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엔이 발간한 <세계 이주동물 현황> 보고서에서 철새들이, 아니 단순히 철새만이 아니라 철을 따라 이동하는 동물들의 1/5이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동물들의 개체수는 44%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식지의 감소, 불법적인 사냥,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로 인하여 명금, 바닷거북, 고래, 상어와 같은 생물들이 언제 멸종할지 그 미래도 불투명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면, 세상을 한 바퀴 돌고 회귀점이 없으면 창공에서만 날다가 지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인연을 정리하고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나를 찾는 길일까.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던 생각은 몸만 커버린 채 그대로 머물러있다. 난 이곳에서 삶에 불만족과 만족을 동시에 가짐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생에서 부여한 습관적인 회귀에 익숙해져 있다. 이전의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2005년 2월, 로맹 가리(Romain Gary)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를 보고 쓴 글이 눈에 띄었다.
글을 읽다 보면 당혹스럽게도 단숨에 사는 것이 무료해진다. 평상으로 접어들수록 번잡하기만 할 뿐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내 인생처럼 단 몇 구절에 드리워진 감탄은 발 밑에 너저분하게 떨어진다. 긴 글들은 더러운 마포자락을 휘두르며 작가의 것이든 내 것이든 감정의 돌 뭉치를 쏟아붓는다.
‘내 자식이오!’
작품에 포장을 씌워가며 깊이 애정을 표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세 줄로 요약되는 장편을 짓기 위해 모질고도 지루한 상황을 마련한다. 이야기와 별 상관없는 인물을 데려오고 그 자식들은 추위에 떨도록 광장에 세워둔다. 거대한 사건을 물고 올 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발가벗긴 채 익명의 시선들에 둘러싸인 허구의 아이들은 갈 곳을 잃고 종종걸음을 재촉한다. 만들어내는 작품조차 이렇게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골다공증에 걸린 부실한 뼈들을 버릴 수 없다. 수세미처럼 구멍이 숭숭 뚫리면 비누 없이도 빗방울을 비비대며 외피에 풍성한 거품을 일으킬 테니까. 그리하여 고독한 피에로의 초상처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글들이 탄생한다.
내가 즐겨 찾는 작품들은 글자에 손을 짚은 이후부터 나태하게 대상을 보도록 종용하고 사물을 거꾸로 보게 하거나 사람을 믿지 말라고 부추겨왔다. 두꺼운 이불을 말고 고이 잠자고 있는 악성을 잡아당기는 것일까? 아니면 쓰디쓴 약물에서 살구꽃이 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까? 덕분에 이제는 사랑은 영원하며 인생은 아름답고 하루는 즐겁다며 반짝반짝 꽃말을 붙인 그림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이 의심스럽다. 정말 너에겐 인생이 멋진 꿈인가? 나의 꿈은 악몽인데. 산다는 건 정말 고통인데 말이다.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들과 진물 나도록 살갗을 벗겨내는 싸움인데 말이다.
나에겐 오랜 취미가 있다. 밝고 행복한 세상에서 열심히 타락해 가는 와중에 어떤 책이 좀 괜찮다 싶으면 대충 읽고 난 뒤에 발 밟히는 곳에 몇 개월 놔두는 것이다.
이를 닦으러 갈 때 제목을 읽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집에 돌아와서 문을 열고 책 표지를 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잠을 자기 전에 그림자만 드리워진 껍질을 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하면 책은 자취를 감춘다. 머릿속엔 온통 몽상만 남는다. 새가 되면 페루에 가서 죽겠다는 다짐이 맴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가 직접 만들었다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타이틀만 보았다. 허망한 내용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책을 보더니 누군가가 물었다.
“어? 새는 페루에 가서 죽다. 새는 왜 페루에 가서 죽는 거냐?”
진지하게 물었던 질문에 불쑥 튀어나온 나의 대답은 뾰로통했다.
“허무해서.”
드넓은 창공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삼 킬로미터의 좁은 모래펄에서 죽는다는 새들은 영혼을 바치는 성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하하는 성자처럼 진주목걸이를 차고 쥐덫에 걸린 양 균형 잃으며 날개를 곤두박질친다. 전투기의 속도로 떨어지는 시신을 받아내려면 모래는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워야 될 것이다. 날아오는 것들은 다 찢어버려야지 안 그러면 새벽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내일도, 모레도 날아올 그 많은 녀석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젖었던 사람들.’
