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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26. 2024

EXCRETION

배설(排泄)의 태도에 대한 변설(辯舌)

나는 배설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똥이 부처라는 이야기도 있듯이, 똥은 놓인 위치에 따라 더러운 것이 되기도 하고, 생명을 태동시키는 거름이 되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하수도로 나가서 버려지는 똥은 더럽다고 인식되지만, 똥뚜간에서 건져서 삭힌 똥은 논밭의 영양분이 되니 더럽다고 보기 어렵다. 먹고 마시는 포만감보다 싸고 누는 시원함에 매료된 나는 배설을 즐겨하는 인간이다.



[SHIT, HUNGER & CONSTIPATION] 2014. 6. IMAGE COLLAGE & RETOUCHING by CHRIS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자신에게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그 반대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줄 수 있는 것은 거부하려고 노력하겠나이다.' 호프만의 기도 중에서, 《호프만의 허기(Hoffman’s Hunger), 레온 드 빈터(Leon de Winter)



호프만의 묵직하고 오래되고 딱딱한 대변과 함께 굵직하게 배설되곤 하던 베네딕투스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의 지성의 개선에 관한 논고와 사물에 대한 진정한 자각으로 가장 잘 인도해 주는 과정에 관한 논고는 흥미로웠다. 무엇인가를 쥐고서 놓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된다는 '변비(Constipation)'는 무언의 과욕으로 분출되는 신체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결코 투쟁이 있을 수 없다. 사라져 버리더라도 슬픔이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쟁취하더라도 질투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며 공포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한마디 말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미동도 없을 것이다.’라니, 애욕의 대상에 대한 갈망에서 고통이 시작되고 스스로를 놓아줌으로써 애증이 풀리는 결말을 상상하는 이에게는 상반된 결과를 안겨 줄 수도 있겠다.


정치와 철학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정치에 인간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해져 있다. 투쟁과 반목, 쟁취와 변명이 산연한 정치판은 누군가의 목을 지긋하게 발로 누르고서 대중에게 가장 장렬한 웃음을 보여줘야 하는 연극판이나 다름없다. 사유하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생활철학을 하면 명상과도 같은 효과를 얻게 되겠지만 실생활에서 의지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은 통제되지 않는 불수의근의 작용처럼 무기력하고 나약한 허체(虛體)를 유지한다. 렌즈를 갈면서 일원적 철학을 연마한 스피노자는 감정과 지각의 속박을 벗어나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오도된 일상의 사건들이 영원의 공간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직시하려면 연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단 도구가 없으므로 손가락으로 바나나 껍질을 벗겨보겠다. 속살에 익숙한 위장이 꿈틀거린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은 허기의 상태에서 각종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과식은 있을 수 있지만, 육체에서의 허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소위 '허기'란 먹고 또 먹고 그 안에 공허하게 뚫려 있는 속을 위로하기 위해 신물을 뱉어내고서는 다시 먹는 상태이다. 그런데 의욕을 가지고 덤벼도 때로는 모든 것이 귀찮다. 음식물의 섭취를 통해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고 싶은 것은 뇌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예방적인 차원에서의 본능적인 저항인가? 충족과 만족이라는 극점의 상태를 추구하는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사념하고 책을 읽는 행위는 배고픈 위장 밥그릇을 채우려고 인내를 구걸하는 비굴한 현실에서 감정의 사치를 누리는 혜택자의 자리로 격상시킨다. 허기가 지면 입과 눈, 귀와 코, 배꼽과 항문에 욕망과 질투를 쑤셔 넣는다. 돼지는 상상임신을 감행하고 토한다.


잠시 변통을 안겨준 지성의 개선에 관한 논고와 사물에 대한 진정한 자각으로 가장 잘 인도해 주는 과정에 관한 논고》를 들춰보겠다. 허기진 호프만을 사고하게 만든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의 몇 가지 변설들을 살펴보자.


