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한 집념은 배움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Ernesto Guevara Lynch) in 《Mi bijo el Che》
외로운 <중앙역 Central do Brasil>에 놓인 때 묻은 신발의 설움을 알려준 월터 살레스(Walter Salles)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결국 영화 <미치고 싶을 때 Gegen die Wand>를 택했지만 젊은 여정을 담은 일기 또한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했다.
여행, 그 먼지 나는 열정은 기쁘다. 다만 세 번이나 시도했던 <이지라이더 Easy Rider, 1969>는 항상 잠으로 기대를 배반했다. 스스로 바람을 맞으며 달리지 않고선 화면에서 느끼는 속 시원함이 마음을 뚫고 온전히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모터사이클 곡예보다 여행의 꿈이 더 낫다는 보장이 없다면 나 대신 잘 미쳐주는 사람을 지켜보리라.' 물끄러미 포스터에 눈길만 준 채 여행보단 사랑이란 이름을 들고 검은 동굴로 직행했던 어제의 생각이었다.
또다시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의 열풍이 불 듯하다. 그는 책방을 지날 때마다 유난한 빨강으로 존재를 알렸다. 혁명의 들끓는 기운이 오른쪽 장딴지를 관통했지만 밀림의 실패는 종말이 아님을 신화로서 남겼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는 초라하다. 삐딱선을 타버린 파타의 심장은 영웅을 배격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마초적인 시가에 누렇게 절고 반동이 역설로 변해버린 늙은 혁명가보다, 패기 있는 함성을 지르는 젊은 사내를 좋아한다. 작은 아코디언을 끼고 메스티소(Mestizo), 물라토(Mulato), 아이마라(Aymara)의 하얗고 검고 노란 물감을 섞던 꿈을 사랑한다. 아무리 선의로서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하더라도 불타는 의지는 결국 똑같은 회색 재만을 남기지 않던가.
글로 표현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같은 계열의 혈족이 그린 체(Che)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체 게바라를 평했다. 하지만 타인의 눈망울에 갇힌 그는 역함이 가득할 때가 많았다. 거짓발림으로 찬양의 깃발을! 신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묻곤 한다. 당신의 말은 정말 사실일까? 누가 어떤 이를 값비싼 포장으로 매무새를 고치건, 본인만큼 속내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그 많은 양파껍질을 발라내는 시간에 양파의 내피는 곪아 썩을지도 진물이 되어 녹아 버릴지도 몰라.
시간에 멀어진 내가 아는 체(Che)는 일기장 속의 한 사람이다. 사실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 달리는 그가 좋을 뿐이다. 밀레니엄의 종소리가 가을 자락에 걸릴 무렵 나는 에르네스토(Ernesto Che Guevara)와 함께 포데로사를 탔다. 그는 모터 바람을 일으키며 여행을 속삭였다. 햇볕에 쬔 암흑의 비밀과 보름달의 긴 밤 풍경을 쏟아내었다. 한 명의 동반자를 소개했는데 그의 이름은 알베르토 그라나도. 나환자촌에서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나, 체 게바라, 그리고 알베르토. 우리는 나이를 떠나 세월을 지나 기찬 라틴의 대륙을 달리는 라이딩을 풀었다.
잠시 우리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8개월 간의 기록,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미 시간을 떠나버린 두 명은 말이 없으나 바다 건너 먼 이국 땅에 남겨진 한 생존자의 고백기. 골방에 갇힌 눈 가리고 발이 묶인 자를 태우고 떠나는 신나는 여행. 작은 서사시를 부르는 마음이 콩닥거린다.
스물세 살의 청년들. 의사들의 청진기를 여인의 배에 갖다 댄다. 힘 좋고 건장한 모터의 굉음을 울리며 불굴의 태양을 가로지른다. 허기진 땅거미를 느끼는 얼굴은 그녀의 눈동자와 헤어질 수 없네. 경고의 맛이 나는 빵을 꿀꺽 삼키면서 독감이 준 휴식에 눕는다. 단맛 나는 우리 찻잔을 계집애 같은 맛이라 놀리는 놈들과 건배! 날아가는 오리를 호수로 떨어뜨리는 치기 어린 실랑이는 여전하다. 긴 금발의 갈기가 빛을 잃으면 불안한 본능의 방아쇠는 울부짖는다. 꾸밈없이 흘린 눈물은 뿌연 안개의 희미함도 저 멀리 날려 버려. 삐쩍 마른 형제들의 서로 다른 풍습과 언어는 한 목소리로 외친다.