온전히 묻히던 조각나서 묻히던 썩기는 매한가지인 인생인데, 삼 킬로의 넓이를 자랑하며 널찍한 베라나스로 돌아갈 새들과 달리, 인간은 한 평도 못 되는 땅에서 홀로 죽는다. 그래, 우리는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젖었지만 고향을 찾아 날아가는 새는 되지 못했다. 난 마흔일곱이 되려면 두 손 가득 꼽고 장거리를 뛰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다.
‘나이 마흔일곱 쯤 되고 보면 배울만한 자신의 교훈은 체득한 셈이고 위대한 목적에도 아름다운 여자에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정말일까? 나이가 들면 뭐 이리 심심해? 모든 것을 통달해서 차분한 눈길로 삶을 보내면 무슨 재미가 남지? 젊은 날 물가에 뛰노는 숭어의 팔딱거림도 맛보지 못하고 해골처럼 정신만 폭삭 늙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한다면 내가 보기엔 마흔일곱은 나이를 헛 먹은 오리발이다. 난 도를 잘 닦은 성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 허울 좋은 개살구를 처바른 꼬리를 치켜들고 환영을 겁나게 둘러가며 우상이 되고픈 마음도 없다. 자꾸 현실의 세계에서 빠져나가서 외진 곳에 머무르고 있는 녀석을 잡아오기가 벅차다. 어디로 숨은 것인지 틈만 보이면 서슴없이 드러눕는 방자함에 실소를 터뜨려본다.
‘모든 낚싯밥을 끊임없이 물어보는 희망’
정말 바보스럽다.
'시골은 그 나름대로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짐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유용한 것으로서의 짐승, 집 밖의 개집이나 발 밑의 짐승밖에는 좋아하지 않는 시골사람 특유의 편견.'
피에르 키리야의 《고독한 피에로》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골의 편견이라 부르지만 짐승을 시골틱하게 좋아하지 않고는 달리 어떻게 좋아해야 하나? 좁은 철책에 웅크린 도시 사람들의 방식으로? 도시인의 짐승대하는 태도는 대체로 허술하기 그지없으며 이기적이다. 외로운 자신과 놀아주길 바라며 멍청한 곳에다 떼를 쓴다. 개들을 사람과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루종일 전자구이를 하려는지 털갈이도 심한 개털을 뽀글뽀글 파마시키고, 마당에 놓아주면 알아서 챙겨 먹을 주둥이에 소독한 밥그릇을 들이밀며 배불리 처먹으라고 두둔한다. 사람이 무섭다며 원숭이 새끼와 자식의 연을 맺고 전재산까지 물려주는 B.B. 의 암팡진 독선과도 닮은 사랑. 사랑에 법칙이 있듯이 헤어짐에도 나름의 메커니즘이 있다면 나지막한 말소리가 우리를 침묵으로 인도할 때까지 잠자코 있으면 좀 어때서! 출구가 막혀버린 개미들은 작업벨트를 차고 있어도 회의가 들지 않을까? 난 뭣 때문에 이 일을 하던가? ‘생활 밖에 서 있는 느낌’ 전문인이라 규정지은 현대인 모두가 이러한가? 그렇다고 직업도 없이 노닥거리면 생활을 행주로 반질반질 닦아가며 안으로 파고들 수 있을까?
사회에서 놓인 대중의 낙오감은 고객도 없는 세일즈맨의 비애와 닮았다.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한 아서 밀러의 그 유명한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하루종일 열심히 달렸다가 가죽가방에 고이 모셔둔 것이, 그러니까 내가 평생토록 키워왔던 열매가, 세월이 지나면서 값이 매겨지는 골동품이 아니라 상품이 줄줄이 적힌 전단지였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살고 싶었고 살아왔지만 진정 나로 존재한 적은 없는데 누군들 살고 싶을까. 생명은 귀중한 것이니까 무조건 살아야 할까? 그런 이상한 말이 어디에 있지? 허공에 뿌려지는 호외들은 수집품이 되기엔 장사꾼이 조종하는 유행을 등지고 가볍게 날아가는 허탈함인데.