<1장-최상의 행복, 영원한 것들>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종종 베풀어지는 것들이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후 나는 모든 것, 특히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는 만큼만 선함과 악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진정으로 선한 것이 있어서 사람이 그의 일부분이 될 수 있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서 그것 혼자만으로도 영혼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그 무엇을 찾아 얻게 되면, 지속적이고 완벽한 희열을 영원토록 느끼게 하는 것이 과연 있는지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난 이렇게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아직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명예와 부로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알고 있다. 만약 내가 뭔가 다르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뒤를 쫓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또한 최상의 행복이 혹시 확실한 것들 속에 놓여있다면 그런 것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것들을 위해 굉장한 노력을 투자하더라도 만약 그 안에 그것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최상의 행복은 역시 나를 비켜갈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호의를 갖고 있는 사물들의 성질 속에서만 행복과 불행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근원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투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져 버리더라도 슬픔이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쟁취하더라도 질투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며 공포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한마디 말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미동도 없을 것이다. 오직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영혼을 살찌운다. 단지 그것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불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며 간절히 소망해야 하고 온 힘을 다해 추구할 대상이다.


<3장 - 상상에 관하여>  

진정한 관념을 다른 생각들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거짓되고 가상적이고 의구심이 드는 관념들을 진실한 것과 혼동하지 않도록 정신을 지켜주는 것으로 설명되는 방법 중에서 관념의 정의란?

불가능하다 - 한 사물의 본질이 그것의 존재에 모순되면 불가능하다

필요하다    – 한 사물의 본질이 그것의 비존재에 모순되면 필요하다

가능하다    – 한 사물의 존재나 비존재가 그것의 독특한 본질에 모순되지 않으면 가능하다


<6장 – 의혹, 기억, 상상, 언어>

우리에게 의심을 품게 만드는 관념이란 확실하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감각의 착오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도 의혹이 생겨날 수 있다. 기억은 어떤 일정기간의 사고와 연관하여 뇌에 새겨진 인상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기억을 더듬는 것은 뇌가 오관을 넘어 머릿속에 다다른 인상들을 쏟아 놓는 일종의 집산지를 헤매는 것이다. 공상은 그것으로 인해 정신이 시달림을 당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방법으로 지성의 도움을 받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공상과 기억만이 잘못된 관념을 불러오거나 의혹을 증폭시켜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에 함정을 파놓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도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성 안에서만 존재하고 상상력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개의 경우 무형이라든가 무한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명칭으로 부르는 것에서 이미 그것이 생겨난다.


<7장 – 정의로부터의 가르침>

지성을 청결하게 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육체의 우연한 충동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에 의해 생겨난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을 갖는 것에 있다.


 <8장 – 질서에 대하여>

이성이 필요로 하는 한 가능하다면 객관적인 존재도 모든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사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 우리의 모든 상상을 정리하고 통합시키기 위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부터 다른 진정한 사고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다시 정신없는 머릿속으로 돌아와 보자. 단 하나의 진정한 사고나 모든 의혹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관념이 존재할까? 방사형으로 축약된 인물에 곁들여진 스피노자 해설은 진중한 자세로 들을 수 없었고 나는 스스로의 경험으로 빠지게 되었다. 늑대 인간의 방목된 허기는 인간의 육체가 현실에 적응하기 전에 통제당한 정신부터 갉아먹는다. 유약하고 세심한 근심들이 최상의 행복에 접근하는 과정을 알게 만든다면 일정기간 득해도 좋겠다. 비록 겪는 동안에는 고통스러워도, 숨이 끊길 때 잘못 살았단 후회를 길게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죽음은 위대하다. 우리는 웃고 있어도 그의 것.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죽음에 관한 암울한 시처럼, 세월의 무기력이 돌부리처럼 채일 때가 있다. 생활에서 시대의 장인들이 만든 장치를 통해서 굳어진 관심을 전환해 보려고 계속해 의미를 분절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지만 그것은 변질된 충격을 얼마만큼 완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유년시절의 불완전한 경험 형태를 대리적으로 투사하여 추억을 보상하려는 인간의 갈망은 광포한 허기를 유발한다. 가족 간의 믿음도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매달린 인간관계는 의식과 육체 사이에 이원감을 드리운다. 불면과 성욕저하는 다반사다. 단순한 경험, 우연한 경험, 일반적 지식의 축적, 직관적인 지식의 연마, 이 사 단계의 지식을 습득하고 관계에 대한 평등원칙을 수학공식에서 발견해도 실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지 않는 도구를 휘두른다면 돈키호테 광기가 재현되리라.