"우리에게 물을!"
바로, 이름 없이 목말라하는 방랑자에게 필요한 말. 펑크 난 예비 타이어는 불현듯 낯선 방문을 부른다, 친절에 취해서. 마푸체 인디언이 말한다.
"그대의 남자. 너에게는 친구일 뿐이런가."
"아니야, 이스터 섬에서 하루를 묵으면 너에게 살짝 윙크해 줄게. 공부도, 일도, 가족도, 그 밖의 귀찮은 것들에게서 널 불러 보겠어. 푸른 달빛에 퍼덕이는 하얀 바다는 우리의 구석구석을 파헤치겠지."
기계 삽이 파낸 황동을 들이마신 영혼은 독한 진폐증에 시달린다. 금으로 포장된 도로를 찾는 전설은 현실의 이기심을 몰아가리라. 당신의 배후에서 압력을 가하는 무리들을 물러나게 할 자 누구인가. 장밋빛 과거의 매혹적인 환상은 간밤 추위에 뼛속 깊이 스몄네. 부패한 악취가 몰려올 일도, 코끝까지 튀어 오르는 벼룩도 없지만 정체불명의 한기는 우리를 깊은 실의로 몰며 분노를 내면화한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 벽은 급속도로 달리는 짐승에게 짓밟히고 늙은 산은 저항을 분쇄할 수 없어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사라진 문명, 줄기를 흐르는 감동은 불편한 고요함을 내뿜으며 산 허리에서 절단된 동물의 시신처럼 저리도 쓸쓸히 누워있다. 그러나 자비로운 손길은 굶주림의 고통도 숨김없이 따 버리겠지. 오직 원시의 자연만이 그대의 속박을 풀어주고 열망을 드러낼까. 계속되는 카드게임은 비명소리로 가득한 밤을 끝없게 하겠지만 야윈 고양이와 지저분한 강아지는 매운 연기에서 기침하지 않으리라. 저 빨간 타일의 지붕이 우리들의 노란색 톤을 짓누른다 하더라도 역행하는 카라카스 영혼은 고집스럽게 뿌리내리며 숨 쉴 테니까.
세상의 중심에서 크게 사랑을 외친다 하더라도 세상의 축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존재감을 상실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급히 채울 것은 망각의 진통제라는 검고도 하얀 회색 분자이다. 정교한 계획이란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인생의 길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으로 누리는 삶에서 믿음은 휴지보다 쉽게 구겨지고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는 입술엔 논리라곤 털끝도 없는 비정함이 기관총으로 복부를 갈긴다. 아무리 기질이 방대하다고 하지만 굳은 벽을 만든 눈초리는 질시를 떨궈내지 못할 것이고 환각이란 늪에서 과거와 미래를 헛되이 긁어모으는 부질없음을 매일밤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 체 게바라는 그의 라틴 여행 일기를 펼쳐 보이며 죽음 속에 묻힌 마음은 영원히 삶을 지탱하는 동반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 특유의 시가향을 짙게 피우면서. 그래, 체(Che)도 자신의 마음을 탈탈 체로 치며 수첩에다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민감한 액체가 내 망막을 덮는지 모른다. 그대가 내 일기가 찍은 풍경을 실제로 알지 못한다면, 내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과 함께 당신 곁을 떠난다. 내가 과거에 한 때 그였던 나 자신과…"
혁명의 기운은 이 완고한 도시의 삶에서 더 이상 폭죽 같은 효력으로 다가오진 않겠지만 내가 보고 말하고 느낀 한 순간의 뇌리에 원초를 이뤘던 모터소리는 깊게 박혀 있을 것이다. 달리고 싶다! 그것이 삶의 진동을 가져오는 모터를 연상시킨 다면 언제든지 달릴 것이다. 황야를 지치던 모터의 먼지 냄새는 아스팔트를 굴리는 검은 휘발성 냄새로 타버린 이곳에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체 게바라의 남미대륙 횡단일기를 영화화한 거 같은데 확인은 안 했다. 체 게바라는 1951년 12월에서 1952년 7월까지 8개월간 그의 뿌리 라틴 아메리카를 돌았다. 사람들은 체를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명사형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옆구리만 조금 시큰거린다. 의식이 딱딱하고 겉 멋도 꽤나 많은 혈기 넘치는 청년. 자서전적인 여행 필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Un diario per un viaggio in Motocicletta by Ernesto Che Guevara》에서 받은 인상이다. 영화로 보면 만 4년 만의 조우가 되겠다. 볼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엔 졸지 않고 볼 수 있을까?
