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루게릭 투병 중에 일군 <두모악 갤러리>를 남기고 제주의 오름에 묻힌 사진가. 2005년 5월, 영원의 섬 이어도로 떠났다. 나는 자연이 붓질한 그림을 많은 이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사람의 눈은 한 가지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고 마음이 부른 호소에 더 끌리기 마련이니까. 스스로의 미학을 끌어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 앞에 있어도 지휘자의 손짓에 열렬히 화답하지 않는다. 내가 김영갑의 사진을 그저 사진으로만 취했다면 범작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사진에서 제주의 바람, 풀, 바다, 돌, 오름, 산이 보이는 게 아니라 김영갑이라는 인간이 보인다. 사진에서 느끼는 것은 하루 몇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연의 턱을 수없이 오고 갔던 기다림의 발길인 것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마음을 흔든 그의 영혼이 현재에는 이 세상에서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낯설었다. 책이 나올 때만 해도 버팅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일 년 사이에 그는 없다. 멀찍이 그를 방문한 죽음을 보며 실체가 없는 환영에 짓눌릴 정도로 이상하게 죽음은 상실감이나 허탈함과도 비슷한 아쉬움을 남긴다.
"뭍 것 총각 김영개비"
제주 토박이들이 혼자서 카메라를 짊어지고 제주를 훑는 김영갑을 걱정해 주며 즐차게 불렀던 호칭이다. 침침한 등 밑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정신수양을 한답시고 청승을 부리면 좀 어떤가? 그에게는 드넓은 자연이 있다. 들풀의 향기로운 축제를 즐기는 사람. 태풍과 홍수, 혹한과 가뭄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구도의 사나이.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멀리하는 불행과 슬픔이 오늘의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겸허히 말할 수 있는 묵묵한 명상자. 자연만으로 혹은 사람만으로 살 수 없는 싱거운 세계에 간을 치려고 마라도로 떠난 선자. 사진에서 유토피아를 체험한 아리스토. 제주도 노인들의 갈라진 손끝에서 질긴 생명력을 맡았던 겉 늙은이. 외로움과 평화에 대한 주제를 파노라마 작업으로 그린 은둔자. 그에 대한 표현은 모로 되든 가로 되든 하나의 점으로 집약된다.
사람의 속내를 뜯으면 가까운 자신과 비슷한 얼굴이 숨어있음을 발견한다. 김영갑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다."
습기와의 싸움, 화기와의 분투. 초가집, 돌담, 팽나무, 노인, 아이, 초원, 바다, 중산간 마을, 해안마을을 누볐던 그는 치열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을 구도하는데 인생의 초점을 맞췄다. 우리는 호전적인 가면을 쓸 수도 내성적인 가면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두운 자신을 밝혀야 하는 것은 바깥의 밝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반드시 인생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독특한 빛 그림을 그리려면 밝기 조절은 그만큼 더 힘들다. 외톨박이나 외골수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하나에 몰두하는 노력에 비해서 마음의 렌즈에 곰팡이가 자주 피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빈번하게 닦아줘야 하고 시시 때때 변하는 감정을 다스리기 쉽지 않다. 바람을 안고 초원을 떠돈 김영갑의 생활은 국밥 한 그릇에 올려진 시뻘건 김치조각과 같다. 그는 자연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안개 짙은 장마철, 치자꽃 향기에 취해 커피를 마시거나 눈이 소복 쌓인 밤, 보름달을 보며 차 한잔 마시는 걸 즐겼다. 그가 취해있던 선경의 오름에서 한줄기 오르가슴을 느껴볼까.
김영갑이 벌인 사진과의 실랑이는 어머니의 쌈짓돈에 숨겨있던 바스락거린 유년과 아버지에 대한 상처까지도 보듬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에 서 있으면 나는 이 분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미지의 미라, 밋밋한 평면의 현실에서 지나간 사람들에게 입체감을 갖게 하는 것은 어제라는 과거의 시간을 딛고 있는 오늘의 현재일 것이며,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일의 미래일 것이다. 내가 어떠한 직업을 갖던지 그것이 나를 완전하게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일말의 단서를 제공해 줄지라도 그 안에 온전히 내가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움을 채우고 고독함을 채우고 쓸쓸함도 채워서 절미함 속에 여여 둥둥 떠다니리라. 그러나 시간은 짧다. 유토피아는 인간 세상의 시간을 곱절로 흡수하고 빛을 거둬간다.
안전지대였던 ‘할망 바다’를 떠나서 심연의 동굴로 들어간 김영갑, 불치의 병을 걱정하는 타인의 말에 휘둘린 자신을 찾기 위해 명상센터로 삼은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따서 두모악(頭毛岳) 갤러리를 짓고 그곳에 이십 년 간의 빛그림 흔적을 걸어두었지만 그곳이 습기 차지 않고 언제까지 계속 빛을 발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동박새를 유혹하지 않는 동백꽃, 오늘은 져도 내일은 피겠지.
이제 그는 이곳에 있지 않다. 매일 자연을 기다린 그는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싫증 내지 않을 것이다. 오면 오시고 가면 가시라. 나는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볼 것이다. 공터를 울리는 바람을 손으로 잡으며 그게 당신이겠거니 하곤 소곤소곤 말 걸어 볼 것이다. 난 환상의 섬, 이어도를 꿈꾸며 사니까.
2005. 10. 15. SATURDAY
인간사에서 변치 않은 것이 있던가. 시간적 제한이 걸리면 기필코 그 문턱을 넘고 싶다. 헤집어진 마음을 몰아치게 만드는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면 빡빡한 도심의 창문을 뒤로하고 반문한다. 바쁜 하루를 내려놓고 아쉽기만 한 오늘에 흘러가는 시간의 풍광을 담아두었는가.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듣는다. 말갛게 눈을 떠서 구름이 떠다니고 흩어져가는 곳에 시선을 둔다. 어느덧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그때의 나는 오늘에 이렇게 덩그러니 누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