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위해 선보인 드라마 페스티벌, <이상(李箱), 그 이상(以上)>. 초겨울 음습한 기운에 등짝이 시렸던 목요일 밤 방바닥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우연히 보게 된 이상(李箱)의 색다르고 이상스러운 이야기였다. 시간을 거스른 창작은 원래의 인물을 전혀 별스럽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이상(李箱), 화면을 따라 보게 된 이상이 이토록 추리에 능한 인물이었던가, 순간 혼란스러웠다. 악당조차도 감미로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세상에 정확한 고증이 존재해야 하는 사료적인 도덕이란 상업과 자본의 가치를 두고 있는 미디어 시점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 책에서 본 듯한 글귀가 생각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보통 인물과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삶 속에서 뭔가 괄목할 만한 일화나 놀라운 사건을 열심히 찾아내어 곧 그것을 화제 삼아 전설을 만들고 결국 그것을 광적으로 완전히 믿어버린다. 그것은 평범한 인생에 대해 낭만적인 반기(反旗)를 드는 것이 된다! 그렇게 인간은 삶에서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투명한 베일의 막을 씌워 주인공을 그려낸다. 전적으로 전설 속에 나오는 불멸의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세치의 혀는 불멸의 전설적 인물을 사랑한다. 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평하고, 만나지 않았던 그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행적을 가끔 그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을 보면 현실을 탈피하고자 머릿속 상상이 그려낸 일장춘몽이 얼마나 강렬한지 실감한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보통의 사람만이 가득하다. 나도 일상의 먼지에 찌달려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람이며, 가끔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분필가루 같은 삶의 찌꺼기를 한순간 시원하게 쓸어내릴 매큼한 소주 한잔과 기름기 흐르는 삼겹살 한 점에 오늘의 비참함도 잊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이다. 내 머릿속에서 사는 불멸의 주인공. 그리고 그대를 지배하게 될 허상들. 콜레라처럼 퍼져가지만 강렬한 그 흔적은 그저 한순간의 유행이 되기도 한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香기롭다. 香氣가滿 開한다. 나는거기墓穴을판다. 墓穴도보이지않 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 는눕는다. 또꽃이香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 다. 香氣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차거기 墓穴을판다. 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 墓穴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아아. 꽃이또香기롭다. 보이지도 않는꽃이 – 보이지도않는꽃이. 《李箱, 絶壁》
일전에 이상(李箱)의 작품들을 보면서 우악스럽게 붉은 피를 토해내 버려야만 성질에 차는 유약하고 색정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다. 작은 공간에서 갇힌 이들에게 유폐된 세계는 다양한 집중을 요구한다. 우아하고 세련되게 커버린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꽃이나 V.C 앤드류스(Cleo Virginia Andrews)의 《다락방의 꽃들 Flowers in the Attic》처럼 감춰진 곳에서 발현되는 꽃이라는 것은 언제나 복합적인 의미를 띤다. 꽃을 열심히 그려대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를 보고 한 그림쟁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물이나 생각의 가치는 엉뚱하고 비상관적인 영향에서 기인되었다."
일말의 탁자에 놓인 풀잎 하나를 보고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삶을 거느리는 생각과 살아가는 공간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널쩌버린 꽃향기에서 다시 정신을 차린 듯한 이상의 체념 섞인 꽃을 위한 그리움으로 밤바람에 쓸린 입맛이나 닦아야겠다.
이상하고 기이한 상상이 계속된다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소리를 낼 것이다. <이상(李箱), 그 이상(以上)> 본래 말하고자 했던 의미처럼, 흩어진 시공 속에서 오늘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2013. 11. 30 SATURDAY & 2004. 9. 25 SATURDAY
인생은 카드놀이
[인생은 카드놀이] 2004. 09.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인생은 카드놀이? 솔직함과 거짓이라! 가식적인 것이 장난스럽다면 가끔은 허용하지만 거짓으로 둘러싸인 삶은 살 수 없다네.
2004. 9. 7. TUESDAY
<이상(李箱), 그 이상(以上)> 드라마를 보던 십일 년 전, 이상(李箱)의 시를 읽으며 하루를 그리던 이십 년 전, 그리고 이상(李箱)이 활동하던 구십몇 년 전, 그가 태어났던 백 십사 년 전, 하나로 섞어버린 감상을 통해서 과거는 현재에서 의미로운 탈출을 시도한다.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며, 현재에서 바라보는 그날들은 알 수 없는 비밀로 변해버린다. 내일에 대한 희망은 얼마나 가소로운가. 한데 엉겨 붙은 기억들을 떼어내기 어려워질 때마다 가만히 손끝에 맺히는 감각을 굴려본다. 불멸의 이야기는 내일로 이끄는 어제의 머나먼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