2004. 11. 14. SUNDAY
영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월터 살레스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메마르지 않은 꿈과 뜨거운 열정을 담은 평범한 두 청년이 어떻게 성장해 가고 세상의 돌부리에 다듬어지는지, 차분한 눈길로 삶을 매만지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 같았다.
"길을 밟는 여행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좁은 시각을 탁 트일 평지를 달릴 기회를 누린 사람들. 멀리 보이기만 하는 저 강 너머는 실제 얼마나 가까운가? 독창적인 혁명은 편협함과 독선을 거두고 외진 사람들을 보듬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가고 싶은 곳이 참 많다. 젊은 날에 떠돌 수 있는 자유가 부럽다. 잊지는 않으리라. 열린 마음을 지우지 말아야겠다. 문을 닫고 살기에는 아직까지 너무 젊잖아.
2005. 8. 어느 날.
방구석 탈출! 방탈출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머리를 쓰는 흥미진진한 느낌보다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살인게임이 직접적으로 연상되었다. 패닉룸(Panic Room)만이 아니라, 핍쇼의 벌건 눈알이머리에서 돌아다녔고, 쏘우(Saw)나 미저리(Misery)처럼 정신 나간 인간들이 설치한 공간에 갇힌 기분도 가득했다. 세상엔 자신의 공간을 안전한 지대라고 여기는 방콕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의 완전한 공간이 없다고 인식하며 세계를 방랑하는 인간도 있다.
여행(旅行)이 주는 단어는 세상을 유랑하는 나그네의 격을 보여준다. 길을 떠나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으로 다니는 행위인 여행은 영어의 트래블(TRAVEL)에서 더 나아가 행동적인 행위 위에 새로운 경험을 쌓는 축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머리로 움직이던 여행에 대한 그림들은 이제 머리를 벗어나 육체에 대한 한계를 실험하고 움직이게 만든다. 생활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는 현재의 목적성 여행은 업무의 성격이 강하다. 고정된 장소를 이동하여 새로운 길을 닦고, 물리적으로 일정 거리를 이동하여 타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며, 육체적 에너지와 신체적 상태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전환적 행위는 원래 트래블(TRAVEL)의 어원인 프랑스어의 "트라바이예 Travailler"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중세시기 힘들고 고된 일이었던 "여행"은 놀이로서의 여행을 인식하지 않은 자에겐 일하고 고생하는 트라바이예(Travailler)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누군가 놀러 가겠냐 아니면 일하겠냐고 묻는다면 타인들의 노는 개념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일보다 더 부담스럽기 때문에 분명 일을 선택할 것 같다. 놀려고 애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생스럽다. 요즘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안 되는지 되는지 직접 해봐야 알지 않을까?"
머릿속 상상을 실행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만 있어서 후회하지 않도록 고유의 데이터를 쌓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무모한 시도들이 선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실패할 수도 있고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나동그라질 수도 있다. 여유롭고 편한 것만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역할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고 움직일 때를 알아내서 적합한 시기에 적시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움직이는 자에게 뜻깊은 장소 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이동으로 색다른 경험을 쌓고 참신한 것을 탐구하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한동안 머물러있다가 길을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듯이, 생각으로만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때 가슴 깊이 묻혀있던 삶의 열정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