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초에 머리를 하고 팔 개월 만에 머리를 했다. 길게 엉켜버린 머리카락을 차분히 내려줄 필요가 있었다. 책을 유심하게 보는 습관을 기억한 헤어드레서가 한강의 책을 권했다.
"혹시 《소년이 온다》 읽어보셨어요?"
"아니요."
"우리나라에서도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가 나왔다니 응원해야죠.한강의 글을 읽으면서 뭉클했어요. 영어를 잘해서 데보라 스미스가 영어로 번역한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묘사했을까 궁금해요."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로 읽는 게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구토를 느낄 정도로 역겨웠다고 하던데요."
"그럴 만도 하죠. 섬세하고 적나라한 감수성을 가지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아일랜드에 있을 때 날씨가 오늘처럼 우중충하고 흐리고 스산하고 바람 불고 저조했거든요. 집에 틀어 박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는데... 지금 책 있는데, 머리 하는 동안 읽으시겠어요?"
《소년이 온다》, 두 시간 동안 한번 반을 읽었다. 여러 혼들이 모인 독백과 살아남은 자들의 싸늘한 증언을 거쳐 종이책을 두 번 가까이 회전할 때 타인에 대한 연민과 폭력에 대한 저항, 희생과 고통에 관한 인간 행동의 관찰 보고서는 밀도 있는 전율을 일으키며 세밀하게 다가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소년이 온다, 한강》 중에서
한강의 입을 통해 다채로운 혼백으로 파닥거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록적인 묘사는 충격적이라기보다 낯설도록 익숙하였다. 바람 앞 촛불의 흔들거림처럼 몸체 위에서 머물러 있던 불안한 촛농은 작가의 입술을 따라 부주의하게 긴 눈물을 흘러내리며 채 닫히지 않은 눈꺼풀 위에 뜨거운 살해 흔적을 남긴다. 전두환 군사정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행위는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가 행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나, 일제가 독립군과 조선인에 가한 정신적 신체적 만행이나, 권력을 장악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고문했던 그 모든 역사의 권력자들과 영웅의 주변인들이 합리적인 통치 역량이라고 적어둔 탐욕스러운 행동 강령과 다르지 않았다.
타인에게 고통을 실행하는 도구적인 인간에게 소극적인 머뭇거림은 있어도 적극적인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한 사회 시류에 휘말릴 때 인간의 피부와 뇌리를 쓸고 가는 상처는허약한 빰 위에 검붉게 묵은 피를 흘리며 가슴과 머릿속으로 깊게 새겨진다. 아픔은 마음에 두고두고 연약한 유리 껍질이 되어 가볍게 금이 가고 산산이 흩어져서 불안한 영혼 위에 덧입혀진다. 격렬한 폭력의 증거로서 작용하는 혼백의 입술은 쉽게 덜어낼수 없는 무거운 실체로 남아 있다.
인간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다시금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가장 확실한 방식은 아프도록 세밀한 기록을 통해 저 혼자 살기 위해 동료를 두고 도망가지 못한 굳어버린 장딴지와 적도 아닌 상대방을 차마 쏠 수 없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납탄에 끈적한 뇌수가 흐른 채 도려낸 가슴이 멍들도록 짓밟힌 혼들을 부르는 일이다. 초혼(招魂)하여 걸어오는 남자를 응시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중에서
얼어붙은 땅을 뒤로하고 봄에 피는 꽃들, 여름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들, 가을과 고별하는 빗방울들, 겨울을 맞이하는 눈송이들 사이로 아침과 저녁을 거르지 않고 당신의 잔인한 눈동자와 그날의 거친 목소리와 나의 가냘픈 숨을 기억한다. 그제야 늘어뜨려진 손이 구더기로 들끓던 안구를 헤치고 선명한 눈을 뜬다. 시간 앞에서 서성이던 망혼은 내일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눈부신 조명이 객석 사이로 쏘아져 내려온다. 과거의 감옥에 머물러 있던 소년은 객석을 헤치고 오늘의 무대를 향하여 다다른다. 저기에 소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