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막혀있고 텅 비어 있으며 깊은 정적이 감도는 장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감시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 타인의 은밀한 시선, 그것이 바로 지옥…
《Nos Amis Les Humains, Bernard Werber》
갱지에 쓰인 짤막한 희곡,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우리의 친구, 인간》을 볼 기회를 얻었다. 한 달 전인가, 신촌에 나갔을 때 버스 광고판에 붙은 연극 알림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모태가 《인간》, 이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친 않다. 베르나르의 소재 발굴과 내용 전개는 공상과 전통에서 발로 한다. 《개미》에선 중국의 옛 설화를, 《타나토노트》에선 이집트의 지하세계를, 《뇌》에선 중세의 해부학과 공상과학을 적절히 섞은 감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섞어찌개의 달인으로서 그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다. 예전엔 베르나르의 글들이 열광적인 사람들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몇 줄의 문장 빼고는 마음에 와닿진 않았다. 그래도 희곡 《인간》이 마음에 드는 건 짤막한 길이와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상상의 소재를 사용하여 소설과 극이 갖는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 때문이다. 연극에서 보이듯 긴박한 시간 해설과 현장감이 깃들여진 게 바로 대본이 주는 효과인데 극(劇)보단 소설의 형식을 더 많이 따르는 문장은 극적인 장점을 잘 살려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냉소를 뿜기에 바쁜 남자, 유리벽에 갇힌 두 남녀의 짧은 외계여행. 프록시마 켄타우리 핍쇼장에서 외계인의 관음증에 노출된 두 인간이 벌이는 적나라한 발언과 비판은 관객과 독자의 위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변태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육체가 갇힌 곳이 매직미러 안이라고 소리치며 마술사가 된 듯 탭 댄스를 추고 노래를 불러도 유리에 비친 땀 흘리는 두상은 매일 보던 모습이고, 철창에 갇힌 동물이 펼치는 서커스 공연 이상이진 않다. 인간의 본질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루덴스라고 말해봤자 그 말이 그 말이다. 섬에 갇힌 사람들이 상금 타려고 서로를 고발하고 헐뜯고 적으로 변하는 서바이벌 게임밖에 더 될까. 이상한 공간에 주어진 이유를 알 수 없고 존재의 의미도 상실한 둘이서 멀뚱하니 서로를 쳐다보다 할 일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서로의 게으른 삶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언사를 늘어놓다가 열탕이 뿜는 정적이 타인의 은밀한 시선보다 더 무서울 순 없기에 두려움을 가지며 포옹하는 자세는 인간 속에 내재된 사랑(愛)을 부르는 자명종이 된다.
당근과 채찍에 조금씩 길들여지면서 영역에 대한 특성도 망각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풀타임 코스로 인식하는 서커스 단의 광대는 다수의 갈채보단 개별적인 하나하나가 치는 손뼉 소리에 황홀함을 느낄 것이다. 상상의 카메라가 어디 매달려 있을지 잊어가고 마법을 꿈꾸는 인간은 운명의 바퀴에 맞서 싸우기보단 세상을 향해 놓인 수레를 힘차게 굴려간다. 야생오리처럼 많은 밥을 갖다 준다 해도 살찐 프와그라 신세를 면하기 위해 굶는 용기는 없다. 외계인과 평화 교섭을 시도하지만 단서라고 내놓은 E=mc2가 먼지보다 작은 우주의 일부분인데, 4.22광년 밖에서 채집된 나비 둘은 TV를 보고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는 우스운 광대의 소극으로 마무리해 주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사흘 전 지구는 대륙의 파편을 우주에 쏟아내며 폭발해 버렸다. 별들의 허공에서 살아남은 것은 서로의 온기만으로 짐작할 남녀 둘. 인류의 불씨를 살려 종족보존의 법칙을 세우는 논거를 주장하기 위해 각자 판사와 검사의 역할을 맡고 멸종과 생존의 깃대를 잡고자 한다. 애통한 종말에 신성한 동물의 복귀를 꿈꾸는 이유는 사랑과 웃음과 예술, 이 세 가지이다.
내가 울리는 웃음이나 만드는 작품이나 행하는 사랑이 장미 꽃봉오리의 맵시보다 조악하여 헛되다 할지라도, 잠자리가 살포시 날아오르는 것에 비해 하중이 무겁다 해도, 수컷 귀뚜라미가 두 날개로 연주하는 락큰롤보다 서툴다 할지라도, 끈끈한 점액으로 추상회화의 극치를 연출하는 달팽이보다 독창성이 떨어진다 해도, 파국을 맞은 인간은 잘못을 고백하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모험을 계속했기에 무죄일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현실에서 달음박질쳐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선인 지구가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면 달려가다 우주선의 앞머리 들러붙은 아이는 별들이 반짝이는 광경에 우뚝 서버리고 말 것이다. 활활 타는 별빛에 차가운 감옥도 그 불씨가 불꽃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나누고 긴 잠을 자는 동안 천장에 드넓게 울려 퍼지는 그대의 코 고는소리조차도 달콤한 수면을 몰고 오는 기나긴 자장가가 될지도 모른다.
2004. 12. 14. TUESDAY
나의 기억은 오래 전의 서술에 의지하고 있다. 유명한 설렁탕 집의 비결이 수십 년간 끓여 온 국물이 자작해질 무렵 새로운 국물을 계속하여 덧대어 온 작업에 있었다고 말해질 때 무릎을 탁 치며 쿨쿨 잠자고 있는 기억에게 속삭인다.
"떠나가지 말고 있어. 곧 멋들어진 짬뽕을 만들어줄게!"
요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예고편을 보고 있으면 별나라 외계인보다 인간의 사고가 더 외계인스럽다. 외계인과 인간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외계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존재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속 깊은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작업일 수 있다.
2014. 2. 15. FRIDAY
가끔 난 지구인인가 묻는다. 외계인도 나와 같을 수 있다. 별세계의 인간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오류일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겉모양새는 같다고 해도 같은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 형상과 실체는 모두 다르다고 보고 이질적인 세계관의 차이에서 동질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은 인간 삶의 어느 부분에서 필요한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웃음과 예술. 개념적으로는 부르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가치이다. 시절이 하 수상(殊常)할 땐 지구를 탈출하고 싶다. 다른 시각으로 이곳을 해석하자면 어쩌면 여긴 이미 외계인지도 모르겠다.