝나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사랑을 나눌 때는 침묵이 언어보다 낫다"는 블레즈 파스칼의 말처럼 사랑의 풍미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혀에서 빛난다. 몽상적인 침묵의 속삭임이 끝나면 사악한 침묵이 바닥을 드러낸다. 미지의 침묵이 지르는 냉랭함이 공기 중에 감돈다. 굉장한 존재는 번잡스러운 도시에서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영원한 침묵은 고통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들에게 결코 말을 거는 법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타자의 응답을 바라기 보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생의 마지막을 향한 변함없이 둔중하고 인색한 일련의 침묵 속에서 빅뱅으로 소멸하고 팽창하는 죽음과 생성의 블랙홀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유혹적인 목소리를 낸다.
"조용히 해요. 당신을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