실재와 허상에 대한 관념의 원(圓) 추상은 흔히 설명되는 자연의 질서만큼 진행적임으로 관념과 가설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사물의 진실을 발견하면 그것을 사물의 내면적인 특징이라고 지정하게 된다. 한데 인생은 연역적이지도 귀납적이지도 않다. 어떤 시점에 놓여있을 때 총체를 말하겠지만, 본체가 사라져도 여전히 결론 나지 않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배설과 섭취를 반복하면서 지성을 개선시키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의혹 없는 자각의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지반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절대적인 개념은 표현되기가 쉽지 않다. 긍정과 부정의 교류를 겪으면서 자연으로 눈 돌려보면 망막의 피로는 어느 정도 해소될 것임은 분명하겠으나 사고하는 타원범위가 직관과 상상을 넘어설 때까지 혹은 서로 자극하며 무한한 팽창과의 합의를 거부할 때까지 사유는 신과 인간의 ‘단순한 말 주고받기’가 될지 모른다. 폴 발레리의 말처럼 그것이 내면을 자극해 자기 말 듣기에 익숙한 사상가를 태동시킨다면 더더욱 말이다. 어쨌거나 배고픈 호프만은 미워할 수 없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 허겁지겁 바지 끄르고 변기에 앉아 스피노자를 탐독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대학 때 호프만의 허기를 읽으면서 고 3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변비의 이유가 입 닥치고 배우며 배설을 허용치 않는 수직적인 교육 구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립보행의 인간에게만 변비가 있다는 생물학적 연구결과에서도 보듯이, 복부를 팽만하게 하고 장기를 누르는 위로부터의 압박과 강요는 허리를 필 수 없는 묵직한 정체를 가져온다.


허기와 변비와의 상관관계도 잘 살펴보면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육체적으로는 굉장히 허기가 졌고 정신적으로는 공허했다.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주민증을 획득하면 정말 성인이 되는 건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그런 불안함이 허기를 부른 것인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책 내용을 집어넣는 만큼 보상작용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넣었다.


배설보다 섭취가 많고 거기에 운동성이 부여되지 않으면 신진대사 기능이 떨어진다. 특히 대장의 기능은 잠자코 책상을 지켜야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변비와 같은 파업(STRIKE) 또는 설사와 같은 사보타주(SABOTAGE)를 가져온다. 반란의 설사는 드러냄이 명확하여 잠시의 휴가를 신청할 수 있지만, 변비는 강력한 내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드러냄이 적어 휴가는커녕 공기를 오염시키는 암모니아를 유발하기도 한다. 여하간 대학에 들어간 뒤 간헐적 폭식은 여전했지만 변비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갈증이 심해서 하루에 팔 리터 이상의 물과 커피를 달고 살았다.


화장실에서 책을 들고 한두 시간씩 배설에 몰두하고 있으면 과잉배설의 변통, 치질이라는 손님이 찾아온다. 처음엔 무시하고 말았는데, 점점 따갑고 무서워서 화장실에서는 책 금지와 함께 삼 분을 넘지 않는 규칙을 세웠다. 하나밖에 없는 내 몸은 하나에 꽂히면 고장이 난다. 적당히가 없는 삶에서 요즘은 철로 만들어져 있는 줄 알았던 몸이 기면과도 같은 널브러짐을 요구한다. 깨어있으면 어깨가 쑤시는 건 여전하다. 목 한번 돌리고 국민체조를 한 뒤에 생활의 달인 스피노자 선생님처럼 디자인 구상이나 끄적끄적 긁적여야겠다.




참고로 작가주의 인간들에게 잘된 배설의 결과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디자인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철학이든 뭐라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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