하. 하. 하. 사는 게 우스워서 새롭게 웃는 법을 연구 중이다. 조각조각 끊어서 웃다 보니 골이 쑤시면서 귀가 먹먹하다. 개소리를 내는 달팽이가 움직인다. 그러고 보니 한 여자가 겪은 사소하지만 실제적인 공포를 시적 환상과 심신의학적 성질의 현상으로 마무리 한 글이 생각난다. 레몽 장이 지은 《밸라 B의 환상》인데, 나도 주인공 B 못지않게 환상에 잘 젖는다. 그녀와는 좀 다른 도피적인 성향이 짙다. 도주에 유리하려고 그런지 거느리는 족속은 단출하다. 징글맞은 거미나 개미가 한 마리도 아니고 떼거지로 꽉 죄인 팬티 속으로 몸속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는 진득하고 순응하는 생활형 밸라의 침입자와 달리, 도망자의 귀에선 달팽이 한 마리가 맴돈다. 손톱 굵기만 한 크기에 끈적한 침을 뿜는 암놈이다. 하루종일 속이 메스꺼운 걸 보니 임신한 달팽이가 흘린 양수가 빠져나가는지 신기하게 배는 안 아픈데 귀가 아프다. 안 그래도 저녁에 쇠똥의 색과 모양이 현저하게 같고 섬유질이 풍성하게 박힌 쑥떡을 엿가락처럼 늘려 먹다가 귀가 왱왱거렸다. 그 질긴 떡을 먹을 땐 입을 쫙쫙 벌려야 한다. 달팽이 관이 노화되면 혈압이 오르고 갑자기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구역질이 난다고 한다. 내 귓속의 달팽이는 철이 없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턱밑 샘에서 내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침을 한껏 마시고 배가 불렀는지 적당하게 높은 코의 언덕에 꿈틀꿈틀 기어가서 드러눕는다. 자기를 담은 들통은 분주하게 뛰는 동안 낮잠을 들입다 자고는 밤마다 망막 뒤로 엉금엉금 기어 온다. 곧 자기 몸놀림처럼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얘는 도대체 때가 어느 때인 줄 모르고 정신없이 우는 거야? 아니면 교미하는 단계인가?”
그리곤 밤새도록 관망한 눈이 뻑뻑한지, 아니면 흥분했는지, 지친 몸이 눈을 감고 일어나면 베개 위에다 식염수 한 사발을 흘려놓거나 진득한 오물을 배설해 놓고 사라진다. 밸라 B의 환상은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나를 압박하는 중증의 환각을 제거하려고 진바지를 입고 아름답게 화장한 뒤 마지막 터치로 기다랗게 상처를 가려왔던 머리칼을 자르는 순간, 그곳에선 달팽이가 뱅글거리며 나올지 모른다.
"안녕. 난 너와 15년을 함께 살아왔어. 이젠 떠나."
불개미와 붉은 거미가 아닌 음울한 멜로디를 가진 달팽이. 만약 네 녀석을 발견한다면 꼭 별나 C로 부르겠어.
잠은 안 오고 머리가 아파올 땐 언젠가 읽었던 책 속의 내용으로 새끼줄을 쳤다가 결린 어깨 위에 얹어가며 논다. 사람을 만나서 술을 들이붓고 잘 살았는지 뭐 하는지 묻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고민에 차있는 자들에게 쉽게 풀어놓을 수 없는 진한 억눌림은 차갑게 젤리로 굳어간다. 당연히 산이었던 욕구는 알싸하게 쪼그라든다. 널찍한 홀에 앞장세울 수 없는 내일을 우회의 통조림 속에 넣고선 기분을 동냥질해 본다. 창백한 발걸음을 뚜벅거리며 불타는 가슴을 씻어낼 환기창이랍시고 겨울의 거친 바람도 마셔본다. 그런데 야생의 기쁨을 막아둔 순간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한 입술은 여전히 빠드득 소리를 낸다. 가장 사랑했던 시간만이 흘러갈 수 있다면! 르 클레지오는 시간을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굉장히 감각적인 시간을 소유하고 있다.
‘그 길고 타는 듯이 뜨거운 삶의 단 하루. 피부에서 나는 냄새, 입술의 맛, 몸을 떨게 한 욕망.’
정지한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늘 내 머리를 고통스럽게 감싸는 평범하고 질긴 하루는 아닐 것이다. 너의 귀에 속삭이는 나의 뜨끈한 몽상이자 열렬한 다짐일지도.
‘너 알고 있니? 나는 새가 되면 페루에 가서 죽을 거야. 하지만 난 새가 될 수 없겠지?’
그렇게,시간이 흘렀다. 난 오래전에 부끄러움은 버렸다. 누추한 나를 알아봤자 더 알 게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다만 살아갈 뿐이지 이질적인 언어들과 섞이기 싫었고 말하기 싫었다. 살기 위해서 표현을 선택해 놓고 침묵하기만 했다. 가까운 자들에게 향해 있던 분노와 억눌림이 터져 나올 때마다 외면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다.
아직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새는 되지 못했다. 페루에 가서 죽을 만큼 허무하지도 않다. 난 나의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CAZA'라고 지었다. 어리고 밝은 얼굴의 사자, 들판을 뛰노는 게 마냥 좋은 그런 꿈 많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